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자화상을 그린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조효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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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회고록(回顧錄)은 읽을 만한 가치가 없는, 기껏해야 ‘장식용’으로나 제작·배포되는 책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사회의 명사(名師)라는 사람들이 때가 되면 마치 통과제의처럼 만드는 책이 회고록인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말하자면 하나의 문화적 관행처럼 통용되는 것이 작금의 한국 사회인 것을. 오늘날 ‘회고록’이라는 명칭과 장르는 부당하게도 적잖이 오염된 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하려는 책은 이처럼 굴욕스러운 회고록의 위상을 단번에 역전시키고 남을 만큼 위대하고 놀라운 저작이다. 나아가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쓰기(historiography)의 진수(眞髓)를 보여주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한 개인의 제한적이고 다소간 허영이 섞인 주관에 의해 흐려진 회고(reminiscence)가 아니라, 빼어난 장인(Meister)의 솜씨로 그가 살았던 시대 전체의 분위기(atmosphere)를 활자와 행간 속에 오롯이 옮겨 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 성실한 장인,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전 세계를 고향으로 삼아 방랑했던 시인의 이름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 사진)이다.

츠바이크는 1881년 빈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약관(弱冠)의 나이로 일약 문학적 명사로 등극한 천재적 작가․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이 천재가 만난 세상은 불운과 참혹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어야 했고,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끝없는 망명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국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먼 이국 땅 브라질에서 제2차 대전의 전세(戰勢)를 관망하던 중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지나가는 길에 말하자면, 브라질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츠바이크에게 크나큰 경의를 표했다). 오늘 소개할 불세출의 회고록 『어제의 세계』(Die Welt von Gestern, 1941)는, 그가 세상을 버리기 전, ‘다음 세대에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전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사력을 다해 쓴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사회 지도층의 서재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대개의 회고록과는 달리 츠바이크가 되살려낸 ‘어제의 세계’는 언젠가 그가 했던 말마따나 마치 ‘시대가 자화상을 그린’ 것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가령 우리는 이 책에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기 전, 그러니까 아직 지옥의 불길에 휩싸이기 전의 유럽이 어떠했는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인습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또 그 우스꽝스러움 못지않게 진지하고 엄숙하게 삶과 사회를 경영해 나아갔는가를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츠바이크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세계문학의 판테온에 올라가 있는 위대한 작가, 시인, 예술가 들이 어떻게 삶과 예술을 창조했는지를 깊은 감동과 함께 배우게 된다. 또한 이 천재 시인이 젊은 시절 만난 세계적 인물들의 수효는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그의 인맥은 말 그대로 유럽을 총망라하는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반복하건대 젊어서부터 쌓은 츠바이크의 인맥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만큼 다채롭고 풍요로운 것이어서 우리는 이 젊은 시인의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를 질투와 경탄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츠바이크는 릴케(Rainer Maria Rilke)와 함께 파리의 거리를 산책했고 그곳에서 앙드레 지드(Andre Gide)의 방문을 받았으며, 또 로댕(Auguste Rodin)의 작업 현장을 직접 관찰했는가 하면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로부터는 원고 청탁을 받았던 것이다! 이 이름들만으로도 충분히 놀랍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 책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수많은 세계사적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지냈던 그는 그러나 만년(晩年)에 이르러 쓴 회고록에서도 결코 우쭐거리거나 으스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마치 문학계에 갓 입문한 청년이 가질 법한 성실함을 가지고서, 자신이 만났고 대화했으며 또 성실한 우정과 진지한 사랑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뜨겁게 회상한다. 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었던 한 대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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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19세기 유럽의 지층을 탐사했던 벤야민과 파리의 아케이드를 합성한 이미지. 이곳에서 츠바이크는 무엇을 봤던 것일까?

그가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고요함이 그의 주위에서 자라는 듯했다. 그는 모든 소음, 그리고 자신의 명성—언젠가 그가 아름답게 표현했던 것처럼 ‘하나의 이름 주위에 모여 오는 모든 오해의 총계’—까지도 피했기 때문에, 헛되게 몰려오는 호기심의 큰 파도는 그의 이름만을 침해했지 그의 인격을 침해하지는 못했다. 릴케에게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집이 없고, 사람들이 그를 찾아낼 수 있는 주소도 없고, 주거지도 없고, 상주하는 데도 없고, 관직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세계를 뚫고 지나가는 도상에 있었고, 아무도, 그 자신까지도 그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를 미리 알 수 없었다.(『어제의 세계』, 곽복록 옮김, 지식공작소, 1995, 176쪽)

시인 릴케를 묘사한 훌륭한 산문시처럼 읽히는 이 부분은 이 책에 담겨 있는 수많은 탁월한 회고적 서술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 책은 비단 인물들에 대한 서술뿐 아니라 19세기 말과 세기전환기, 그리고 두 차례의 전쟁을 지나던 시기의 유럽 풍경에 대한 탁월한 묘사들 또한 풍부하게 담고 있다. 가령 우리는 세기말의 유럽인들이 ‘섹스’와 사랑에 관한 문제를 경악할 만한 가식과 질식할 듯한 허영으로 억누르고 외면했거나 그도 아니면 어설프기 그지없는 임시변통만으로 대처하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다시 한 번 지나가는 길에 말하자면, 프로이트의 위대한 저서들은 바로 이 분위기로부터 생성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는 심지어 변태적(abnormal)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엄숙한 도덕주의’와 그로 인해 생겨난 기묘한 성 풍속 세태에 대한 묘사는 이 회고록이  ‘역사쓰기’의 모범이 된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말한다.

세계대전 전의 유럽에서 엄청나게 만연했던 매춘에 대해서는 현재의 세대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대도시의 거리에서 매춘부를 만나는 것은 차도에서 마차를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문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몸을 파는 여자를 발견하는 것보다 그것을 피하는 쪽이 더 어려웠을 만큼 보도는 그녀들로 메워져 있었다. 게다가 또 수없이 많은 ‘닫힌 집들’, 나이트클럽, 카바레, 댄서나 여자 가수가 있는 댄스 홀, 서비스 걸이 있는 바가 있었다. 어떤 값이라도, 어떤 시간이라도 그 당시에는 여자의 매물이 공공연하게 팔리기 위해 내놓아지고 있었다. 여자를 15분간이든, 1시간이든, 하룻밤이든 간에 산다는 것은 사실 남자들에게는 담배 한 갑, 또는 신문 한 부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의 시간과 노력으로 충분했다.(107쪽)

무릇 역사의 본령이 ‘어제의 세계’를 충실하게 서술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위와 같은 빼어난 서술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어제의 세계』야말로 역사쓰기의 전범(典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소개한 부분은 『어제의 세계』가 그린 저 위대한 ‘시대의 자화상’의 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자화상 전체를 보고 싶으신 분께 이 위대한 장인의 가슴 뭉클한 유언을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모든 나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원컨대, 친구 여러분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빕니다. 나는,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5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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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지식공작소
2010/06/25 10:24 2010/06/2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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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동현 2011/12/17 09:31

    혹시 이 글 쓰신 문학평론가 조효원님께 질문 드릴 방법이 있을까요?
    조효원님의 최근 역서 <유아기와 역사>에 대해서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 그린비 2011/12/19 10:00

      강동현님 안녕하세요.
      비밀댓글로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메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2. 비밀방문자 2011/12/19 12:3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그린비 2011/12/19 13:20

      메일 보내드렸습니다. 확인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