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어주는 남자, 노들야학에서 '사건'을 만나다!

책을 고른다는 것
책을 읽는 사람, 즉 독서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와 ‘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가 다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는 ‘내게 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된 건 단순한 ‘독서가’가 아니라 ‘독서교육자’다. 과연 ‘독서교육자’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을까. 그에게 ‘책을 고른다’는 것, ‘책을 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읽을 책을 고르는 것’과 ‘남에게 권유할 책을 고르는 것’, 특히 그 ‘남’이 ‘나’와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동료가 아니라, 내게 ‘배움’을 청한 ‘학생’인 경우, 책을 고르는 일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 ‘좋은 책’이란 ‘교육’, ‘배움’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교육자가 고를 ‘좋은 책’이 과연 ‘책’에 달린 문제일까에 의문을 품고 있다.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 기초해서 말해보자면, ‘독서’를 우리가 하나의 ‘사건’이라고 부를 때, 그 ‘사건’의 성격은 책보다는 그 책을 만나게 되는 ‘상황’과 더 깊이 관련되는 것 같다.

물건을 교환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하지만 연인들이 잘 알 것이다. 물건이 전달될 때, 물건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잉여의 것이 소통된다는 것, 그 ‘잉여의 것’이 두 사람을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핵심임을. 독서교육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책을 골라줄 때, 어떤 책을 권유할 때, 어떤 잉여의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잉여’라고 했지만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전체 성격을 규정하니까. 책을 건네는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지, 상인과 손님 사이인지, 스승과 제자 사이인지를 결정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 ‘잉여의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책을 전할 때 책을 권유할 때, 선생이 실어 보내는 것, 책의 권유 속에서 스승과 제자를 ‘스승’과 ‘제자’로 만들어주는 그것은 무엇일까. 오늘 그 점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책 읽기의 곤란함

올해 2월 아주 흥미로운, 하지만 조금은 부담스러운 제안을 받았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한 학기 동안 정규과목으로 인문학강의를 해달라는 거였다. 내가 수업을 진행할 ‘불수레반’은 중등과정을 공부하는 열 명 정도의 중증장애인 반이었다. 중등과정이라고 하지만 학인들은 20대와 30대가 약간 있고, 반 정도는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40대 중후반의 어른들이었다. 수업계획을 짜며 학생들의 욕구 조사를 했다. 학생들에게 '뭐 공부하고 싶으시냐' 물어보니 '그런 거 없어' '니가 알아서 해' '언니 맘대로 해' 같은 답이 돌아왔다.

학생들의 욕구는 좀처럼 모아지지 않았다. 모아지지 않았다기보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결국 월례 인문학 때 니체를 강의한 적도 있고,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김선생이 니체를 강력히 추천하기도 해서, 니체를 공부하기로 했다. 문제는 교재였다. 니체 원전으로 수업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진은영 선생이 십대를 겨냥해서 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추천했다. 내용을 알기 쉽게 잘 풀이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제기를 받았다. 문체가 문제였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그 문체가 40대 어른들인 학인들에게 맞지 않다는 거다. 사실 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대할 때 마치 ‘애’를 대하듯 하고, 그 점이 장애인들에게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예전에 국어 수업 시간에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문제제기가 나왔다고 한다. 내용은 좋은데도, ‘우리가 언제까지 강아지똥이나 읽어야 하냐’고 말하는 학인들이 있었다.

개학 날짜는 다가오는데 교재 선정은 난항을 거듭했다. 그때 김선생이 그냥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직접 읽으면 안 되냐고 했다. 김선생의 제안과 그때 떠오른 생각(굳이 니체 원전을 읽어야 한다면 에피소드가 많은 『차라투스트라』가 나을 것 같다는)으로, 결국 『차라투스트라』를 직접 읽기로 결정해버렸다. 어떤 면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마땅한 책을 고를 수 없었기에, 즉 중등수준의 독해력을 지닌, 하지만 40대의 어른인, 거기에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마땅한 인문학 책을 골라줄 수 없었기에 선택된 책이었다. 한마디로 ‘선택을 포기했기에 선택된 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에라 모르겠다, 일단 부딪혀 보자’는 심정으로 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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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의 지성인,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니체'가 40대 중증 장애인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그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첫 시간에는 니체라는 인물과 그의 철학을 개략적으로 소개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성의껏 내 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정말 ‘성의껏’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상당수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습관적으로 나는 강의 때 그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런데 그런 서술형 질문은 금세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반에서는 아주 느린 속도로 조금씩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소수뿐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다 해도 제법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말조차 할 수 없다. 일반적인 수업에서 가능한 피드백을 여기서는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작은 강의실에는 내 목소리만 울리는 것 같았다. 한 학기 동안 허공에다 혼자 소리를 계속 질러야 하는 것일까. 참 막막했다.

