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많지만, 그 목소리들 속에서 '맑스'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맑스'를 역사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질문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도처에서 맑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자본주의와 거기서 비롯된 온갖 억압들 위에 서 있다. 그런 환경에서 '맑스주의'의 역사 '맑스주의 운동'의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지점에서 '시대'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맑스주의 역사 강의』는 맑스와 엥겔스가 살던 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던 '운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일하고,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파트타임 연구자' 한형식 선생님의 인터뷰를 통해 잊혀진 질문, 어쩌면 '은폐'된 질문일수도 있는 '맑스주의'와 '맑스주의 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맑스주의 역사 강의』저자 한형식 인터뷰 영상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자면?
일단, 책과 관련해서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전문적인 연구자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파트타임 연구자’라고 할 수 있겠다. ‘파트타임 연구자’, ‘파트타임 생활자’이다.

‘맑스주의’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적 영향력, 이론적 깊이, 또 그 영역 내에서의 분파의 다양성과 같은 점에서 맑스주의보다 강력한 자본주의의 적대자는 없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수많은 비판자들이 있었다. 지금 현재도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과거로 돌아가 자본주의가 존재했던 기간 동안 그것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의미 있는 비판을 했던 역사적 자산들을 활용하는 것이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과 별개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유력하고, 효과가 있고, 체계적인 비판이 맑스주의였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

『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보면 ‘맑스주의’는 역사적 운동과 함께 고민되어야 하는 사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책에서 그런 점을 강조한 것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맑스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런 식의 접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현상은 이론의 형태로 추상화되는 과정 속에서 필연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이론이 현실에서의 문제의식과 별개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과 연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이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의’(ism)를 현실적 문제의식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맑스주의에 대한 연구는 ‘운동의 역사’보다는 ‘사상의 역사’로서만 받아들여진 측면이 크다는 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그것을 좀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동의 역사’와 ‘사상의 역사’를 병렬적으로 놓고 그 연관관계를 보면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기보다는 맑스주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수많은 고전들이 대체로 취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맑스주의 역사 서술에서 유럽 중심주의적인 부분을 넘어서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를 통해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내가 개인적으로 중국 혁명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공을 들여서 썼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원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이 책에도 나온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처음 읽었던 책이 중국에서 나온 문헌도 아니고, 한국의 문헌도 아닌,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중국인이나 아시아인이 쓴 책은 거의 없었다. 그 외에도 맑스주의에 관한 책들에서 아시아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빠져 있다. 균형감각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러한 경향이) 심하다. 물론 지금은 나아지고 있기는 하다.

유럽의 비중만 지나치게 높다는 문제가 아니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의 사건이라는 것도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독립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의 맑스주의 운동을 서술할 때 유럽 노동운동과 맑스주의 운동이 여타 지역의 상황과 어떤 연관 속에 있었는지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지배가 완성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의 연관성 속에서 유럽의 노동운동과 맑스주의 운동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고, 이것에 대한 은폐와 집단적인 무시, 무관심 등을 통해서 제국주의의 수탈이라는 물적 토대를 은폐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맑스주의 운동을 정당화하는 것, 유럽의 세계 지배를 인정하고, 그 질서 위에서의 맑스주의 운동을 이야기하면, 유럽 밖의 인민들에게는 맑스주의가 ‘해방의 철학’일 수도, ‘해방의 정치 노선’일 수도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맑스주의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에서도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이야기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그 어떤 사회보다도 한국이 맑스주의적인 비판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적지 않은가 생각한다. 반자본주의를 이야기하거나,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세력들 가운데서 맑스주의가 이렇게 적은 지분을 차지하는 사회는 굉장히 드물 것 같다. 수많은 (비판적인) 역사적 자산들 중 잃어버린 자산이 맑스주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억나는 게 하나 있는데, 어느 후배가 이런 걸 물은 적이 있다. ‘형은 소원이 뭐야?’라는 질문이었다. 7년 전쯤이었다. 거기에 답하길 ‘한 2년만 돈 안 벌고 공부만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했다. 10여 년 동안 그런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젯밤에 문득 그 생각이 났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세상에 아무 일 안 하고 공부만 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이 먹고 살 만한 돈을 누군가가 주는 것 아닌가? 그 돈은 결국 국가나 자본가가 주는 것이다. 왜 주겠는가? 세상엔 공짜가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 지배계급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별로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많이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게 부끄럽지는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던 것이고, 일을 하면서도, 다른 실무를 보면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저자 소개도 3~4일을 고민해서 쓴 것이다. 이 책( 『맑스주의 역사 강의』)이 어떤 책인지 보시려는 분들에게, 이 책은 전문적인 연구자가 쓴 책도 아니고 좋은 대학 나와서 공부만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쓴 책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연세 대학교 나와서 박사까지 한 것은 맞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시겠지만 대학에서는 이런 거 전혀 안 가르친다. 사실 거의 적대적이기까지 한 엄격한 구분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없어지게 하는 역할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지금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가장 큰 동기이다.
2010/08/01 20:31 2010/08/0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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