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슬라브주의 사상의 사도들 (1) ― 이반 키레예프스키

최진석 (수유너머 N)

1836년, 문제작 「철학 서한」에서 차아다예프가 세계사 속에서 러시아의 운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러시아의 길은 러시아에 있노라고 응답했던 사람들이 있다.(관련글 보기) 서유럽의 당대 문명이야말로 인류 보편의 길이며, 하루라도 더 빨리 그 길에 합류하는 게 러시아가 세계사에 기여하고 소속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주장하던 서구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적인 것의 독자성과 고유성에 기대를 걸었던 이 사람들을 지성사적으로 슬라브주의자(slavophile)라고 부른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래 100여 년, 다분히 유럽화된 상류 귀족계급 출신이던 슬라브주의자들은 적어도 미래에 있어서만큼은 과거의 공동체로 되돌아가길 희원했다.

상대적으로 서구주의자들은 러시아가 무엇인지를 묻는 데 인색했다. 다급하게 유럽의 길을 쫓아야 했던 그들에게 러시아의 정체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반면 슬라브주의자들은 “러시아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존재 가치, 역사 속의 위상, 러시아적인 것의 본질에 관해 질문을 던졌고, 그것이 풀리지 않는 한 여하한의 서구적인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를 집요하게 탐문했다는 점에서, 슬라브주의자들이야말로 「철학 서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으며, 차아다예프의 진정한 후예들이었다. 만일 러시아 근대 철학의 기원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영예는 마땅히 슬라브주의자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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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주의자, 이반 키레예프스키
서구와 러시아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한 의식은 슬라브주의 사상의 본령이 역사 철학을 향하도록 이끌었다. 러시아와 유럽의 차이는 그저 서로 다르다는 사실 판단이 아니라, 역사적인 필연성의 문제였다. 러시아가 유럽이 아니라 다름 아닌 러시아인 까닭은 조물주의 창조 의지에 속한 것이었다. 니콜라이 베르댜예프(Nikolai Berdyaev)에 의하면, 이와 같은 역사적 자의식은 러시아 민족의 독특성과 소명감, 종교적인 계시의 감정과도 겹쳐지는데, 때문에 슬라브주의자들의 공통된 정서는 역사 철학이라는 ‘현대의 학문’을 빙자한 메시아주의에 가까웠다. 서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헤겔의 세례를 받았으며, 헤겔조차도 슬라브 민족의 영광을 입증해 줄 예언자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러시아의 ‘헤겔 우파’라고도 할 만한 이들을 고전적 슬라브주의, 친슬라브주의, 혹은 슬라브 애호주의라고 명명하는데, 이반 키레예프스키(Ivan Kireevsky, 1806~1856), 알렉세이 호먀코프(Aleksei Khomyakov, 1804~1860), 콘스탄틴 악사코프(Konstantin Aksakov, 1817~1860) 등이 그 대표자들이다. 19세기 후반의 ‘범슬라브주의’, 즉 정치적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이들을 구별해 주는 것은, 그들이 활동하던 19세기 전반이 벨린스키 등의 서구주의자들에게나 마찬가지로 ‘철학의 시대’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사상도 이상주의(idealism, 관념론)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제국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가 그런 것처럼 슬라브주의는 서구주의와 쌍생아였고, 한 몸을 나누되 단지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비운의 형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슬라브주의를 감식하는 일은 서구주의의 운명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슬라브주의의 중심 이슈는 포괄적인 역사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러시아와 서유럽의 관계에 있었다. 특히 그것은 1839년 키레예프스키의 미발표 논문 「호먀코프에게 보내는 답변」에서 정식화되었고, 다시 1852년에 나온 장문의 에세이 「유럽 문명의 성격과 러시아 문명과의 관계」에서 발전된 형태로 제출된다. 그에 따르면, 유럽 문명은 고대 로마의 유산, 기독교,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야만성(게르만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복합체라 할 수 있다. 러시아가 비잔틴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로마의 유산을 나눠 받지 못한 것은 서구와 러시아를 갈라놓는 유감스런 사건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분리’는 러시아를 위해서는 새옹지마와 같은 일이었다. 당장의 문명 발전의 기회는 놓쳤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유독한 요소와 접촉을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문명은 합리주의에 기초해 있었다. 로마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오직 자기 자신에만 의지하는 순수하고 적나라한 이성주의’의 사회였던 것이다. 합리성과 이성만을 앞세움으로써 로마는 법이라는 문명적 형식을 발달시켰지만, 사회는 법적·제도적 관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법을 넘어서는 생생한 인간적 유대라는 게 존재하며, 공동체의 유대감이란 법 이전의 정서적인 연대를 더 우선시한다. 로마의 사법적 합리주의는 사회를 법적 강제를 통해 묶어 놓았지만, 실제로는 공동체가 가져야만 할 유기적 통합력을 산산이 부숴 버리고 말았다. 로마 사회는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들의 외면적 결합체에 불과하며, 공통의 사업적 이익 외에는 어떠한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하지 못했다. 국가와 보편성의 영역은 사적이고 적대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었고, 민중들은 국가의 울타리 안에 묶여 있되 국가와 내적이고 친밀한 결속을 이루지는 못한 상태다. 이러한 이교적(異敎的) 합리주의를 계승한 현대 유럽이 서로 간에 반목을 거듭한 채, 구교와 신교, 귀족과 시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분열되어 혼란과 갈등에 빠져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지 모른다.