첫 시간을 해보고 책을 잘못 골랐다는, 아니 이런 식의 수업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학인 A형은 첫 시간부터 딴청을 부렸는데, 그는 특히 수업이 언제 끝나는지 시간만 체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내 강의가 길어지면 수업시간 끝났다고 소리를 쳤다. 사실 그는 책도 많이 본 것 같고 무엇보다 글을 아주 잘 써서 인터넷 홈페이지가 아주 인기라고 들었다. 첫 시간 후 김선생이 그에게 소감을 물어본 모양이다. “나체?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애 쓰지 말고 대충해. 학생들이 관심이 없는 걸. 너만의 만족.” 첫 수업을 마치고 그가 한 말들이라고 한다.

알 수 없는 맹수들
본격적인 책읽기는 두 번째 시간부터였다. ‘죽음의 설교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시작했다. <말은 어떻게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이 내게 살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속삭이는 존재들이 있다>고, 그들을 ‘죽음의 설교자’라 한다고 했다. 첫 텍스트를 ‘죽음의 설교자’로 시작한 것은 힘든 세상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 세상에서 삶을 가꾸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책을 읽은 후 질문은 ‘예/아니오’나 ‘객관식’으로 던졌다. 아니면 바로 낱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그때 과제는 내 주변에서 ‘죽음의 설교자’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문장들은 쉽지 않았는데, 소리를 내서 앞에서 낭독하는 순간, 나는 이 책을 고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야학에 오기 전에 이 책을 열 번도 넘게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장소, 책읽는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때문인지, 참 많은 생각이 들었고,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읽었던 문장들에서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 문장을 여러 번 힘주어 다시 읽었고, 내게 떠오른 일들을 말하기도 했다. ‘죽음의 설교자’를 찾아오라는 과제, 사실 과제라고 했지만, 김선생이 일주일 동안 만나서 학인 인터뷰를 해온 뒤 수업 전에 발표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초점이 맞지 않은 답들이 나왔는데, 딱 한 사람, B양의 답변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몸이 자꾸 뒤틀리고 고개가 돌아가 전동휠체어에 몸을 묶고 옆을 보며 강의를 듣는다. 장애 정도가 가장 심해서 부모님 외에는 아무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곁에서 활동보조를 하던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는 ‘죽음의 설교자’를 ‘엄마’라고 했다. 처음에 그 소리가 맞나 싶어 아버지에게 물었는데 역시 ‘엄마’라고 했다. 헌신적으로 자신을 돌보시는 어머니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죽음의 설교자’라고 했는데, 그 까닭은 아직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죽음의 설교자’란 꼭 ‘죽어라’고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 눈길은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고개를 자꾸 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죽음만이 궁극적 탈출 내지 구원인 듯. 어떻든 그녀의 답변은 더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간의 눈빛은 참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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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에게 '죽음의 설교자'는 누구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세 번째 시간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를 읽었다. 예전에 이 부분은 이성 내지 정신 중심의 서양철학의 전통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만 읽었는데, 이 부분을 불수레반에서 읽는 순간 책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낳고 있었다. 중증장애인들, 누구보다 신체 때문에 차별적 시선을 느꼈고, 그 자신이 자기 신체에 대해 ‘경멸’했던 사람들이기에 글은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소리 내서 읽으며 나는 학인들이 매우 집중하고 있음을 느꼈다.
참 희한했다. ‘이 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을 그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떤 문장을 읽을 때는 살얼음 위를 걷는 느낌이었고, 어떤 곳은 불로 달궈진 철판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분명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은 나 혼자인데, 나는 여러 개의 눈이, 여러 개의 입이, 여러 개의 정신이 소리를 내고 있다는 느낌을 실제로 가졌다.

