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우리 사회 안에도 일상적으로 '폭력의 예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소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그들이다. 탈레반에 납치된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아무런 죄도 없이, 단지 동남아 외국인의 신분으로 여기 이 땅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법체류자로 분류된다. 대한민국의 법에 따르면, 그들은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 그만큼 그들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아니,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경계는 이미 없다. 정부 또한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강력한 단속추방을 예고하는 것은 실질적인 실행 자체가 목표라기보다 그걸 빌미로 더 노골적으로 착취하겠다는 비열한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무능하거나 혹은 비열하거나 - 이것이 지금 우리 정부가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다."

2007년 8월 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고미숙 선생의 글입니다. (원문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고미숙 선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납치 사건을 통해서 '폭력의 예감'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가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폭력의 예감'에 노출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심결에 펼쳐 든 아침 신문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납치 사건이 발생한 뒤로 늘 피랍자의 생사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들이 살아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또, 두 번에 걸친 안타까운 소식에 절망의 한숨을 쏟아내며 비통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랍자들이 24시간 내내 느끼고 있을 '폭력의 예감' - 극단적으로는 '죽음의 예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폭력의 예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막혀 버렸습니다. "폭력에 직접 노출되는 경우보다 '폭력의 예감' 속에서 사는 것이 더 참혹한 경우가 많다"라고 한 고미숙 선생의 글이 계속해서 가슴을 울렸습니다.

게다가 '이주노동자'라니... 저는 먹먹함을 넘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사건 이야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 극단으로 내몰린 인간 존엄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먹먹함을 안겨주었다면,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일상적으로 '폭력의 예감'에 노출된 채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 제 '이웃'의 이야기는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부끄러움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 '이웃'의 이야기라고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미숙 선생의 글을 보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소수성의 정치학』이라는 책이 생각 났습니다. 이 책의 ISSUE - 다섯번째 꼭지에 이주노동자의 이동 통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책은 이주노동자를 통제하는 정부 정책의 핵심은 '이동성'을 제한하는 데 있다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이주노동자를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걸까. 먼저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의 이동통제는 저임금 강제노동을 가능케 한다. <표 1>에 나왔던 저임금은 이동이 통제된 이들의 평균 급여다. 내국인, 즉 한국인과 비교해봤을 때 턱없는 급여이다. 게다가 사업주가 불법적으로 행하는 추가노동을 포함하면 실질급여는 훨씬 더 떨어진다. 그 턱없이 낮은 급여를 감내하는 이유는,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신을 선택한 기업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들어온 후에도 그 사업체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면 그런 임금조건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하지만 제도적/비제도적으로 금지된 이동은 이주노동자를 열악한 조건에 동의하게 만든다. 정부와 기업이 노동자의 이동을 통제해서 시장임금보다 낮게 임금을 조작하는 것이다.
- 『소수성의 정치학』, <이주노동자와 이동>, 130페이지, 조원광

* <표 1>에는 38.5%의 이주노동자가 64~70만 원 사이의 임금을, 88.5%의 이주노동자가 100만 원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말고도 다음과 같은 측면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동의 통제는 통치자들에게 통치상의 이득을 제공한다.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정체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한국인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부여받아야 하고, 이주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은 애국심을 가지고 한국의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국가가 제시한 삶을 받아들이는 성격을 가지고, 외국인 노동자는 사업주와 정부의 말에 반항하지 않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참고 버티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정부로서는 국민은 국민으로서 살고 외국인 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다.
- 『소수성의 정치학』, <이주노동자와 이동>, 132페이지, 조원광
저는 바로 이 지점이 이주노동자들을 일상적인 '폭력의 예감'에 노출시키는 제일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끝없이 사회의 소수자로 내몰리게 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구별되어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통제를 벗어난 이주노동자를 사회의 잠재적인 '위협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미숙련 저임금의 말 잘 듣는 노동자'였다. 이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이동하기로 결심한 이주노동자는 이번에는 정부의 잔혹한 정책에 노출되어 '고숙련 저임금의 때려도 되는 노동자'가 될 위기에 처했다. 법 밖에 있지만, 배제되거나 추방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을 근거로 체제에 포함되는 존재, 방치하면서 관리되는 존재, 아감멘이라면 이들을 예외상태에 처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 불렀을 것이다.
- 『소수성의 정치학』, <이주노동자와 이동>, 137페이지, 조원광
소수자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합니다. 다수자, 그것도 권력을 손에 쥔 다수자의 필요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소수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그 낙인이 대부분의 소수자를 '폭력의 예감'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저 같은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아닐까요?
한 이주노동자의 인터뷰가 가슴을 때립니다.

"나는 한국 노동자니까.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국적은 없어도 나는 한국 노동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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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기획팀
이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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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성의 정치학』- 부커진 R No.1
편집인 : 고병원, 편집위원 : 고미숙, 신지영, 이진경, 정정훈, 조원광, 현민, 황희선 / 도서출판 그린비 / 인문, 사회과학
출간일 : 2007-04-30 | ISBN(13) : 9788976829801
반양장본 | 316쪽 | 250*17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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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8 09:57 2007/08/0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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