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특별히 ‘좋은’ 사람보다 특별히 ‘싫은’ 사람이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해온 덕에 주위에는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들이 있다. 꾸준히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며 살았는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친밀했던 사람들 중에는 이제 가깝게 느껴지지도, 공통점을 찾기도 힘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나는 한때 비슷한 생각으로 세상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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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 <골콘다> _ 무수히 부딪치는 만남,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가?

딱히 관심사가 분명하지도, 자기 주장이 강하지도 않았던 나는 늘 다수의 가치관을 좇으면서 살았다. 사람들의 관심이 우르르 몰리는 사안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 땐 애써 관심을 가지려 노력했고, 그러다 그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이면 솔직하지 않은 말들로 호들갑을 떨면서 그들과 소통했다. 그런 식으로 내 가치관을 그들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정치, 사회문제들에서부터 연애와 사랑, 하물며 내일 보러 갈 영화를 고르는 것까지 생활의 거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삶의 방향을 남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은 조금 지쳤다. 이거냐 저거냐 선택의 문제야 그렇다 치고, 없는 관심을 억지로 쥐어짜는 것은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꽃미남 아이돌 스타, 연애 잘하는 ‘밀땡’의 기술, 감도 잘 안 오는 ‘억’ 단위를 위한 재테크, 한국전이라는 이름을 단 온갖 스포츠…. ‘당연한 가치관’으로 굴러 가고 있는 이 세계의 ‘당연한 1인’으로 살기 위해 감수해야 할 피로는 컸다. 그러나 감정이 메마른 나는 피로를 감수해서라도 얼마 남지 않은 주위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소통할 수 있는 것에 안심했다. ‘당연한 가치관’으로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옳은’ 삶이었다. 그야말로 ‘재현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재현의 사유는 생각보다 뿌리 깊게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사물에 대한 지각, 사건에 대한 해석, 삶에 대한 태도 등에서 재현의 논리는 물귀신처럼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원본, 진리, 정체성, 본래성 등에 얽매이는 순간--아차, 발치에 놓인 재현의 덫에 걸리고 마는 것! 초월성이 도입되면서 삶은 한없이 무거워지고, 진리의 권위가 재래하면서 변화는 불안이 된다. 다시 중심을 향해, 다수적인 것을 향해 뒤로 돌앗! 재현의 논리는 모든 것을 제자리, ‘원점’으로 되돌린다. - 채운, 『재현이란 무엇인가』, p.91

그런데 그럴싸해 보이는 그 당연한 가치관이 조금씩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저절로 곧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도 사실상 역겹고 구역질나는 요상한 세계임을 알았다(시작은 대학교 시절의 여성학 교양수업인 것 같다). 20여 년 동안 자연스럽게 내 안에 깊이 박혀서 삶을 통째로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잠재적 ‘당연함’을 알아차리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제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내 인생은 긴 세월이 무색하도록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마초’ 대회 1등감인 남자친구를 대학시절 무려 3년이나 만난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했다. 남들의 가치관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인생은 용납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 한 번 더 물음을 품어야 했고, 무슨 일이든 정해진 것, 정답은 없음을 전제해야 했다. 알아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가끔은 섬뜩하기도 하며 스스로 참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알고 싶은 세계가 많아지고 읽고 싶은 책이 늘어갈수록 하루하루가 벅차고 즐겁다. 그런데 문제는 변화하는 만큼 주위 사람들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즐거움을 찾으려했던 나는 이제 즐거움보다 불편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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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침볼도, <여름> _ 이 그림은 야채들의 모둠일까 초상화일까?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학교생활에 열심이었다. 수업에 불참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고 각종 지인들을 모두 끌어들여 훌륭한 과제를 제출했다. 학기가 끝나고 성적이 나올 때쯤엔 늘 소수점단위를 놓고 교수와 실랑이를 벌였다(정확히 말하면 애걸복걸했다). 그녀는 학기마다 많건 적건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 실랑이가 특효를 발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항시 교수들과의 친분을 유지하던 그녀는 교수의 추천으로 졸업 전에 취직했다. 그러나 직장에서 혹독한 야근에 시달렸고, 대인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겹치자 부모님의 강력한 퇴사 권유에 못 이기듯 백수가 되었다. 부유한 집안 덕분에 도피형식의 어학연수를 1년 다녀왔고 6개월 남짓의 회사 생활을 경력으로 쳐주지 않는 대기업들을 원망하며 1년 동안 취업난을 겪었다. 나는 디자인 기획사에서 경력을 좀 더 쌓고 대기업에 지원해도 늦지 않다고 끊임없이 권유했지만 정작 본인의 인생 목표는 ‘가사노동하지 않는 주부’였으므로 당장 디자인 기획사의 야근세례를 견딜 만큼의 용기도 인내도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인생에 회의가 잦고 쉽게 낙담했다.