마침내 하나의 불꽃이 일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체에 대해 “우리 안에 맹수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할 때였다. 이때 맹수란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삼켜버리는 충동이나 욕망 같은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구절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여러 학인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손을 휘젓고 휠체어를 들썩였다. B는 급작스레 근육의 강직이 일었고, C는 자기를 손으로 가리켰으며, D는 ‘내가 그렇다’고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를 여러 번 읽었고, 여기저기서 강의도 많이 했지만, 그 문장에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에게 어려운 책이 아닐까.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그 문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확신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그 문장을 자기가 잘 안다는 듯이 그들은 뭔가를 쏟아냈다. 눈시울이 많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두어두었을 우울과 분노, 슬픔, 격정이 쇠우리에 갇힌 괴물처럼 각자 안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눈에는 학인들 모두가 정글에서 살아온 맹수들 같이 보였다. 저들이 자기 안에 산다고 확신하는 그 맹수들이 아마 장애인들이 입은 상처이겠지만 또한 그들의 엄청난 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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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엄청난 능력을 가진 근육질의 남성이 아니다. 차라리 버스에 쇠사슬을 묶음으로써 삶의 쇠사슬을 끊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간혹 중국 작가 루쉰의 글도 함께 읽어줬다(루쉰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중국어로 번역한 적이 있다). 번역이 조금 오래된 것이기도 하고 루쉰 문장도 만만치가 않아, 이런 글을 여기서 읽는 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이미 『차라투스트라』에서 보인 반응을 봤기에 그냥 읽었다. 가령 『차라투스트라』의 ‘살무사에 물린 상처에 대하여’를 읽으며 루쉰의 「죽음」을 읽었다. 너무 오랫동안 원한과 복수의 정신, 양심의 가책으로 살아온 나머지 몸 안에 모든 감정을 독으로 만들어버린 살무사, 그의 말과 행동은 그것을 당한 사람에게 치명적 독(Gift)이 되고 만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을 선물(Gift)로 받는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누군가 너희에게 저주를 할 때 얼마쯤은 너희도 그렇게 해주어라’고 말한다. 선물로 바꿀 힘이 없다면 맘속에 원한을 품는 것보다는 얼마간 복수를 하고 맘에서 그런 원한을 없애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루쉰의 「죽음」이라는 잡문을 읽어주었다. 독사 이야기를 정반대에서 접근해보기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임종시에 여러 사람들과 화해를 한다고 하는데, 루쉰은 “멋대로 원망해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도덕군자인 양 할 게 아니라 얼마간 복수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어떤 일은 죽을 때에도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화개집』의 어떤 문장을 읽어주며, 독사 같은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호소할 것도, 사정할 것도, 혈서를 쓸 것도 없다. 계속해서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독사처럼, 원귀처럼.” “시체의 숲 사이를 조용히 기어가는” 독사처럼, 우리를 칭칭 감고는 놔주지 않는 뱀처럼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고. 『화개집』에 실린 이 글은 『차라투스트라』의 ‘크나큰 사건에 대하여’를 읽을 때 함께 읽은 것이었다. 특수효과(?)가 많은 떠들썩한 사건이 아니라, 대지를 배로 기어가며 숲을 조용히 가로지르는 독사처럼, 소리없이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원귀처럼 달라들 때, 위대한 사건이 우리를 찾아온다고. 루쉰의 글은 D에게 큰 반응을 일으켰고(그는 다음 학기에는 루쉰의 글을 읽자고 했다.), 또 수업참관을 위해 들어온, ‘환자들의 권리찾기 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 -사실 활동가이기 이전에 큰 병을 오래 앓고 있는 남편을 둔 분이었는데-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나는 어느 철학자, 독문학자, 중문학자보다 이들이 이때 이해한 것이 뒤처졌다거나 오해라고 생각지 않는다. 책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책읽기와 삶읽기
극히 일부분을 보고 느낀 내 주관적 인상일 수 있지만, 우리의 책읽기가 비로소 구체적 상황 속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나와 학인들이 공유하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학인들의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발음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요원하기는 하지만... 어떻든 저 사람은 저 단어를 저렇게 발음하는 구나. 요즘 어떤 일을 하고 다닌다는데 걱정이네. 그런 식이다. 아마 학인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다. 앞에서 책 읽는 나를 보는 것이다. 내 삶의 일단을 보고 내 표정을 보고 내 억양을 듣고. 자신은 별 감응도 없는 부분에서 이상하게 흥분하고 어떤 곳에서 감동하는 걸 보고, 그런 상황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읽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는 E는 내게 적어주었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은 건지 고병권을 읽은 건지 모르겠다고.” 김선생의 말에 따르면, E는 “A와 세트로 인문학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사람이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전에 했던 수업 내용을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다. 차분한 성격의 그는 반응을 크게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깊이 있게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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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상황에서 읽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의 니체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 독서와 삶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주 종강을 하며 술을 함께 먹었다. A와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해 본 것도 처음이고(A의 이야기는 아직도 내게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다. 그는 철학책을 읽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철학자인 것 같다. 겉으로 철저히 위장하고 있지만.), B의 정면 얼굴을 본 것도 처음이다. 술 덕분에 B의 강직된 근육이 풀려 고개를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무표정했던 F도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물론 아주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학인들은 다음 학기에도 어떻든 철학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용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 ‘차라투스트라’라는 말을 들으면 무척 반가울 거라고 했다. 어떻든 『차라투스트라』 읽기가 그럭저럭 괜찮은 추억이 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책의 교육자
2년 전에 ‘앎은 삶을 구원하는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추방과 탈주』). 그 글의 결론에 이르러, 나는 ‘어떤’ 앎이 삶을 구원하는가로 문제를 바꾸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삶과 무관한 앎이 삶을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삶과 무관할 때 앎은 단순한 지식과 정보(삶과 무관할 때 그것은 상품처럼 거래도 가능하다)에 머무르고, 공부는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고대로부터 교육자에게 내려오는 하나의 가르침이 갖는 위력을 실감했다. “살아온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라.”

