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읽고

“즉, 나의 일상과 세계를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199~200쪽).

대학 3학년이던 2000년 여름, 아르바이트를 하다 갑자기 일터에서 뛰쳐나왔다. 뛰쳐나와 간 곳은 광화문 교보문고. 그때 갑자기 소설이 무척 읽고 싶어졌다. 소설책을 펴면 막 세상이 열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교보문고 바닥에 앉아 나는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는다. 소록도라는 작은 섬에서 나병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해 주겠다는 병원장의 야심과 그 천국으로부터 소외되는 나병환자들의 갈등을 다룬 소설.『호모 쿵푸스』를 읽다가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그즈음 나는 한 선배와 함께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읽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부조리가 있고, 그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가 자본주의에 있다는 걸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때였다. 선배에게 내가 묻는다. “‘짜르’가 뭐에요?” 선배가 답한다. “러시아의 전제군주에요”(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관계였다). “매뉴팩처는요?” “수공업적 생산방식을 말해요. 부르주아 사회에 와서 생산방식이 수공업적인 것에서 대공업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거죠.” 『공산당선언』을 읽으며 낯선 단어들 사이에서 끙끙대던 내게 세상은 조금씩 어떤 물음을 안고 다가왔다. 그전에는 모르고 지나갔던 것들이 생생한 ‘문제’로 다가온다는 느낌. 그래서 그때는 책 읽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책을 통해 지금까지 내 앞에 있던 그 동일한 현실이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다가온다는 느낌 같은 것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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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_ 사실 요즘은 대학에서 선배와 책을 읽고, 이런 저런 의문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풍경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움'은 늘 '함께'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돌아보니, 그 과정은 나와 세상 사이에 놓인 간극과 갈등을 발견하는 과정이지 않았나 싶다. ‘앎’이 없을 때는 그냥 어떤 ‘답답함’과 ‘우울함’ 같은 것으로 다가오던 것들이 앎이 생겨나면서 구체적인 문제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앎은 문제의 해답은 아니었지만, 문제를 뚫고 갈 수 있게 하는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인 듯했다. 그것은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또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때, 책은 내게 그러한 인식의 힘을 알게 해 준 소중한 매체였다. 인식을 통해 세상과 나 사이를 엮고 있던 ‘서사’의 고리가 보이기 시작한 거다.

“신체를 육박해 들어오는 절박한 질문이 없다면, 그저 값비싼 레저를 즐긴 것에 불과하다”(69쪽).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육화(肉化)되지 않은 질문이 없다면, 정말이지 책읽기에서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내 절실함에 대해 묻곤 한다. 책상에 앉아서 개념으로 세계를 건축하는 일에도 충분한 진정성과 절실함이라는 게 있는 걸까, 개념의 세계와 상처받는 현실세계 사이에는 정말 문제가 될 만한 큰 간극이 없는 걸까? 세상의 숱한 모순들에는 이론적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이 물음에는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가끔 내가 절실함을 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확고하다고 믿고 싶어진다. 물론, 이 ‘생각’과 ‘믿음’ 사이에는 어떤 불안이 있다. 내가 사실은 절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 같은 불안, 내 절실함이 세상에 수용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 그런 불안 때문에 종종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대학 3학년 때는 대부분의 것들이 비교적 명확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했고, 남성으로서 남성이라는 자아에 남성이 아닌 이들을 가두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세상의 혼란과 동요에 무지하게 된 내 모습을 볼 때, 학위와 학자로서의 타이틀에 얽매이게 될 때, 거리의 투쟁을 방관하며 혁명에 관한 책을 읽고 있을 때, 일의 노예가 되어 남들과 경쟁하며 아등바등 살아갈 때, 그런 명확함이, 그런 확고부동한 당위가 나와는 너무 먼 것이 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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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 _ 몸을 안다는 것, 내 삶을 안다는 것, 이 두가지는 늘 함께 갑니다.

“운명이 궁금하냐? 그럼 네 몸을 잘 관찰해 봐. 네 몸의 동선과 습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계와 활동. 그게 바로 너의 운명이라고”(169쪽).

내 몸은 어떨까? 좀 마른 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마른 편까지는 아닌데 살은 좀 쪄도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는 것을 느끼는 체질.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가 아버지의 툭 튀어 나온 배를 보고 내 배는 절대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게 운동의 강박을 나은 게 아닐까 추측 중이다. 몸이 비교적 예민하고 피로회복이 더딘 편인데, 『호모 쿵푸스』를 읽다가 그 원인이 육식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기를 줄여 볼까 부쩍 고민하고 있다.

주량은 이십 대 초반에는 소주 세 병가량, 지금은 한 병이 넘어가면 ‘휘청’한다. 대학 입학 전까지는 록밴드 동아리에 들고 싶었으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부터 시작된 뒤풀이 문화에 중독되어 학과와 학회에 발목 잡힌다.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학교 앞에서 자취한다는 사실 때문에 선배들에게 붙들려 술을 마시다가 학생회실에서 자기를 곧잘 했다(그러므로 대학 시절 내 삶의 동선은, 짧은 연애과정만 제외하면, 거의 자취방과 학생회실과 가끔 나갔던 집회장소에 국한된 편이었다). 그때는 술기운을 얼굴에 달고 있는 듯하고, 후배들에게 진실된 애정을 보이며 삶과 문학과 운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던 선배들에게 무척이나 큰 감화를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을 닮고 싶었는지 언제부턴가 내 얼굴에서도 선배들처럼 땀 대신 알코올이 흘러내린다는 과장 섞인 평가를 대학동기로부터 듣기도 한다.