그녀에게는 대학시절부터 만나던 연인이 있었는데, 한때 그 연인이 교육대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상대로서 부적합 판정을 내리며 헤어진 적이 있다(남편의 ‘교사 월급’으로는 가사노동하지 않는 주부생활이 불가능하므로). 한참 뒤 그녀는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어느 중소기업에 취직했다는 소식과 함께 옛 연인과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연인이 교사직의 꿈을 접고 대기업에 입사했노라고 답했다. 또 1년 후 그녀는 결혼 소식을 전해왔는데 신혼집을 미리 장만했다는 얘기에 축하 인사를 했을 때 ‘당연’한 일에 축하는 웬 말이냐며 ‘원래 남편 부모가 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런 순간이 당혹스럽다. 분명 그녀는 일관된 가치관으로 인생을 쭉 저렇게 살아왔는데 한때 단짝이었던 나는 이제 그녀가 싫다. 세상과 인간을 보는 내 기준이 바뀐 것이다. 한때 존경했던 교수님이 ‘만취 스킨십’의 변태임을 용납할 수 없고 인생 목표가 ‘남들의 부러운 시선’임을 당당히 말하는 선배를 이해할 수 없다. 남자친구와 함께 산다고 말하면 ‘저렴한 여자’로 간주해 버리는 무수한 인간들이 진저리나고 시시껄렁한 여성비하 농담에 불편함을 내색했을 때 예민하게 굴지 말라는 식의 핀잔은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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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피니의 결혼>의 원본과 패러디 _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을 보테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당연하게 느껴지던 것들에 대한 유쾌한 파괴!

무수한 ‘당연’한 것들에 대한 물음. 그것이 재현을 넘어서는 삶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내 삶을 규정짓던 ‘남들의 가치관’을 떨쳐 버림으로써 재현 너머의 삶에 도전한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익숙하고 쉬워진 첫 직장을 박차고 나온 가장 큰 이유도 재현 너머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새로이 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곰팡이냄새 나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보송보송한 1층으로 이사하던 지난 겨울날처럼 지금 나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쁘다. 그리고 ‘특별히 싫은’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좁아빠진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좁아빠져도 뭐, 괜찮다! 그게 어때서?

- 디자인팀 서주성

+ 새식구의 독후감입니다.
그린비에서는 새식구가 들어오면, 그린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합니다. 이 글은 최근에 입사한 서주성 님이 『재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그린비 블로그에 새로 등장한 뉴페이스의 활약(!)을 기대해 주세요. ^^
2010/09/29 09:07 2010/09/2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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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루 2010/09/29 09:46

    정말 공감되는 새식구의 글입니다.^^ 재현 너머의 삶에 도전하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그린비에서의 생활이 되시길.... 저도 매번 자극받고 노력해야겠습니다.

    • 그린비 2010/09/29 10:50

      안녕하세요 하루님.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에서 벗어나기는 참 쉽지 않지요. 재현적 삶 너머의 삶에 도전하는 주성님과 하루님을 응원합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당! ^^*

  2. 순진한양 2010/09/29 11:43

    ㅇㅏ... 공감이요... ㅠㅠ
    한 때 무적백수의 생활을 할 때 친구들이 농담삼아서 "넌 결혼식 때 운동장에서 해야겠다"
    라고 했었습니다. 그만큼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 나만의 가치관이 조금씩 적립될 즈음엔 주변엔 몇 없더라고요.
    그리고 남들의 고민을 들어줄 땐 "주변을 의식해서 그렇자나! 그러지마!" 하면서도
    정작 나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요...
    상상마당에서 what? 시리즈 강의 할 때 좋았었는데... 다시 듣고 싶은데 설마 녹음된
    자료는 없으시겠죠??? ㅋㅋㅋ

    • 그린비 2010/09/29 14:02

      저 역시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람들은 많은데 연락을 자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네요. 어쩐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강자(!)가 되기란 쉽지 않나 봅니다. ^^;

      상상마당 아카데미에서는 강좌에 참석하지 못한 분을 위해 강좌 녹음 파일을 공유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상상마당 아카데미로 문의하시면 더 확실한 답변을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

  3. 빛나곰 2010/09/29 13:36

    와~ 순식간에 후루루뚝딱 읽었어요.
    공감가는 부분도 무척 많고 글도 재밋고 ㅋㅋ
    '재현이란 무엇인가' 요 책도 궁금해지네요 ㅎㅎ

    항상 응원할께요!! 그럼 다시 폭풍업무 속으로...ㅋㅋㅋ

    • 그린비 2010/09/29 14:07

      빛나곰님 반갑습니다!
      지금쯤 폭풍업무 중이시겠죠? ^^
      『재현이란 무엇인가』는 가볍고 작은 책이지만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지요. 그린비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요~ 정말 강력 추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