고대의 선생들에게 ‘가르침’이란 공개적으로 자기 삶을 고백하는 일이고 앞으로 살아갈 길에 대해 약속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누군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선생이 살아온 길을 존경하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길을 함께 걷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스승의 고백과 약속, 다짐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앞에 선생으로 서 있는 이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지식과 정보를 전달할 때마다 다른 어떤 것을 실어 보내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고백과 약속, 다짐, 맹세 같은 것이다. 스승의 삶이란 그것이 어떤 삶이든, 고백하고 약속하고 다짐하고 맹세하는 삶인 것이다.

나는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하는 것에 교사의 소명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책의 내용을 말하는 것은 책 자신이다. 그것을 요약하고 전달한다면 그것은 축소이고 왜곡일 것이다. 축소나 과잉, 왜곡이 아닌 순수한 독해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교육자는 책을 읽어줄 때 혹은 책을 권유할 때, 다시 말해 ‘독서’라고 하는 사건 속에서 ‘제자’를 만날 때, 뭔가 다른 걸 전달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는 책을 읽어주고 권유하며, 자유를 전하고 용기를 전하고 기쁨을 전하고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책에다 그런 것을 바르는 것이다. 책을 전한다기보다 ‘책을 읽는 행위’를 전하는 것이다.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전하지 않은 채 책을 권한다면 우리는 매장의 점원과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다.

교육자가 책을 전달하며 전달하는 기쁨과 슬픔, 분노, 격정, 용기, 자유, 성실함, 악착같음 등등이 우리가 강연 처음에 제기했던 ‘잉여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교육자의 삶이다. 교육자가 걸어온 길, 걸어갈 갈에 대한 다짐이 거기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책을 권유받는 학생은 그 길의 감동과 용기를 권유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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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전사 요다선생상_ 스승은 길 안내자이자, 함께 하는 벗이 아닐까?

강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선생의 길을 이렇게 새삼 음미하는 것은, 그것이 책을 읽어주거나 권유하는 일에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독서교육자’, 즉 ‘책을 만나는 경험’ 속에서 ‘배움’을 청하는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는 여기 계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노들에서 한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김선생에게 수업 관찰 보고서를 전달받았다.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새, 김선생과 A형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수업이 한 달 남짓 지났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고병권 그 사람이 열심히 해. 애쓰는 게 보여. 다른 애들이랑 달라.” 김선생은 그래도 아직 철학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했지만, 나는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책을 읽을 때 그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아마도 이 자리에 앉아계신, 선생님들은 아시리라 생각한다.

어떻든 현장에서 ‘정말로’ 교육자로 계시는 선생님들 앞에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 작태를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저 ‘책읽어주는 남자’로서의 짧은 경험에서 나온 이러저런 생각 정도로 받아들여주시면 고맙겠다. 그럼....

※ 이 글은 고병권 선생님이 사서 교사 모임에서 ‘인문학 도서 어떻게 고를까’를 주제로 강의한 원고를 발췌한 것입니다.

