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런저런 편견들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 편견들이 예상 외로 좋은 결과를 낳을 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편견’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여자란 자고로~”)이었습니다. 아주 오래되고 끈질긴 편견이죠. 최근엔 이주 노동자, 더 정확히 말하면 비-백인-외국인-노동자에게 여러 편견들이 달라붙고 있는 듯합니다. 좀 더 일반적인 형태인 배타적 애국주의도 여전한 것 같고요. 유럽의 경우엔 유대인 증오라는 오래된 편견이 있죠. 아시아권에 대한 편견도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것 같고요. 그 외에 아직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를테면 동물 같은)에 대한 편견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편견들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데는 다들 동의할 겁니다. 그런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자 힘 빠지는 일입니다. 이른바 교육을 통해 그런 편견들이 아무 근거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대표적으로 저는) 그것들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 차는 있겠지만 말이죠.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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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매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뚜렷한 목표를 지니고 있지만, 논의를 전개하는 동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문제를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좋은 책입니다(‘생각하게 해준다’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쓴 건, 이 책이 그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게는 해주는 건 분명하지만 해결책까지 제시해 주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가 이런 ‘편견’이 지닌 힘에 관한 논의입니다.

행동의 한 방식, 노예의 예속적 실존 안에 물질적·사회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삶의 한 방식인 상상은 우리에게 태양을 2백 걸음 가량 떨어져 있는 것으로 표상해 준다. 그런데 이성이 태양은 수평선 위에서 빛나는 커다란 원형의 물체가 아니라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가 속해 있는 천체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별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면서 우리는 이러한 지각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114쪽. 강조는 마슈레가 한 겁니다)

마슈레는 스피노자가 『윤리학』(에티카)에서 전개한 ‘상상’에 관한 논의를 끌어옵니다. (편집후기에서 활용한 부분처럼) 이곳도 사례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 요인들을 알지 못한다면, 예컨대 빛의 속도, 빛이 지구에서 출발해 태양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태양을 올려다보고 단번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약 15,000km 정도가 되겠군. 딱 보니 알겠네!”라고 외칠 수 없을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지각’을 사용해, 쉽게 말하면 대충 눈으로 짐작해 “여기서 저기까지 한 2백 걸음 되려나?”라고 말할 겁니다(근데 왜 스피노자는 하필 “2백 걸음”이라고 했을까요……?). 이처럼 우리의 지각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전체를 스피노자(와 마슈레)는 ‘상상’이라고 부릅니다. “노예의 예속적 실존 안에 물질적·사회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삶의 한 방식”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물질적·사회적’으로 상상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의 실존은 노예적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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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생 폴 요양원이 보이는 밀밭과 추수꾼> _ "저기 저 태양까지 한 이백 걸음 되려나?"

이처럼 우리가 상상에 종속되는 이유는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 더 나아가 우리가 “모든 것을 자아와 관련시”(115쪽)키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사례를 통해 말하자면, 빛의 속도와 지구-태양의 거리 등등을 모른 채 나(자아)의 관점에서 태양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진짜 거리를 알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나(자아)의 관점’을 마슈레는 ‘상상의 관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원인을 인식’해 상상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겠죠.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면 사물을 ‘나(자아)의 관점’에서 보는 태도를 탈피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이성을 활용해 태양이 우리에게서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드디어’ 알게 되었다고 해서 뭔가가 획기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마슈레의 설명을 좀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실재를 적합하게 인식할 때에도, 우리가 필연성의 합리적 관점에서 태양은 우리가 자생적으로 상상하듯이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때에도, 우리는 태양이 처음에 상상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나타났던 대로 계속 볼 수밖에 없다. …… 따라서 이미지는 그것이 목표로 삼는 대상과 관련해 거짓이다. 하지만 이는 그것인 [합리적으로] 논박하기만 하면 충분히 그 외양을 몰아낼 수 있는 순전히 가상적인 표상, 대상 없는 관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관념, 참된 관념이 아니라면 적어도 진짜 관념이다.(같은 책, 116~117쪽. 이번에도 강조는 마슈레가 한 겁니다)

‘적합한’, ‘필연성’, ‘합리적 관점’……. 좋은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태양이 지구에서 약 15,000km 떨어져 있음을 안다고 해도 저는 태양을 제가 지각하는 대로, “처음에 상상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나타났던 대로”, 즉 여기서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게 문제입니다! 태양이 지구에서 2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는 관념은 “거짓 관념”입니다. 그런데 이 관념은 힘을 갖고 있습니다. “틀렸어!”라고 일갈한다고 해소되는 게 아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슈레(와 스피노자)는 이 관념이 “적어도 진짜 관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양을 이처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딱 잘라 말하면 우리 눈이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신체의 배치 상태”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태양에 대한 정확한 표상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117쪽) 태양이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왜 그런지를 아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양을 지금 우리가 보는 방식과는 다르게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을 안다고 해서 상상을 ‘제거’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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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거짓 거울> _ 편견을 만드는 우리의 눈.

