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를 통해 G20 의심해 보기

요즘 제가 편집하고 있는 책은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Scales of Justice: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balizing World)이라는 책입니다. 작업은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고, 11월 말경 ‘그린비 프리즘 총서’의 다섯번째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프리즘 총서가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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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프레이저는 아직 국내에는 정식으로 소개된 바 없는 새로운 사상가입니다(논문만이 몇 편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947년생이니,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을 뿐 ‘신진’ 학자는 아닙니다. 또 책을 읽어 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듯, 나이에서만이 아니라 사상의 폭과 깊이에서도 ‘중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학자입니다. 현재 뉴욕에 위치한 신사회조사연구소(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교수로 재직 중이고, 거기서 여성주의이론, 사회·정치철학, 비판이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세일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 등 쟁쟁한 이론가들과 논쟁을 벌였고, 책도 함께 쓴 바 있습니다. 또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등 20세기 독일–프랑스–미국의 사상가들에게서 고루 영향을 받았고, 균형 잡힌 태도를 통해 그들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새로운 ‘정의론’을 창안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상가입니다(한마디로 마당발이란 거죠). 그리고 2008년에 출간된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이런 프레이저 사상의 발전과정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 책입니다. (신사회조사 연구소 페이지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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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정의』의 표지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책의 저자에 관해 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건 간략하게나마 이 책을 소개하고픈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며칠 전에 개최된 G20 정상회의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제가 G20에 느꼈던 의아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저 행사가 의문투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전 G20을 잘 모릅니다. 몇 달 전부터 떠들썩하긴 했는데(가는 곳마다 눈에 띄었던 홍보포스터, 무려 450조 원의 경제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예측 등등), 이 회의에서 정확히 무엇을 논의하는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고(세계를 구하는 게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긴 했습니다), 이상한 쪽으로만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회의 기간 중 음식물쓰레기 배출 불가, 정화조차량 운행 중지, 홍보포스터에 낙서 절대 불가 등등). 또한 G20이 마무리된 후 주말에 올라온 기사들을 보면, 실제로 이 회의에서 특별한 결론이 난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물론……G20 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난다 해도, 그것이 구속력을 지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 대통령도 지난 5일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G20에서 도출되는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회원국들은 자국의 이해에 맞는 정책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인터뷰 기사 보러 가기)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한 걸 보니 말이죠(그럼 이런 회의를 왜 하는 걸까요?). 아무튼 이 이틀짜리 행사에 관해, 저는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느낌만 받았습니다.
  여러 관점에서 G20 회의를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책적 차원에서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고, 국제적 패권관계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또 (한국에서 특히 심각했던 것 같은) 국가주의에 관한 비판적 시각으로 G20 열풍(?)을 설명할 수 있겠죠. 그러나 낸시 프레이저의 도움을 받아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방금 언급한 ‘잘 모른다’의 차원입니다. 나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사건을 잘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잘 모를 수밖에 없기도 한데, 왜냐하면 (왜 이런 회의가 개최되는지 등등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제가 G20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느 정도 해명해 주고 있습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좀 길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의 상황은 일종의 ‘비정상적 담론’의 상황이다. 정의에 관한 공적 논쟁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쟁들은 점점 더 정상적 담론의 구조적 특징들을 결여하고 있다.
오늘날 논쟁 당사자들은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종종 그 어떤 공유된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집단이나 공동체를 선호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오직 개인들만을 정의의 주체로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정의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은 종종 부정의를 시정할 기관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공유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초국적 제도 혹은 세계시민적 제도들을 제시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토국가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논쟁 당사자들은 대화 참여자의 적절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도 상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요구를 국제적 공론에 호소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제한된 정치공동체 내부로 토의를 제한하고자 한다.
나아가서 오늘날 논쟁 당사자들은 종종 정의의 문제와 관련하여 고려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자격을 부여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동료 시민으로 그 범위를 제한한다.
또한 그들은 정의 요구가 제기될 수 있는 개념적 영역에 대해서도 자주 의견을 달리한다. 어떤  사람들은 재분배에 대한 (경제적) 요구들만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인정에 대한 (문화적) 요구와 대표에 관한 (정치적) 요구 역시 수용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논쟁 당사자들은 어떤 사회적 분열이 부정의를 야기하는지에 대해서도 종종 의견을 달리한다. 어떤 사람들은 민족과 계급의 분열만을 인정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젠더와 성의 분열도 부정의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저는 이 부분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그리고 좀더 좁게는 제가 G20에 가졌던 의아함을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비정상적 담론(상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확정적인 문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기존의 ‘정의’(justice) 문법에서 정의의 범위는 국민국가, 정의의 대상은 그 국가의 시민, 정의의 내용은 경제적 재분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가정들이 다 깨져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별 국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정의 문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의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사람도 이제 더 이상 한 국가의 ‘국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또한 경제적 재분배뿐 아니라 문화적·정치적 쟁점들도 주요한 정의 문제로 부각된 지 오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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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정부 하에서 국민이 자주 호명된다는 것은 주변의 대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무엇보다 국민 전체의 생존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간주될 때 가장 먼저 희생을 요구받는 이들이다.(고병권, 『추방과 탈주』)

