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될 수 있는 능력
-박노해

진정 나는 나일 수 있는가
나 자신이 되는 일을 하고
내 가슴이 떨리는 사랑을 하고
내 영혼이 부르는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

진정 나는 남이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으면 많은 남들이 될 수 있는가
남이 되는 일을 하고 남이 되는 밥을 먹고
남이 되는 공부를 할 수 있는가

남이 될 수 있는 만큼이 나인 것을
남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실력인 것을
진실로 남이 될 수 있는 능력이
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인 것을

가족들에게야 항상 무뚝뚝하고 매정한 딸이었지만 그건 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치고, 사춘기 시절 저는 참 소심하고 찌질한 아이였습니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는 당시의 사건들을 나열해 보자면 친구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다른 가족 구성원이 받으면 말 한마디 못하고 숨죽여 손톱만 물어뜯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내려놓은 후에도 혹시 범인이 나라는 것을 알까 밤잠을 설치고) 스스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고(굶으면 굶었지)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타야 할 버스가 눈앞에 있어도 혹시 나를 지나쳐 버릴까봐 뛰어가서 타지 못했고 사람들에 치여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 할까봐 사람 많은 버스는 몇 대를 그냥 보낸 적도 있습니다. 버스에 타면 또 어땠게요. 내 앞에 빈자리가 생겨도 왠지 부끄러워 앉지 못했고(도대체 왜;) 매달려 있는 손잡이를 잡으면 휘청거릴까봐 곧 죽어도 기둥 손잡이를 사수하던 저는 하차벨을 누른 후에 내릴 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려도 굳이 내려서 집까지 꾸역꾸역 걸어갔던 적도 있습니다. 내려야 할 전전 정류장부터 책가방을 조몰락거리며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무수한 사건들을 맞이하는 제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무렇지 않은 척’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극심한 노이로제가 있었다고나 할까요?(보는 이들에게는 도대체가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을 텐데 말예요) 이렇게 ‘당황하지 않은 척’, ‘원래 그러려고 했던 척’하면서, 또 이런 제 ‘척’을 누군가가 눈치 채면 ‘원래 들킬 것을 알고 있었던 척’, ‘누군가 눈치 채기를 바라고 일부러 그런 척’하면서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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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심한 성격 덕분에 저는 매번 한없이 예민하고 쓸데없이 걱정하며 남들의 눈에 비추어질 내 모습에 대해 끊임없는 망상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피곤한 인생을 바꾸어 줄 좋은 도구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쏘쿨’이지요. ‘아무렇지 않은 척’에서 ‘뭐 어때’로 바뀌는 순간, 그저 마음가짐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인생살이 이건 뭐 식은 죽 먹기로 변했습니다. 남이 어찌 보건 뭐 어떻습니까. 두 번 볼 사람들도 아니고, 또 여러 번 볼 사람이면 그 사람 나름대로 ‘얘는 원래 이런 아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뭐. 이-편한 세상을 왜 모르고 지냈을까요. 이후로 제 성격은 많은 부분 변한 것 같습니다. 좋게 말하면 너그럽게, 나쁘게 말하면 냉소적으로요. 그것이 소심한 저로서는 가장 덜 상처받는 방식이었나 봅니다. 사실 쏘쿨한 삶을 살다 보니 관계에 대해 덜 예민해지고 의견 차이도 덜 나고 그러다보니 다툴 일도 적어지고 설령 다퉜다고 해도 화해가 쉬웠습니다. 차이를 적극 인정하는 것은 그만큼 고민이 줄어드는 일이었으니까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어색해진 사이를 어쩌면 좋을까’ 등등의 고민은 더 이상 필요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 ‘내가 실수했을 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사과하면 되겠지’, ‘어색하면 화해하자고 하지 뭐’ 따위의 생각들로 걱정고민은 한방에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팍팍-!). 또 예민하게 굴지 않고 쉽게 화해하니 주위 사람들에게 성격 좋다는 말도 꽤나 들었습니다. 인생 역전 성공한 듯 보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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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내부 속에서 만들어진다.(존 버거, 『이미지』)

그런데 요즘 쏘쿨한 인생을 추구하던 제 마음에 조금 변화가 생겼습니다. 계기는 평소 그린비 주간님의 사소한 말씀들이겠지만 그건 ‘또 그 놈의 회사 자랑’ 같으니 생략하기로 하고, 중요한 것은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저 말만 들으면 ‘그런 소리는 나도 하겠네’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한마디 덧붙이자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껏 저는 단 한 번도 쏘쿨한 제 삶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서로에게 가급적 피해를 덜 주고 덜 받는 합리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소심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했던 쏘쿨한 삶은 상대에게 ‘이해’보다는 ‘무관심’으로써 ‘나’를 방어하는 이기적인 태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에야 찾아오는 이러한 걱정 섞인 충고들이 이미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제게는 조금 충격적이기까지 하네요.

저는 어떤 남이 될 수 있을까요? 주간님께서는 “내 부모님, 내 남자친구만이 되지 말고 저 멀리 어딘가의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으로써 저는 부모님도 될 수 없고 남자친구도 될 수 없고 아마도 제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분이 언짢아도 팽 하고 토라져서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저의 행동들이 마구 떠오르니까요. 지금껏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연습을 게을리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능력’이라고 하니 뭔가 거창해보이고 결국엔 나를 위한 ‘스펙’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은 그런 ‘기술적인 힘’ 말고, 나를 담고도 넉넉히 남는 깊은 그릇이 되어 온전히 남과 하나가 되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요즘입니다.

- 디자인팀 서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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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에 충실할 때 주체는 반드시 해체되어 갈 수밖에 없으며 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이정우,『주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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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10점
박노해 지음/느린걸음
2010/11/27 11:37 2010/11/2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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