2010/10/12 12:51 2010/10/1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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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Fun한 세상 2010/10/12 15:49

    글 읽고 몇몇 문장들이 가슴에 와닿아요.
    "교육자가 책을 전달하며 전달하는 기쁨과 슬픔, 분노, 격정, 용기, 자유, 성실함, 악착같음 등등이 우리가 강연 처음에 제기했던 ‘잉여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교육자의 삶이다." 넘쳐서 줄 수 밖에 없는 상태. 받아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고, 그런 태도를 계속 배워나가야겠어요. 감사한다거나, 내가 선물할 것들을 많이 배우고, 만들고 한다거나.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
    이 문장 감동입니다. :)
    오늘 고려대학교로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러 갑니다.
    사진, 책, 음악, 옷, 제가 배우는 것들의 이야기 등등~

    블로그에 찾아보면 좋은 글들이 정말 많은데, 블로그 같은 곳으로 조금 퍼가도 될까요?
    글(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걸 잘 하고 싶은데, 아직 연습은 많이 못했어요.
    (1주일 전부터 마음먹고 글 낮설게 하기를 하고 있어요.)
    업로드된 글들을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어 배우고 싶어서요.

    1주일전에 이만교 선생님의 "글쓰기 공작소"를 읽었습니다.
    2007년 수강생이였고 덕분에 대학에 합격했었기에...^^기억이 많이 났습니다.
    (사실 당시엔 뭔지 모르고 논술고사나 준비해보자 해서 갔었어요. 그런데 무척 재미있었죠)


    좋은 책,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S. E-Fun한 세상이라는 닉네임은 그냥 떠올라서 써봤구요..
    앞으로 다른 이름드로 댓글달지도 모릅니다. :)

    • 그린비 2010/10/12 20:39

      E-Fun한 세상님 안녕하세요. (닉네임에서 유쾌함이 막 밀려오네요.)

      저도 글을 발췌할 때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많아서 분량 조절하느라 고민이 많았지요.(응? ㅋㅋ) 감동하였다는 E-Fun한 세상님의 말씀에 너무너무 공감이 갑니다.

      우왕!! 이만교 선생님의 책을 읽고(?) 대학에 합격하셨다니!! ^^
      글쓰기에 관한 글이 모여 있는 아래 링크를 추천합니다. ㅎㅎ
      http://bit.ly/byULaz

      참, 글의 전문을 퍼가는 것보다는 링크를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자주 만나요~

    • 이-Fun한 세상 2010/10/13 12:33

      2007년 이만교 선생님 강의를 들었구요.
      2회 강의 수강후 논술고사를 봤어요.
      거기서 운좋게 합격했고, 2008년 대학생이 되었어요.

      글쓰기 링크 보니 도움이 될듯합니다.
      링크해주셔서 감 삼니다. :)

    • 그린비 2010/10/13 14:16

      아하! 강의를 들으셨군요.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이만교 선생님의 『글쓰기 공작소』도 강력추천입니다. ^^

  2. 하루 2010/10/13 11:20

    저주를 선물로 바꿀 힘이 없다면 맘속에 원한을 품는 것보다는 얼마간 복수를 하고 맘에서 그런 원한을 없애는게 나을 것이다는 내용이 요즘 저의 직장생활과 맞물려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네요.^^;;

    독을 선물로 바꿀 힘이 있다면 좋을텐데.... 오히려 마음에 잉여만 남기고 말더라고요.

    • 이-Fun한 세상 2010/10/13 12:28

      차라리 얼마간의 복수를 해주는 것이,
      싸워보는 것이 맘음 편하고 좋은듯해요.

      경험상으로는, 뽀뽀하고 싶은데, 말도 못꺼내고 후회하는 것 보다
      말이라도 꺼내고 뽀뽀 못해보는 것이 후련했달까요.. :)
      좋은 예가 되었을런지...

      저도 어제 루쉰의 저 문장과 공명했어요. ^^

    • 그린비 2010/10/13 14:24

      워...원한이....아, 뭔가 마음이 안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ㅠ_ㅠ
      소소한 복수를 하시면서 맘을 푸는 건 어떠세요?
      이런 저런 소소한 복수의 예시를 들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는게 없어서 민망합니다. 쿨럭;;

  3. 찬드라얀1호 2011/10/21 11:03

    정말 좋은 글 오랜만에 읽고 갑니다.
    글솜씨가 없어서,, 글을 남기는 것이 민망하지만
    (뭔가 잘 읽었다는 내용을 글로 표현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괜히,,)

    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

    • 그린비 2011/10/21 11:25

      찬드라얀1호님!!
      글솜씨에 관계없이 정말 감동적인 댓글입니다! ㅠㅠ)b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가장 감동적인것 같아요~
      민망하실 필요 전~~~~혀 없으십니다.

      블로그에서 자주 뵈어요! ^^*
      찬드라얀님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가끔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