G20의 결성은 이런 ‘비정상적 정의’의 상황을 잘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초국적 차원의 회의라는 점에서 G20은 개별 국가 단위론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의문투성이입니다. 우선 G20이 ‘20’이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그런 게 있다면)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 혹은 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불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G20은 세계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밝혔지만,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경제 문제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20개국의 ‘정상들’이 모여 회의를 벌였다고 하는데, 왜 하필 20개국일까? 나머지 국가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왜 ‘정상들’일까? 그 정상들이 보통 사람들의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소하려 노력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이해하고는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들은 무엇을 논의하고 있는 걸까? 2008년 공황 이후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경제’ 문제일까?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경제’란 무엇일까? 나아가 ‘경제’가 아닌 다른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걸까? 그런 다른 문제들은 G20과 같은 초국적 회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걸까? 마음만 먹는다면 끝없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엔, 우리가 이 질문들에 대한 그럴듯한 답변을 듣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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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개최된 G20, 많은 나라들 중 20등 안에 들었다는 자부심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렇다면 이런 조직체·회의가 우리에게 실질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려면, 즉 정의로우려면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할까요? 프레이저는 공론(公論)이란 정당성유효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판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내부에서 형성된 공적 의견이 정당하고 유효한 경우 공론장은 해방적이고 민주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식화에서 정당하다는 것은 공정하고 포괄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서 그 공론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며, 유효하다는 것은 그 공론이 공적 권력의 사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공직자들이 책임을 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에 한 사회단체에서 ‘G20을 비판 소책자’를 펴냈습니다(뒷북인지 모르겠지만 전 이제야 이 소책자를 읽는 중입니다). 그 책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G20에는 대표성, 정당성,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경제규모를 중심으로 선택된 20개국이 전 세계 190여 국가를 대표할 수 없고,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강요해서 현재의 위기를 발생시킨 당사자들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정당성이 없고, 회의 참가가 봉쇄되어 있고 내용과 진행절차도 철저히 비공개라는 점에서 민주적이지 않습니다.”(소책자 PDF 파일 보러 가기) 지금까지 다섯 번의 회의를 개최한 G20은 정당성을 담보한 조직일까요? 그리고 거기서 결정된 사안을 각국 정부에 관철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유효성을 갖고 있을까요? G20과 관련해 지금까지 들려 온 이야기들을 고려할 때, 답은 ‘아니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G20 정상회의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가는지(실제로는 별다른 구속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효과를 창출하는지(450조 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회의의 개최가 우리 국가의 이미지를 얼마나 제고하는지(‘국격’)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G20이라는 초국적 조직이 결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조직이 정당성과 유효성을 결여한 채 신통치 않은 합의만을 낳고 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 실패한 조직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도록 요구받습니다(그리고 아마도 기존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국민국가나 UN·IMF·세계은행 같은 초국적 조직체들에 대해서도 던질 수 있을 겁니다). 과연 오늘날에 합당한 정의의 내용, 당사자, 실현방법은 무엇일까? 달리 말해, ‘지구화 시대의 부정의’를 해소하기 위해선 어떤 정의의 틀(frame)을 설정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바로 이것들이 낸시 프레이저가 『지구화 시대의 정의』에서 답을 찾고자 궁리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 편집부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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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런던에서 열린 G20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 시위를 했다. 그 중 브이포벤테타 복장을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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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정의 - 10점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그린비
2010/11/17 13:47 2010/11/1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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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진한양 2010/11/17 14:57

    같은 맥락이겠지만 저도 비슷한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20개의 국가에서 어떻게 190여개의 국가 전체의 경제를 논할 가치가 있겠으며,
    혹 있다 치더라도 그 경제의 의미는 무었일까?
    어느 국가에서는 물과 빵이 결정적인 경제(혹은 생존)적 문제라면 그것을 해결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20개국 중 어느 국가가 먼저 물과 빵을 건네 주는 것.
    그런 십시일반과 상생의 정신력이 결여된 전 지구적 이벤트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 그린비 2010/11/17 17:24

      G20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저도 궁금합니다.
      경제 말고 다른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해서도요.
      저 답은 우리 삶에 무엇이 어떻게 적용되고 바뀌어가는지 지켜보는 것에서부터 찾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2. 단비 2010/11/18 18:38

    낸시 프레이저의 2008년 저서가 출간된다는 소식, 반갑게 잘 봤습니다. 소소한 지적일지도 모르지만, 편집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프레이저 교수는 정치(사상)학 전공자들은 알만한 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민주주의 이론과 관련해 왕성한 활동을 보인 이론가입니다. 편집자께서 단서를 달긴 했으나("국내에는 정식으로 소개된 바 없는"), 혹시라도 책 소개글에 "새로운 사상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적절하지 않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재직하고 있는 뉴욕의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는 아렌트,아라토, 라클라우, 무페 등이 강의/연구를 했던 인문사회과학 중심의 대학원 대학입니다. 통상적으로 학계에서는 '뉴스쿨'이라 부릅니다(현재는 뉴스쿨 아래 여러 단과대학이 편재해 있습니다). 이 학교가 다른 일반 대학과는 좀 다른 연원이나 조직구조를 갖고 있어서 그 명칭도 일반 대학(원)과는 다릅니다. '신사회조사연구소'라는 이름은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의 출판계에서 종종 범하는 억지 한국어 명칭입니다. 사실 이렇게 호명할 경우 일반 독자들도, 학계의 사람들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책 날개의 소개글 따위에는 '뉴스쿨 사회과학 대학원' 정도로 표기하는 게 적절하단 생각입니다.

    • 그린비 2010/11/19 10:21

      단비님 안녕하세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책에 꼭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3. papaj 2010/11/24 10:56

    지구화 시대의 정의의 내용, 당사자, 실현방법이라.. 굉장히 어려운 문제네요. 책에서 어떤 해답이 나올지 궁금해집니다.^^

    • 그린비 2010/11/24 13:11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점에서 곧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