문제가 되는 건, ‘상상’이 물리적‧신체적 차원에서만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첫 인용문에서 마슈레가 ‘상상’을 “노예의 예속적 실존 안에 물질적·사회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삶의 한 방식”이라고 말한 걸 떠올려 보면, 상상이 ‘사회적’ 차원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상상에 의지해, 아니 상상에 종속된 채로 삶을 살아가고 판단을 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삶을 살고 판단을 하고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타자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에, ‘상상’은 정치적 혹은 윤리적 결과를 낳습니다. 첫 문단에서 한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는 ‘편견’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마슈레(와 스피노자)가 ‘상상’이라고 부른 것이 제가 말한 ‘편견’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이해했습니다. 가장 친숙한 예로 가족 내 여성의 지위 문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대다수 여성이 아직도 남성에 비해 불평등한 지위에 머물러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남녀평등이 긴급하고도 긴급한 과제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 안에서 실제로 제가 얼마나 남녀평등주의자로 행동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니, 행동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때때로 저도 ‘모르게’ 어머니나 여동생을 보면서 ‘여자니까 당연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슈레에 따르는 이는 ‘자아의 관점에서 여성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는’ 태도입니다. 부자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가부장의 권위를 거부하면서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가부장적 시각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이주노동자 문제, 애국주의 문제, 인종주의 문제, 자연(동물)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그(것)들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더 나아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특별히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면) 안다고 해서 그런 ‘상상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데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따라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원인을 인식’한다고 모든 게 술술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기 위해선 ‘사실들’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견해가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원인을 알려 준다고 해서, 세계의 비참을 보여 준다고 해서, 사람들을 계몽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신체의 배치 상태’가 물질적·사회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어떤 간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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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편견을 깬다는 것, 그것은 신체의 배치 상태를 바꾼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제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원인’을 모른다는 것, 둘째는 원인을 안다고 해도 ‘신체의 불완전한 배치 상태’ 때문에 편견(상상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 그렇다면 먼저 ‘여성의 예속’이 남성지배의 결과라는 것, 남성지배가 어떤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으며, 그게 사실은 아무 근거도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신체의 배치 상태’를 바꿔 나가는 운동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할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마슈레에게 ‘상상’이란 “물질적‧사회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물체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것이 관건일 때, 신체의 배치 상태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신체 기관보다는 사회적 차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우리 신체의 배치 상태를 바꾼다는 것은, 원인을 알려고 하는 반성적 인식과 불완전한, 더 나아가 기형적인 사회구조를 변혁하려는 실천적 운동이 병행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겁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꼴이 되어 부끄럽습니다. 뭐랄까, 이 부분은 『헤겔 또는 스피노자』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부분인 동시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계속 질문만 던지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 책은 제가 그 질문을 던지게 만든 책이고, 이 글을 통해 그 질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슈레는 제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이 책 마지막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비록 이것이 해결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의미가 있는 것이다.”(340쪽). 이 책 덕분에 저 자신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고, 또한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 질문을, 그리고 마슈레의 이 마지막 말을 가슴에 품고 다닐 생각입니다. 머릿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편견 없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 말입니다.

- 편집부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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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2 10:40 2010/04/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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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진한양 2010/04/22 11:42

    편견이란 참 무섭죠. 그것만 없다면 세상은 밝아질텐데 말이죠.
    어제 '아랫마을'에서 주최하는 잔치에 다녀왔는데요.
    실천단, 빅이슈, 노들야학등 많은 곳에서 함께 참여를 했었습니다.
    가서 홀리스분들, 장애우분들과 얘기도 나누고 했는데요.
    그러지 않으리라 그간 노력했다 생각했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편견의 잔재가 남았더군요.
    어제를 계기로 해서 남은 편견이 조금이나마 없어진 듯 하여 다행이네요...

    • 그린비 2010/04/22 13:30

      편견은 (윗글에서처럼) 개인이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실천과 운동이 함께해야겠죠.
      순진한양님 덕분에 알았습니다. 아랫마을이요. 이렇게 눈과 귀가 어두웠네요. 감사합니다.^^

  2. 캐러멜대장 2010/04/23 12:56

    아핫,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사람은, 해탈한 사람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어쨌든, 문제되는 건, 함께 어울려 잘사는 걸 망치는 편견,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고, 그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편견일겁니다. 이런 편견을 효과적으로 깨는 방법 중 하나로, 편견이 들겠금 하는 그 '대상'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있으면 존경 혹은 존중의 마음이 들어서, 예전에 갖고 있던 편견이 좍좍- 금이 가더라고요.

    • 그린비 2010/04/23 13:56

      와앗, "편견이 들게끔 하는 그 대상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이라니, 편견을 깨는 방법 중 가장 멋진 방법인 것 같습니다!!
      좍좍 금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좋은 말씀 감사해요.^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