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슬라브주의의 사도들(2) ― 알렉세이 호먀코프


최진석 (수유너머 N)

키레예프스키와 더불어 슬라브주의 철학의 요강을 세운 다른 한 사람은 호먀코프(Aleksey Khomyakov, 1804~1860)였다. 정연하고 확정된 교리 체계가 없던 러시아 정교에 ‘근대적인’ 교의학적 토대를 제공하였으며, 그 유명한 ‘소보르노스치'(sobornost')라는 독특한 개념을 제시한 것도 호먀코프였다. 오늘날 ‘러시아 종교 철학’을 이야기할 때 끌어오는 정교의 교리는 대부분 그가 갈고닦은 것이었다. 호먀코프의 지적 이력은 서구 종교에 대한 키레예프스키의 비판을 이어받는 데서 시작하는데, 그 뿌리에는 교회사와 인류사가 같은 근원을 갖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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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먀코프(좌측 이미지, 자화상)에 따르면, 초대 교회의 율법은 완전한 통일성 속에 성립하였으며, 그 통일성은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를 떠받치는 기반이기도 했다. 달리 말해, 개인들을 통합하는 집단의 법은 억압적이지 않았고, 집단과 개인은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자유와 통일을 이어 주는 끈은 기독교적 사랑이었다. 영적 사랑 안에 모인 개인들은 자유를 유지한 채 집단 속에서 하나가 된다. 슬라브주의자들이 꿈꾸던 초대 교회의 이미지는 이렇듯 개인과 집단 사이의 문제를 해소한 형태로 제시되었는데, 이는 정확히 근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1054년 동·서 로마 교회가 분열하였을 때,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로부터의 독립이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초대 교회의 원리에 수정을 가한다. 교리의 수정은 단지 자구 몇 자가 바뀌고 끝나지 않고, 전통의 단절이라는 꽤나 파국적인 결과를 낳았다. 가령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는 문구가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로 수정되고, 이로써 초대 교회로부터 전해진 신앙의 오래된 상징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이해할 만하게,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가다듬었다는 해명이 붙었지만, 오염과 불순의 혐의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인간적 이해와 정치적 이득에 따라 원리와 전통이 제멋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제아무리 ‘합리적’이란 꼬리표를 달아 줄지라도 본질적으로 초대 교회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 근대의 계몽주의 정신, 즉 합리주의는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집단과 개인 사이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자유를 훼손시킨 원흉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은 교황을 기점으로 한 위계적 권위주의를 내세웠고, 개인은 거기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명령했다. 중세 유럽 제국이 가톨릭이라는 공통 신앙을 갖고 있었다지만, 호먀코프에게 가톨릭은 ‘자유 없는 통일’을 의미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사정이 나아 보이진 않았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적 권위주의에 대한 정당한 반항이었고, 집단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은 운동이었으나, 역시 서구적 합리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통일 없는 자유’가 프로테스탄티즘의 결론이었고, 서구에서 집단과 개인의 분열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철학자 헤겔의 후예들이 무신론과 유물론에 기울었던 게 전혀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호먀코프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전반적으로 유럽의 근대사는 비록 그게 외관상 가톨릭 국가일지라도 결국 프로테스탄티즘적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교조적인 억압에서는 벗어났지만, 세속적인 철학의 몽롱한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곧 철학적 회의주의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이 사회 영역에서는 서구 사회를 분열시키고 해체하는 상태로 나타난 것이다.”

헤겔은 그의 『역사 철학』에서 역사를 절대 정신이 분원적인 자유를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파악했다. 세계사는 자유가 확장되는 역사라는 것이다. 고대 노예 사회에서는 대부분이 노예 상태였고 단지 한 사람만이 자유로웠다. 중세엔 그보다 많은 수가 자유를 누렸지만 여전히 많은 수가 속박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근대 사회, 헤겔의 시대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사는 그 종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호먀코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자유의 역사는 곧 본래적이고 참된 통일성의 상실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개개인은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으되, 모두를 아우르던 사랑의 일체감은 사라지고 말았다.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은 외적 자유에 집착한 나머지 내적인 자유인 집단과의 통일성이 사라진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정은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티즘이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마찬가지였다. 서구가 잃어버린 내적 자유의 정신, 집단과의 통일성의 원리가 ‘소보르노스치’였고, 그것은 동방 교회의 유산을 이어받은 러시아에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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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베드로의 동생으로 러시아에 최초로 복음을 전파했다고 알려져있다. 러시아의 수호성인이다.

