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슬라브주의의 사도들(3)


최진석(수유너머 N)

고전 슬라브주의자들 가운데 비교적 후발 주자로 간주되는 콘스탄틴 악사코프(Konstantin Aksakov, 1819~1876)는 헤겔 철학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물론 소위 1840년대의 러시아 귀족 치고 헤겔을 공부하지 않은 이가 없었지만, 슬라브주의자들 중에서 헤겔주의를 사유의 바탕으로 삼아 온전히 자신만의 역사철학을 체계화한 이는 악사코프와 유리 사마린(Yuri Samarin) 정도였다. 특히 이 둘을 ‘정교도 헤겔주의자’라고 부르는바, 종교를 거의 철학의 경지로 끌어올려 사유하던 인물들이었다. 근대 러시아 종교철학의 1세대에 끼친 헤겔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한 것이었는지 니콜라이 베르댜예프의 다음 논평을 주목해 보자.

슬라브주의자들은 인간의 소명에 대한 헤겔의 관념을 받아들이고, 헤겔이 독일인에게 적용했던 관념을 러시아인에게 적용하였다. 그들은 헤겔 철학의 원리를 러시아 역사에 곧장 적용했다. 악사코프는 러시아인에게는 헤겔 철학을 이해해야만 할 특별한 소명이 있다고까지 말할 지경이었다. 사마린도 정교회의 운명이 헤겔 철학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헤겔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다만 호먀코프만은 헤겔 철학이 정교의 사상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사마린으로 하여금 헤겔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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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유리 사마린(Yuri Samarin) , 오른쪽 : 콘스탄틴 악사코프(Konstantin Aksakov)

슬라브주의자로서 악사코프 역시 헤겔을 등지고 떠났다. 하지만 헤겔 이전의 그의 사상은 산발적이고 두서가 없었다. 악사코프가 자신의 고유한 역사철학적 관점을 지니게 된 것은 헤겔의 사상을 흡수할 만큼 흡수한 뒤, 그로부터 떠나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유럽과 대조되는 러시아만의 특수한 운명을 강조한 점에서 악사코프도 여느 슬라브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충실했던 헤겔 학도는 자신의 역사관을 갖게 되자마자 사상의 본토로부터 결연히 선을 그었다. 즉, 러시아와 유럽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시, 즉 최초의 러시아에 관한 (지금도 명백히 밝혀지고 있지 않은) 전설 가운데 하나는 고대의 루시인들이 자신들의 통치자를 내부에서 선출한 게 아니라 외부로부터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바이킹의 선조인 노르만족을 영접해 자기들에 대한 지배를 청탁하였다는 것인데, 한편으로 자민족 비하적일 수 있는 이 전설에서 악사코프는 루시인들의 겸손함과 자유의지 및 평화 애호의 마음을 읽어 냈다. “서구 국가들은 폭력과 노예화, 적대 위에 세워졌다. 그와 반대로 러시아는 자발적 동의와 자유, 평화의 토대 위에 국가를 건설했다.” 이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러시아와 서구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차이 그 자체로서 변별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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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에 그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는 <그리스도와 성메나스> 이콘. '이콘'은 러시아 정교의 성화를 뜻한다.