유럽이 직면한 분열은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 극한의 합리주의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그 징후가 프랑스 혁명을 낳은 계몽주의, 포이어바흐의 인간 신격화, 막스 슈티르너의 이기적 자아 중심주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유럽 정신의 진화는 사회의 원자화를 가속화시켰고, 고립된 개인들을 엮어 줄 유일한 원리는 부르주아 사회의 ‘계약’뿐이다. 그러나 정신의 파탄을 저지해야 할 계약 원리는 물질 만능주의로 비화함으로써 영혼의 파멸을 초래하고 만다. 그것이 서구의 현재요, 희망 없는 미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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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고로드(Novgorod) _ 9C경 러시아의 첫 수도였으며 러시아 정교의 중심지로서 중세와 근대의 러시아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다.

반면 러시아는 이런 치명적인 역사를 우회하는 행운을 누렸다. 로마적 합리주의에 노출되지 않은 러시아인의 대부분은 농민들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촌락에서 전통적 형태의 정서적 유대와 통합력을 잃지 않은 채 살아왔다. 러시아 농민들은 988년 기독교 수용 이전의 공동체 형태를 보존하고 있고, 여기에 기독교적 형제애가 가미된 조화로운 사회 조직을 위한 터전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회의 ‘배운 사람들’, 유럽화된 인텔리겐치아가 러시아의 미래를 유럽에서 찾을 때, 러시아의 농민들, 민중들은 자기들의 삶에서 건강한 미래의 씨앗을 품고 있던 것이다. 유럽과는 무관히, ‘우리 내부에’ 존속하는 이상적 공동체의 모델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운 문명사적 과제란 바로 그 ‘지나간 미래’를 올바로 인식하고 되살리는 데 있을 터이다. 서구주의자들의 ‘악질적인’ 주장처럼, 과거는 내던지고 돌아서야 할 치부가 아니라 의당 되돌아가야 할 지향점이었다. 서구와 러시아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갈 곳 없는’ 그들에 비해, 러시아인들은 돌아갈 수 있는 과거가 지금-여기에 현재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이성의 발달로 인해, 그것으로부터 파생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서구인들은 이제 이성의 발달 자체 때문에 자신들이 가졌던 최후의 신념, 즉 이성 만능주의라는 신념마저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구인들은 이제부터 반(半)동물적인 태도로 관능과 상업적 이해타산에만 빠지거나, 혹은 추상적 이성이 극대화되기 이전에 유효했던 과거의 신념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키레예프스키에게 이성 이전의 신념, 그것은 본원적인 기독교의 이미지였고, 또한 바로 정교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왜 로마의 초대 기독교 신앙이 아닌가?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첫번째 로마의 신앙은 두번째 로마, 즉 비잔틴으로 ‘정당하게’ 이전했고, 그것은 비잔틴의 멸망(1453) 이후 러시아로 ‘정당히’ 이전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순수했던 신앙은 지금 여기 러시아 정교 속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서구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밟지 못한, 고대적이고 중세적인 질곡 속에 정체되어 있다는 명제는, 이 지점에서 ‘순수성의 보존’이란 명제로 탈바꿈한다. 유럽화하지 못한, 문명화하지 못한 러시아는 재앙이자 저주가 아니라, 은혜이자 은총의 결과라는 명제가 성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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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_ "유럽화하지 못한, 문명화하지 못한 러시아는 재앙이자 저주가 아니라, 은혜이자 은총의 결과"

앞으로 살펴볼 다른 슬라브주의자들과 키레예프스키의 특이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그에게 합리주의의 해독 이전에 존재하던 순수한 신념(신앙), 공동체적 결속과 유대 등은 러시아 민중 및 정교 교회에 보존된 것이었다. 그런데 민중과 정교는 사실 한 가지로 묶을 수 없는 범주였다. 민중은 사회의 피지배층이자, 표트르의 개혁 100년이 경과하는 동안에도 극히 미미한 정도로만 문명을 경험한 계급이었다. 반면, 교회는 국가와 밀착하여 전제정과 귀족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었다. 민중과 교회는 정반대의 대립적 계급이었으며, 진정 민중의 이익을 위하고자 한다면 교회가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던 농노제의 폐지에도 동의할 수 있어야 했다. 구귀족 출신이던 키레예프스키가 지지하기엔 너무나 ‘급진적인’ 선택지였다.

러시아와 유럽의 희망으로 러시아 민중을 지목하였음에도, 키레예프스키는 자신의 민중에게 거리를 두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민중이 보인 공동체에 대한 애착은 다소간 무의식적이고 관습적인 문제였기에 무작정 수용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재탄생은 민중의 몽매주의를 전면화하는 게 아니라, (마치 헤겔 변증법이 정-반-합으로 지양되듯) 계명된 지식 계급(당시엔 귀족)이 기독교의 원리를 수용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구원의 대상도 주체도 상층 계급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었고, 방법론적으로는 표트르의 개혁이 그랬듯 ‘서구주의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2010/05/28 10:49 2010/05/2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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