ㅡ책장 때문에 이사한 남자, 태하편

세상에는 흔히 두 부류의 집이 있다고 하죠. 바퀴 달린 붙박이 책장이 있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 지난 연말에 자취방 이사를 위해 집을 보러 돌아다니다가, (그때는 빈집이었던) 지금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완전 꽂혀 버린 이유는, 바로 이전에 살던 신혼부부가 멋들어지게 짜놓은 대여점용 붙박이 책장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태하의 서재_앞의 두 칸이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답니다. 훗, 님들 집에 이런 거 있음?
(완전 기고만장;;;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코너의 기획자는 의심의 눈길을 애써 피하고 있지만('' )( ''), 아무리 봐도 누가 봐도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인의 서재’를 카피한 것 같은 이 코너의 스타트를 끊는 주제에 ‘책장’ 자랑만 하면 되겠어요? “태하의 서재는 ○○이다” 같은 말도 좀 멋지게 만들어 보고, 있어 보이는 책들도 몇 권 소개하고, 동영상 인터뷰도 좀 해야겠…… 지만 손사래 손사래. 아직 부족한 게 많네요. 독서취향도 중구난방인 데다가 남들 다 읽는 책만 따라가기에도 벅찬 이 한 세상, 한탄하며 유명한 책이나 작가만 쭐레쭐레 따라가며 읽는 습성이 있어서 컬렉션(?)이 좀 부실하거든요. 자자, 눈높이를 확 낮추세요. 아래 책들은 제 삶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준 책들 몇 권입니다.

* *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 안의 파시즘 | 임지현 외

이 책이 나온 10년 전에 저는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내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일 수 있으면’ 하는 퍽이나 구체적인 꿈 하나 가진 것 빼고는 술 먹고 헤헤 거리는 재주밖에 없는 무식한 대학교 2학년생이었습니다. 돈도 없고 책도 지지리도 안 읽던 시절이었는데,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 게 분명한 이 책을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서 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읽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 사회 곳곳에 뿌리 깊은 파시즘의 그림자 때문에가 아니라(그건 ‘짜증’의 원인이었죠) “나도 공범일 수 있다”는 그 섬뜩함 때문이었죠. 좀더 나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면서 내가 하는 행동들이, 내가 뱉는 말들이, 나아가 나의 존재 자체가 어쩌면 그 꿈을 가로막고 있을 수 있다는 것. 지금도 많이 경계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치와 진리 | 김선욱

얼마 전 그린비에서 출간된 『철학 VS 철학』 각 꼭지 맨 앞에는 대립되는 두 철학자의 사진이 들어가는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나 아렌트
언니 사진만 보면 교정 볼 생각은 잊고 잠시 멍하니 쳐다봤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실 수가!! 야 세상아 작작 좀 불공평하자, 라고 잠시 뻘소리를 하며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이 책은 아렌트의 정치이론을 설명한 책세상문고의 얇은 책입니다. 제가 이 책에 감탄했던 이유는, ‘그래도 어쨌건’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이놈의 ‘정치’라는 게 태생적으로 도덕이 작동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간결한 통찰 덕분이었습니다. 정치라는 장(場)은 ‘진리’의 공간이 아닌 ‘합의’의 공간이라는 거죠. 아니, 분명 옳은 길인데 도대체 왜 현실화되지 않는 겁니까! 답답해 죽겠단 말입니다, 라는 그 시절의 순진한 울분(?)을 조금은 달래 준 책이었다고나 할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간의 힘 | 성석제

복학 후의 아득함에 위안이 된 건 문학이었죠. 한국 현대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공감의 여지도 제일 컸고, 감각적으로도 잘 맞았으니까요. 여러 작가들 중에서도 사람 냄새 물씬 나는데다가 말장난도 잘 치시는 성석제 삼촌은 손가락에 꼽힙니다. 이 책은 뭔가 시작부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요, 삼촌의 다른 책과는 달리 어려운 한문들로 잔뜩 무게 잡으며 역사물의 분위기를 솔솔 풍기거든요.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조선시대 양반이 남들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자신의 절대 진리인 유학 이념을 몸소 실천해 가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돈키호테가 겹쳐 보이며 배꼽 잡고 눈물겹더라고요. ‘인간의 힘’이란 얼마나 경이로운가, 삶의 비장과 해학은 얼마나 가까운가 등을 느끼게 해준 이 책의 주인공 허동구 씨는, 언젠가 술 한 잔 꼭 같이 해보고 싶은 캐릭터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달의 궁전 | 폴 오스터

