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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플로베르 1821년 생 / 기 드 모파상 1850년 생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모파상은 플로베르의 제자였습니다. 모파상은 플로베르의 친구 알프레 르 푸아트뱅 누이의 아들이었지요.(간단하게 친구 누나 아들 정도 되겠군요.) 그런 인맥을 타고 모파상은 매주 일요일마다 플로베르에게 문학수업을 받게 됩니다. 당시 플로베르는 루앙 근처의 크루아세에서 거의 은둔하다시피 지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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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플로베르의 생가가 ‘플로베르 의학사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플로베르의 초상화, 가족 유품, 17~19세기 의학 도구, 실습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아버지가 외과 의사였던 영향이 아닐까?

플로베르는 모파상에게 새로운 시선으로 현실을 관찰하도록 가르쳤고, 나아가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꾸준히 연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플로베르는 이반 투르게네프, 에밀 졸라 등과 친분을 맺고 있었죠. 이후 플로베르는 모파상과 에밀 졸라를 서로 소개시켜주기도 합니다. 에밀 졸라는 1880년에 모파상을 포함한 여섯 명의 젊은 작가들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취재한 내용을 쓴 단편집 『메당의 밤』(Les Soirées de Médan)을 냅니다. 모파상은 여기에 「비곗덩어리」를 실었고, 「비곗덩어리」의 성공은 그가 문학가로 살아가는 데 큰 발판이 되죠.

첫 번째 편지는 『메당의 밤』의 탄생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두 번째 편지의 첫 부분은 플로베르가 그의 미완성 소설 『부바르와 페퀴세』를 쓰면서 모파상에게 자료 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던 내용에 대한 모파상의 답변입니다. 이 편지에는 플로베르도 높게 평가한 「비곗덩어리」의 성공에 대한 환호와 메당그룹에 대한 모파상의 평가가 담겨있습니다.

1880년 1월 5일
친애하는 플로베르 선생님께

요전에 제가 크루아세에 갔었을 때 저희 소설집에 대해 말씀드렸던 일을 잊으실 것 같아서 서둘러 사정을 설명해 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러시아에서, 그 다음에는 프랑스의 『개혁』la réforme지 지상에, 에밀 졸라는 「방앗간의 공격」L'Attaque du moulin이라는 전쟁에 대한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는 브뤼셀에서 별도로 『등짐』Sac au dos이라는 소설을 냈습니다. 끝으로 세아르Henri Céard가, 자신이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러시아의 잡지에 파리포위(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이던 1870년 9월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해 4개월간 압박했던 사건)에 대한 매우 흥미진진하며 굉장히 폭력적인 소설을 실었는데, 『사혈瀉血』La Saignée이라는 제목입니다. 졸라는 이 두 작품을 보고 자신의 것과 합쳐 흥미로운 책을 내자고 했습니다. 그것은 애국적 색채가 옅고, 특별한 울림을 갖춘 책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에니크Léon Hennique, 알렉시스Paul Alexis, 그리고 저에게도 각각 한 작품씩 써서 함께 묶자고 권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이름 덕분에 책이 팔리고, 우리는 한사람마다 100이나 200프랑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는 일에 착수했고, 샤르팡티에Georges Charpentier(에밀 졸라, 플로베르 등의 작품을 출판했던 당시 유명 출판업자)가 원고를 받아갔습니다. 책은 3월 1일경에 세상에 나올 겁니다.

이 책을 쓸 때, 우리에게 반애국주의적인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다른 어떤 의도도 역시 없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애쓴 것은 전쟁에 대해 말하는 올바른 자세를 자신들의 이야기에 부여하는 것과, 더불어 데룰레드(Paul Déroulède; 프랑스의 우익적 정치가. 애국자동맹을 창설)류의 맹목적인 애국주의, 거짓된 열광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붉은 퀼로트와 총을 말하는 때에는 불가결하다고, 오늘까지 생각해 온 것입니다. 장군이라는 자들은 가장 고귀한 감정을 갖추거나, 위대하고 고매한 열정에 들끓는 계산가일 수 없고, 다만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거기다 장식끈이 달린 모자를 쓰고, 별다른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단지 어리석기 때문에 인간을 죽이게 합니다. 군(軍)에 관한 일을 평가할 때의 우리 쪽의 이 ‘양심’이 이 책 전체에 기묘한 모양을 부여해, 누구나가 무의식적으로 열성적이 되는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 우리의 의도적 무관심이 전속력의 공격보다 천배나 부르주아들을 분개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반애국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단순한 사실일 겁니다. 무엇보다 제가 루앙 사람들에 대해 쓴 것은 사실과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모파상이 졸라 등과 함께 묶어낸 책에 실었던 소설이 바로 「비곗덩어리」인데, 루앙에서 디에프로 가는 역마차 안에 합승한 사람들 간에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다].

저의 시집에 관해서는 아직 샤르방티에에게만 알렸을 뿐, 그는 아직 원고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늦음을 저는 크게 염려하고 있는데, 그는 점점 경제적인 곤란에 빠져들고 있습니다.(샤르팡티에는 위스망스에게 지불해야 할 800프랑을 지불하지 않았고, 선금으로 400프랑만을 지불했습니다.)
대신(大臣)은 저를 얼마전 교육공로상 후보로 삼았습니다. 별로 감동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뉴스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아담 부인의 잡지에 시 한편을 보낸 것은 이미 5주 전쯤입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녀에게는 데룰레드 쪽이 취향에 맞겠지요.

친애하는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모파상 올림

두 번째 편지 펼치기


플로베르는 1880년 5월 8일, 두 번째 편지를 받고 며칠이 지난 후 뇌일혈로 세상을 뜹니다. 그의 마지막 문학적인 즐거움은 제자 모파상의 단편 「비곗덩어리」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모파상도 같은 해 신경증을 앓기 시작합니다. 신경증이 심해질 때마다 여행을 떠났고, 1887년 시칠리아에 다녀온 기록이 바로 작가가 사랑한 도시의 시칠리아 편이죠. 『모파상의 시칠리아』에서는 모파상이 온 몸으로 글을 써내려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로베르가 나일 강을 여행하며 온 몸의 감각으로 여행을 하고 글을 썼던 것처럼 말입니다.

플로베르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모파상의 작품들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있다는 옛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요?

2010/07/22 11:08 2010/07/2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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