우리말로 ‘통합성’, ‘통일성’, ‘집단성’ 등으로 옮길 수 있는 소보르노스치는 헤겔 철학의 논리적이고 형식적인 추상성에 대립하는 구체성의 정신이었다. 그것은 머리를 통해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몸소 체험하고 실천함으로써 느껴야 하는 원리인 것이다. 호먀코프에 의해 ‘사랑의 도덕적 힘’이라고도 표현된 이 원리는 정교의 의례와 전통 속에 남아 있으며, 따라서 정교에 대한 체험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자에게는 전혀 납득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종교적 진리로서의 소보르노스치는 개념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은총의 직관을 통해서만 도달할 만한 정신적 수준을 가리켰다. 사실 논리·개념적 이해 이전의 직관적 감성에 호소하는 이런 태도를 헤겔은 ‘중세적’이라 불렀던바, 절대 정신이 ‘철학의 단계’인 근대로 도약하기 이전에 속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호먀코프의 지향은 명백히 근대성에 대한 안티 테제였던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근대를 거부하며 상정된 소보르노스치의 이론이 근대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反)서구를 내세우며 그가 갈고닦았던 정교의 교리들은 기묘하게도 당대 서구의 문제의식에 공명하고 있으며, 그 반향을 통해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호먀코프는 개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전체로서 교회를 살아 있는 생명체에 비유했는데, 당대 서구에서는 사회 유기체론에 대한 논쟁이 한창 부상하던 참이었다. 또한, 호먀코프는 서구 사회와 가톨릭, 프로테스탄티즘을 ‘죽은 기계’로 묘사하고, 그에 반해 러시아에는 ‘생명력’이 숨 쉬고 있음을 즐겨 언급하곤 했다. 그런데 전체로서의 생명에 관한 이미지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지적했던바, 19세기 서구 인식론이 도달한 근대성의 핵심적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강요나 억압이 아닌, 자발성(‘자유’)에 따라 교회에 권위를 위임한, ‘사랑의 공동체’인 정교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계약론의 반향을 찾는다면 억지스런 노릇일까? 반서구와 반근대를 외치던 슬라브주의자들조차도 기실 근대성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서구와 근대 문물에 대한 슬라브주의자들의 집요한 반감은 근대성의 거울상, 혹은 역상(逆像)에 더 가까워 보인다.

『역사적 이념의 진리에 대한 연구』(1852)는 호먀코프의 역사 철학이 종합적으로 펼쳐진 저작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란주의’와 ‘쿠스주의’라 명명한 역사의 두 가지 경향을 지적한다. 전자가 소보르노스치에 입각한 자유로운 창조 정신이라면 후자는 물질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심을 가리켰다. 역사는 이 두 가지 경향을 담지한 민족들의 투쟁사인 셈인데, 구약의 세계가 이란주의를 받아들였다면 그리스·로마는 주로 쿠스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적 유산을 계승한 서구가 자본주의라는 물질 만능 사회로 ‘타락’해 버린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반면, 혼란과 파란을 겪으면서도 이란주의를 버리지 않은 동방 교회, 러시아는 인류 구원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떠안게 된다. 이렇게 역사의 보편성은 서구가 아닌 러시아에 부여된다. 러시아는 창의성이 결여되고 고향 없는 유랑민이자 버려진 고아로서 역사의 변경에 위치한 채 세계사에 아무런 기여를 못했다는 차아다예프의 비관주의는, 호먀코프에 이르러 러시아야말로 오래된 인류사적 원리의 담지자로서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란 낙관주의로 대체되었다. 호먀코프에 의하면, 쿠스주의로부터 이란주의를 방어하고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구로부터의 나쁜 영향을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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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대제(1862~1725), 동방의 영향을 많이 받은 러시아의 관습 등을 개혁하며 서구화 정책이라 할 정도로 유럽의 문물을 수용했다. 특히 모든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수염을 깎게 하고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수염세'를 부과했다.

대부분의 슬라브주의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서구에 대한 문호의 개방이란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했었다. 표트르가 도입했던 근대 국가의 모델은 합리주의에 근거한 조직이었고, 서구적이며 따라서 유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호먀코프는 국가가 갖는 조직화 능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봤고, 표트르의 근대화가 몰고 온 러시아의 외적 성장을 불가피한 운명이라 생각했다. 러시아가 19세기 유럽의 강호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던 것은 표트르가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국가와 국민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표트르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결국 미래의 세대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게 될 것이다. 표트르를 통해 비로소 러시아는 소보르노스치와 인류 구원의 사명이란 내적 잠재력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슬라브주의자들과 배치되는 이런 입장을 호먀코프는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고수했다. 호먀코프의 슬라브주의 사상이 19세기 후반에 융성한 범슬라브주의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2010/08/05 19:13 2010/08/05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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