한국 소설들이 조금씩 식상해 갈 무렵에 슬슬 외국 작가에게도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요, 이 중에서는 뭐 하나 딱 고르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제 책장에서 가장 넓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가 바로 폴 오스터인데요, 모험과 사랑과 꿈이 빚어내는 이야기의 향연은 책을 읽는 동안의 저를 정말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습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상상력이나 범인(凡人)들이 ‘말로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심리상태를 절묘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능력 등은 정말 저를 감탄하게 하지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저를 두근두근 거리게 했던 책이 바로 이 『달의 궁전』인데요, 3대의 파노라마 같은 인생역정을 읽는 동안 삶의 숙명과 수많은 우연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태도 같은 것들이 많이 인상 깊었습니다.

* * *

‘집 안의 책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편으로는 흐뭇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못 읽은 채 꽂아 두기만 한 책들에 대한 압박으로 “역시 책은 최고의 장식품이라능!”이라며 마음에도 없는 자기위안을 하는 건 아마 많은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마음이 무거운 더 큰 이유는 이렇게 이동과 보관이 수고로운 벽(癖)도 참 없겠다 싶어서입니다. 아니 이거 다 뭐라고, 솔직히 다시 안 볼 책들이 태반인데 무슨 보물단지라고 이리 싸매고 있는지! 중요한 건 공간으로서의 서재보다 머릿속의 서재 아닌가! ……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저는 오늘도 친구들에게 선물하느라 이빨이 빠져 버린 컬렉션들을 빨리 다시 채우고 싶어서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을 들락날락합니다. 아참, 그리고 슬기야, 빌려간 『사양빨리 갖다줘.



2010/03/11 10:14 2010/03/11 10:14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97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반 2010/03/11 14:44

    책 제목이 '사양'이라서 슬기님이 사양하지 않고 가져버린 게 아닐까요?
    (-_- ........)

    • 그린비 2010/03/11 16:12

      아항! 그런 이유가...아하하하;;;

  2. 책쟁이 2010/03/11 15:37

    책장 좋은데요. 그런데 저는 저것을 보고 왜 만화방 책장이 떠오르는 것일까요? ㅎㅎ
    정치라는게 밖에서 보면 참 웃기고 자빠진 일들 투성인데 거기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남다른 매력이 있기는 있나 봅니다.
    아... 김민수 교수님의 <한국 도시디자인의 탐사> 교보 들렸다 찾아보고는 쓰러질뻔했음. 책 값에 책의 크기에 크흑 OTL

    • 그린비 2010/03/11 16:17

      앗, 만화방 책장 빙고?!ㅋㅋ

      김민수 교수님의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는..도판도 많고 판형도 큰데다 페이지수도 많아서 가격이..크흑..^^;;

  3. 체대생 2010/03/11 16:19

    다음에 이사가시게 되면 방 내놓기 전에 연락 한 번 주세요ㅎㅎㅎ

    • 그린비 2010/03/11 16:29

      이사한지 두 달밖에 안 된 따꼰따꼰한 집이시랍니다.ㅋㅋ

  4. 해피엔드 2010/03/11 17:24

    오오-ㅂ- 멋집니다. 바퀴 달린 붙박이 책장 !!
    이거야말로 로망 중의 로망 ㅋㅋ
    제 책장도 한번 찍어서 올려야겠네요 !
    하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책 몇 권 달랑 꽂혀져 있는 책장,
    이거 완전 비교 체험 극과 극이겠는데요 ? ㅋㅋ

    아무쪼록, <사양> 꼭 돌려받으시길 바랄게요 ㅋ
    <사양>이 아니라면 <삼양>이라도..................



    (_ _;) 에잇....

    • 그린비 2010/03/11 19:38

      오오- 홍반장님 책장도 기대할게요!! 그걸로 포스팅해도 되겠는걸요.ㅎㅎ
      사양하지 마시고 꼭 올려주시길~ㅋㅋ

writ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