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는 지금 생태혁명 중!
-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혁명』과 ‘코차밤바 기후변화 민중회의’

허약체질인 저는(누구도 제 외관을 보고 그럴 거라고 상상하지 않습니다만)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이 오면 축 쳐져서 지냅니다. 그렇다고 겨울을 잘 이겨 내는 것도 아니어서, 겨울이 오면 날카로운 바람에 벌벌 떨면서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취약한 몸을 이끌고 사는지라 기온에도 민감한 편인데요. 최근 몇 년간 날씨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정말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평균기온이 높다’는 표현으로는 한참 부족할 정도로 희한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죠. 유난히 심했던 작년 장마, 올 초의 폭설 대란, 더웠다 추웠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최근의 날씨 등등. 그리고 이제는 마침내 여름이 찾아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편함을 느끼다 보면 문득 다른 문제까지 생각이 미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농산물 생산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걸까? 우리보다 더 춥거나 더운 지역에선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예전보다 조금 더 불편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점차 파국적인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가 궁금해집니다.

환경, 좀더 한정해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는 우리 시대의 핵심 의제 중 하나입니다. 자칫하면 어느 한 집단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단번에 몰락할 수도 있으니,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이런 위협에 직면해 ‘국제사회’는 이제껏 이런저런 노력 —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 교토의정서, 탄소배출권, 그 유명한 1992년의 리우환경회의 등 — 을 기울여 왔(다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작년 말에는 코펜하겐에서 ‘국제연합 기후변화 회의’(United Nations Climate Change Conference)가 개최되기도 했죠.

그런데 문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는 겁니다. 작년 ‘코펜하겐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른바 ‘발전 국가들’과 (UN을 필두로 한) ‘국제적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 시위대를 때려잡는 일을 제외하면 — 딱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 한 기사에서는 “지난 몇 년간 UN 주도하에 제시되었던 정부 대표 간의 무책임한 협상 방식과 낮은 수준의 합의문, 그리고 느슨하고 긴장감 없는 각국의 감축 행동에 대해 느꼈던 실망감 …… 실제 코펜하겐에서 느꼈던 사상 최대의 기대치는 회의가 끝나고 분노에서 절망으로 바뀌어갔고, 이제는 새로운 체제와 해결방식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켰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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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밖에서 시위대를 멋지게 진압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 동북아의 한 작은 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동안 ‘이산화탄소 배출’이 주원인인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국가 혹은 국제단체가) 내놓은 대책은 주로 ‘시장에 맡기기’였던 것 같습니다. 규제를 하고 배출권을 구매하도록 강제하거나, 아니면 환경도 시장경제에 통합시키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더욱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물론 지구온난화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으며, ‘종말론적 어조’를 띤 경고자들이 과학적인 해석이 아닌 정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제기 자체가 별 의미 없다는 거죠. 아무튼, 지금까지 각국의 정부나 국제기구가 내놓은 해결책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해결책조차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과 자유로운 시장이 아니라 사회관계의 변혁을!
이성을 바탕으로 현실을 직시하자면 우리는 “지구가 중대한 생태붕괴의 위험에 처해 있지 않은가?”, “문명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 것은 아닌가?”, “생물종으로서의 인류의 존속이 위협받고 있지 않은가?” 등의 종말론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질문이 불가피하고 합리적이기까지 한 이유는 현재의 상태가 지속되면 불과 한 세기 이내에 지구와 인간이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가 여러 과학적 연구결과들로부터 계속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혁명』The Ecological Revolution, 박종일 옮김, 인간사랑, 2010, 19쪽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회적 접근방식이야말로 단순히 산업에만 의지하는 방식을 배격하고 진정한 생태혁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근본적인 사회관계는 무시한 채 기술적‧산업적 또는 “자유시장”의 수단만을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오늘날 생태문제의 핵심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자본주의라는 문명체계이다.
― 같은 책,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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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 사진)는 『생태혁명』 첫 문단에서 단호하게 “종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의 상황에서 인간과 동식물, 지구의 “종말”을 근심하는 건 불가피할 뿐 아니라 “합리적”이기까지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현재의 환경파괴 수준이 심각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의 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현재 생태계가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페이지들이 아닙니다. 무엇이 이런 파국적인 상황을 낳았는지,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부분에 우선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월간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의 공동편집자인 포스터는 맑스주의자로서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사회주의의 전망을 제시하는 다수의 글과 저서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자인 주제에 ‘진화론’ 문제에 관해서도 한 마디 거들 정도로(국내에도 그가 공저한 『다윈주의와 지적 설계론』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바로 생태 문제입니다. 그는 생태(환경) 문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합니다. “‘환경 문제’라는 것은 결국 정치경제의 문제이다.”(78쪽)
‘환경 문제는 정치경제의 문제’라는 것은 환경을 자본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본은 ‘자기 증식하는 가치’입니다. 끝없는 증식욕, 즉 이윤획득 욕구만이 자본을 운동시키는 동력입니다. 이윤을 낳지 못하는 것들은 — 그게 인간이든 자연이든 —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못합니다(일례로 포스터는 유효한 대안인 태양에너지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용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오로지 축적하라”를 지상명령으로 삼는 자본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판매로 이를 충족시키려 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뿐 아니라 자연까지 무자비하게 약탈합니다(더 최악인 것은, 1세계 국가의 자본이 주로 저지른 그런 약탈에 대한 자연의 복수로 인해 3세계 국가들이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놔둔 채 자본의 파괴적인 운동을 제한하는 방법, 그런 건 없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해법을 제시하거나 약간의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개선이 될 수도 있지만, 자본축적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는 경고가 울리면 곧바로 모든 게 원위치됩니다. 따라서 생산방식, 더 나아가 생산관계, 더 나아가 사회관계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포스터에게 ‘생태혁명’이란 ‘사회관계의 변혁’과 함께 운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끝장내려는 운동을 회피한 생태운동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태혁명으로 가는 한 걸음: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회의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사회관계를 변혁하는 운동,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상상하고 행동에 옮기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 사건이 얼마 전에 개최되었습니다. 4월 19~22일에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열린 ‘세계 기후변화 민중회의’입니다. 정식 명칭은 ‘기후변화와 어머니 지구의 권리를 위한 세계 민중회의’(World People's Conference on Climate Change and the Rights of Mother Earth)이고요. 이 회의는 사회주의자이자 볼리비아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를 주축으로, ‘코펜하겐 회의’의 실패를 극복하고자 개최되었습니다(포스터도 『생태혁명』에서 모랄레스를 언급합니다. 그에 소개에 따르면 모랄레스는 “세계에서 가장 열렬한 환경주의자이자 원주민 권리 옹호자”[377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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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 “나의 당선은 미국에게 악몽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 그의 대통령 당선은 볼리비아(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좌파적·탈식민적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현상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1세계 국가들, 그들의 자본들, 그들이 연합해 만든 단체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당초 예상했던 15,000명의 두 배가 넘는 35,151명이 참석했고, 참가자들 면면을 보면 양복을 빼입은 신사들이 아니라 기층 사회운동가들, 가난한 농민들,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원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4일간 열띤 토론을 벌였고, 이를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한 사항들이 「코차밤바 합의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 회의에 관한 기사 두 편, 그리고 ‘코차밤바 합의문’을 링크합니다. 이 회의의 목적, 당시의 분위기, 성과 및 한계를 알려 주는 이 글들을 읽어 보는 것이 저의 어설픈 설명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낫겠죠.