키레예프스키(Ivan Kireevsky)는 표트르의 개혁이 고대 러시아와 근대 러시아를 갈라놓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호먀코프는 서구와 러시아는 서로 다른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갈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비록 당대의 서구 문명에 대해 강렬한 불신과 적의를 갖고 있었으나, 서구와 러시아는 인류사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보편주의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에 비해, 악사코프는 인류사라는 보편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어떻게 해도 일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특수한 민족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낳았고, 당연히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지켜져 온 언어와 문학, 관습, 전통 등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다. 민족의 역사에 대한 악사코프의 지향은 그의 형 이반 악사코프와 함께 민중들 사이에 전승되던 시가나 노래, 민담 등을 채집하는 활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러시아적인 것을 결정하는 기준, 러시아의 ‘내적 진리’로서 양심과 종교, 전통, 풍습 등을 내세운 것이 악사코프만의 일은 아니었다. 다른 슬라브주의자들 역시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한, 동일한 자료들에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이에 대해 악사코프의 체계가 갖는 차이는 ‘대지’와 ‘국가’를 상호 대립적인 요소로 상정하고, 양자의 역사적 관계를 통해 러시아를 진단했다는 점이다. ‘대지’는 러시아 민족의 내면적 진리가 담긴 원리로서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는 심성을 말한다. 반면 ‘국가’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외형적이고 비인격적인 체제로서 강압과 폭력의 원칙에 의거해 있다. 양자는 대척적으로 보이지만, 의외로 별 모순 없이 공존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대지와 국가가 합의와 믿음에 근거해 있다면 두 원리는 충돌하지 않고도 사회생활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도덕성과 신뢰에 입각한 대지의 원리가 국가를 감싸 안을 때 그렇다는 점에서, 근본에 있어서는 대지가 국가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대지는 국가를 단지 바깥으로부터 둘러싸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여러 외적 지절(枝節)들에 고루고루 침투해 법과 제도에 의해 연결되지 않는 부분들을 매끄럽게 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법 없이 살 만한 세상, 제도의 빈 곳을 도덕과 양심이 보충해 주는 사회. 이른바 유기체로서 민족적 삶의 이미지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악사코프는 러시아의 역사에서 이런 유기적이고 목가적인 대지-국가의 관계가 두 번 침해당했다고 말한다. 두 번 모두 가해자는 국가였지만, 배반당하고 상처받은 대지는 번번이 국가에 대한 (보살핌의) 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첫번째 배반자는 이반 뇌제였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로도 잘 묘사된바, 이반 뇌제는 폭압적 정치와 종잡을 수 없는 폭력을 통해 민중의 순진무구한 대지 위에 국가의 강철 같은 원리를 꽂았다. 가신 귀족들에게 제멋대로 땅을 분배하고 처형하기를 일삼던 뇌제의 배반은 곧 진정되었으나, 러시아사에 잊을 수 없는 굴곡을 남긴다. 두번째 배반자는 예의 표트르 대제였다. 이른바 ‘근대화’란 관습과 도덕률 위에 만들어진 공동체를 근대적 관료 국가로 변신시키는 사업이자, 대지를 국가의 노예로 전락시킨 일대 비극에 다름없었다. 표트르는 필요악으로서 국가를 제1원리로 만들었고, 민중을 야만적으로 복종시켰다. 표트르는 뇌제보다 더 잔혹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러시아의 토착적인 뿌리를 갈아엎고 러시아를 서구적 궤도 위에, ‘외적 진리’의 도상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이제 러시아에 유구한 ‘내적 진리’를 보전한 사람들은 민중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만일 민중들마저 내적 진리에 등을 돌린다면, 러시아의 소명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악사코프의 결론은 다시 슬라브주의의 강령으로 돌아간다. 표트르에 의해 강제로 계몽된 귀족들, 상류사회가 토착적인 원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러시아인은 러시아인이어야 하며, 러시아의 길, 정교도의 길, 온순하고 겸허했던 과거의 길, 내적인 진리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미래 운명은 그런 과거로 얼마나 빨리 되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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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 <이반 뇌제와 황태자> _ 폭군 중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이반이 자신의 아들을 때려죽인 사건을 표현한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흉기로 쓰인 왕홀이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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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코프의 결론을 동시대의 보수주의자였던 니콜라이 카람진(Nikolai Karamzin, 오른쪽 사진)과 비교해 볼 만하다. 카람진은 감상주의 문학을 이끌던 귀족 문인으로 관료 생활도 경험했고, 『러시아 제국의 역사』를 집필한 역사가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서구식 개혁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갖는다는 점에서 보수파였지만, 정교 사상가와 관료 출신 사이에는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카람진은 귀족의 현상 유지를 위해 서구적 의제들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창 자유주의 혁명이 벌어지던 유럽과 러시아를 격리시킬 필요는 있으나, 표트르의 개혁이 낳은 근대국가는 귀족에게 유익하기도 할뿐더러 필수 불가결한 물질적 토대였기에 지켜야 했다. 따라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 정책이나 재정, 통치 구조 등, ‘국가’의 원리는 결코 포기될 수 없고, 오히려 더욱 강화시켜야 했다. 민중의 불만이 있다면 천천히 제도적 개혁을 통해 개선하면 될 것이다. 반면, 악사코프에게는 민중의 이름과 민중의 원리로서 ‘대지’를 회복하는 게 가장 중요했고, 그 실천은 대귀족들의 즉각적이고 진심 어린 참회였다. 악사코프에게는 법과 제도를 통해 당장의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민중을 보살피기 위해 전력투구하라는 강령이 더 ‘본질적’이었던 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람진식의 점진적 개혁이 실질적인 효과를 볼 수 있으리란 기대는 무망했다. 하지만 악사코프처럼 기도와 참회에 호소하는 것 역시 실효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어느 쪽으로나 보수적 관점에서 볼 때도 러시아의 미래는 다소간 불투명하고 암울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첨예하게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은 일관되게 몽상적인 면모를 보였다. 각자 나름대로 현실 대응 원리를 모색하고, 때로 실천적 해결책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대개 당대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무지와 의식적인 회피를 반영할 뿐이었다. 물론, 슬라브주의자들에 의해 이론화된 러시아 종교철학, 또는 러시아 사상이 오늘날까지 러시아 사유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에 대한 평가를 분기점으로 하여, 키레예프스키, 호먀코프, 악사코프에 이르는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급속히 몰락해 버린다. 그것은 한편으로 ‘헤겔의 시대’가 저물어 감에 따라 관념보다는 실천과 해방을 모토로 삼는 해방적 정치 조직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슬라브주의를 제국주의 정치 운동으로 전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은 정치를 국가적 차원에 속한 문제로, 따라서 민중적 삶의 내적 진리에 배치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극도의 혐오감을 나타냈지만, 그들의 후예들은 정치야말로 슬라브주의가 사상적으로 원대한 나래를 펼 수 있는 계기라 생각했다. 결국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서구주의와 마찬가지로 슬라브주의는 정치의 무대에서 전면적인 변전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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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스베토슬라프스키, <모스크바 그림학교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_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온다. '헤겔의 시대' 이후의 러시아는 어떤 모습일까?


2010/11/19 10:09 2010/11/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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