자주 들었던 말: (새벽에 술 취한 목소리로)“태경아, 형이다, 챙겨라.”

인상 깊게 들었던 말: “넌 20세기형 인간 같아”(맑스를 읽고 진보정당에서 활동하며 코뮤니즘에 대해 말하는 나를 보고 대학동기가 한 말. 시대에 뒤쳐졌다는 말인지, 20세기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인지 구분이 안 감).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139쪽).

가끔 등 뒤로 들리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가 쫑긋 서는 것을 경험한다. 왠지 목소리와 말투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라도 한다는 듯. 나는 탁하고 거친 것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너무 부드러우면 형식적인 건 아닐까, 진실성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호흡이 중요하다. 타인도 부담 없이 말할 수 있게 해주고, 또 가끔은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호흡을 갖는다면 좋겠다는 생각. 그것은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떤 목소리와 호흡을 갖고 있는 걸까?

대학 때 학과 내에 있는 학회에서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시창작 세미나를 열고 있었다. 세미나 방식은 이랬다. 모두들 매주 시를 한 편씩 써 온다. 물론, 익명으로. 그 익명에 안도하며 서로 신랄한 비평을 퍼붓기로 한다. 때로는 서너 명이서, 또 때로는 예닐곱 명이서 세미나를 하곤 했다. 모두들 A4지에 자신의 시를 출력해오고 세미나가 시작된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시에 대한 비평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세미나가 시작되자 비평은 구체적인 저자를 향해 본격적으로 가해졌다. “태경이의 시를 보면 형은 좀 걱정된다. 너무 어두워.” “응…… 그러게” 등등. 저자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아도 시를 통해 모두들 글쓴이가 누구인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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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이를 그린 루소의 그림 _ 글을 쓸 때, 그 글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내면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일 것입니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었다. 대학원 신문사에서 첫 기사를 쓰던 날, 편집장을 하던 친구가 내가 쓴 기사를 보며 폭소를 했다. “야, 태경이가 읽어주는 거 같아.” 그리고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네 목소리가 들린다야”라고 하며 같이 웃었다. 지독히 객관적이고 건조하게 써야 하는 기사문을 나만의 문체로 썼다는 것이니 사실상 욕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도로 난 대체 내 말투와 문체가 어떻다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위 인용문처럼, 가끔은 글보다 그 사람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누군가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그 사람의 글을 읽는 게 그에 대한 이해를 더 높일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글에는 저자 자신도 모르는 그 사람만의 호흡이 담겨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쓴 글에서는 어떤 호흡이 느껴질지 무척 궁금하다.

“중요한 건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신을 진정 비울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135쪽).

그럴 것 같다.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나 전문성을 가장한 경직성을 먼저 비워야 세상이 올바로 내게 다가올 것 같다. 고전의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도 아마 비슷한 것이리라. 용기를 갖고 타인과 부딪치고 세상을 인식하는 힘을 기르라는 것, 지식의 앵무새가 되기보다 자기만의 절실함으로 세상을 응시하라는 것.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절실함에 대해 묻는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 물음 역시 삶의 해답을 주진 않겠지만, 나아가야 할 좌표는 제시해 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가다 보면 나중에는 나를 아주 잘 아는 동료들이 내 삶과 내가 하는 공부의 의미를 일깨워 줄 것만 같다. 타인들과 섞여서 서로 부딪치고 감응하다 보면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되겠지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며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공부를 향한 “고요한 질주”(143쪽)를 하고 싶다. “잃을 것은 낡고 병든 지식의 사실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부다”(11쪽).

- 편집부 고태경

+ 새식구의 독후감입니다.
그린비에서는 새식구가 들어오면, 그린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합니다. 이 글은 최근에 입사한 고태경 님이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새로 등장한 뉴페이스의 활약!! 기대해 주세요. ^^
2010/10/06 09:29 2010/10/0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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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진한양 2010/10/06 11:04

    오~ 정말 문체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이나요???
    전 지금까지 '나의 문체'에 대해서 돌아볼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문체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라는 호기심도 생기네요~
    새 식구님의 글 잘 봤습니다~ ^^

    • 그린비 2010/10/06 13:39

      글을 한 편 쓰신 후에 지인들에게 읽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
      어떤 반응을 느끼실지 궁금해지네요.
      즐거운 오후 보내셔요~

  2. 책쟁이 2010/10/07 06:34

    그린비의 새식구이시군요. 반갑습니다. ^^

    • 그린비 2010/10/07 09:34

      새 식구의 글, 앞으로 기대해주세요! (응원도 많이 부탁드려요 ㅎㅎ)
      좋은 하루 되시길~ ^^*

  3. 하루 2010/10/08 09:36

    저에게 "공부"만이 나의 살 길이라는 좌표를 제시해 준 책이 호모 쿵푸스였습니다.^^ 독후감에 새 색구의 삶이 묻어 있어서 좋네요~~ 반갑습니다.

    • 그린비 2010/10/08 09:41

      우왕~! 하루님도 호모 쿵푸스에 감응을 받으셨군요. ^^*
      앞으로 새 식구의 활약을 기다려주셔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