장호종, 「급진적 에너지를 충전한 기후정의 운동」
손형진, 「볼리비아에서 기후변화의 새로운 바람이」
「코차밤바 합의문」

‘세계 기후변화 민중회의’의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자본주의’하에서의 환경을 문제 삼았다는 점일 겁니다. 『생태혁명』에서 포스터가 지적한 것처럼 말이죠. 실제로 이 회의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구호가 “기후가 아니라 체제를 바꾸자”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실의 물질적 토대와의 관련 속에서 환경 문제를 논의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비판할 점들이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 회의 역시 ‘국가’가 주도한 것 아니냐고 꼬집을 수도 있고, 너무 극단적이라고 비판하거나 반대로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겁니다(고백하면 저는 이런 문제에 너무 무지해 아직 아무런 판단도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세계 기후변화 민중회의’가 환경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또 구체적인 대안들을 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안이 문제가 있건 없건 말이죠. 이처럼 이 회의는 환경 문제를 사회체제와 관련지어 고민하게 해주는 장(場), 이론적일 뿐 아니라 실천적이기도 한 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한 걸음, 각자의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토론하고 현실에서 실행에 옮기려 한 이 움직임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볼리비아(및 기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외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이 운동에 주목하고, 힘을 실어 주고, 지금까지 고려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현재 주변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혁명하는 일이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생태적·사회적 혁명에 투영되지 않는다면 필수불가결한 전 지구적 생태혁명이 성공할 전망은 거의 없다. 지구가 지고 있는 과중한 부담의 근원지인 체제의 중심부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최후의 생태파괴를 피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이 생긴다.”(378쪽) 마찬가지로 중심부도 주변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듯 보이는 우리도,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 속에서 현실을 지양해 나가는 우리만의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일단 저부터 그래야겠죠……).

- 편집부 김재훈

P.S.
여담이지만, 최근 출간된 월터 미뇰로의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에서도 에보 모랄레스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는 유럽 제국주의·식민주의가 어떻게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을 ‘발명’했는지를 밝히는 책입니다. 「스페인어판 후기」에서 미뇰로는 모랄레스의 대통령 당선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데요. 볼리비아 민중이 ‘탈식민적 선택’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좌파로의 전환’이 아니라 — 을 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그의 당선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에보 모랄레스 정부는 행정·경제·교육 분야에서 탈식민성 기획을 확실하고 공개적으로 추진”(272쪽)하고 있습니다. 이는 근대 유럽에서 형성되어 비유럽 지역에 이식된 이데올로기들,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심지어는 맑스주의까지도 상대화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탈식민적 선택은 반대로 “혁명의 주도권이 오로지 맑스주의 좌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좌파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유럽 중심적 좌파가 스스로를 지역화하고 이를 통해 재기할 수 있는 기회”(278쪽)도 마련해 준다는 것이 미뇰로의 생각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유럽 중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좌파’라는 개념으로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죠. 아무튼 ‘좌파로의 전환’이건 ‘탈식민적 선택’이건 현재 볼리비아에서 다양한 정치적 실험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존 벨라미 포스터(좌파·생태로의 전환)와 월터 미뇰로(탈식민적 선택)의 책은, 이 실험들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에 관해 상이한(그렇지만 양자 모두 의미 있는) 관점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알라딘 링크
생태혁명 - 10점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박종일 옮김/인간사

2010/05/22 14:35 2010/05/2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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