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남일당이 결국 철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남일당은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망루농성을 벌인 철거민 5명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건물이었고, 용산 범대위와 유가족들이 용산참사 해결을 요구하며 점거했던 '투쟁 근거지'였습니다. 『부커진 R3』에 실린 남일당의 글을 한 편 소개하려고 합니다. 함께 글을 읽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용산 남일당이 철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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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사람들이 지켜 낸 1년, 남일당 24시
박채은

용산참사 현장에 처음 온 분들은 ‘남일당’이 뭐냐고 묻곤 한다.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분향소가 차려진 곳이 바로 ‘남일당’이라고 하는 금은방이 있던 자리다. 한강대교를 지나 용산으로 넘어오다 보면 대로변에 남일당 건물이 서 있다.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은 2009년 1월 19일 이곳 옥상에 망루를 지어 올랐다. 가장 잘 보이는 곳, 고립되지 않을 곳,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세웠지만, 바로 그 이유로 공권력은 철거민들에게 단 하루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살아 보겠다고, 지켜 보겠다고 올라갔던 망루였다. 죽으러 간 것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용역들의 폭력을 피하고 싶었고, 아무리 신고해도 방관만 하는 경찰을 더는 믿을 수 없어서 올라간 망루였다. 망루를 올리면 그토록 바라던 조합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망루 4층 꼭대기에 <용산4상공철거대책위원회> 깃발이 올라갔을 때만 해도 그 이후에 벌어진 참혹한 결과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는 망루 아래 동지들과 가족들에게 하트를 보내고, 누구는 핸드폰 불빛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안도했다. <장안약국> 앞 행상에서 과일을 팔던 아주머니도 평상시처럼 과일을 팔았다.

“아줌마, 오늘은 여기서 과일 팔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요!”라고 옥상에서 소리쳤지만, 아줌마는 괜찮다며 계속 과일을 팔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여섯이나 되는 사람들이 주검이 되어 내려왔다. 용산 철거민 두 분, 연대하러 온 다른 지역 철거민 세 분, 그리고 특공대 대원까지…….

“그렇게 참혹한 사고가 난 그 건물에 우리가 1년 동안 살고 있다는 게 끔찍해요. 아직까지 고개를 들어 망루를 쳐다볼 수조차 없어요. 그날 너무 무섭고 두려웠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 생각으로……” 3일 전만 해도 시장에서 순대국에 소주 먹으면서 “이 집 디게 맛있네. 며칠 있다 다시 옵시다” 그랬던 사람들이었다. 철거민 다섯 분은 돌아가셨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망루에서 떨어져 다친 사람들은 병원으로,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은 며칠 동안 경찰, 검찰 조사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대부분 구속되었다. 망루 밖에서 특공대 진압 과정과 동지들이 떨어지고 죽어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던 가족들과 철거민들은 충격에서 벗어날 틈도 없이 남일당 앞 차가운 바닥에 비닐을 치고 분향소를 만들고 길거리 투쟁을 시작했다.

김순옥* 사고 나고, 시청 앞에 영정 들고 매일 나갔죠. 아이고 휴… 그 추운데, 상복 입고…거기 가가지고 밀고 땡기고 다치고, (광장에) 못 들어오게 하니까 상복을 싸 가지고 화장실에 가서 입고서 (경찰들) 뚫고 들어가 앉고…… 말할 수도 없었어요, 그 탄압…….

문춘이* 우리가 여기서(남일당) 생활을 하다 보니, 분향소 지킬 때에는 구정 때에도 집에 못 갔어. 분향소 규찰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깨요. 혹시 향불이 꺼질까봐… 정신을 많이 집중하고 있지. 향불 꽂으면서 눈물이 흐르지. 미안합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보니까… 우리 열사분들 사진을 쳐다보면 옛날에 동지들하고 같이했던 거 떠오르니까…….

* 김순옥(49세). 용산 4구역에서 20년 동안 포장마차 <순천집>운영
* 문춘이(62세). 용산 4구역 철거민. 2001년부터 <우동포차>운영

그렇게 남일당의 하루는 분향소의 향불을 붙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분향소 옆 한 켠에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참사 당일부터 같이 밥을 해 먹으면서 투쟁을 이어 왔다. 이곳 철거민 분들 대부분이 음식 장사를 해 오셨던 터라 음식솜씨가 참 좋으시다. 적게는 50명에서부터 많을 때에는 300명까지, 그렇게 하루 세끼 일 년을 꼬박 밥투쟁을 해오셨다며 웃으신다. 왜 힘들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리가 가진 건 없어도 용산에 도움 주시는 분들한테 밥이라도 드릴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하는 엄마들이다. 점심 12시가 되면, 박물관 식당 할머니가 레아로 오셔서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식사하세요~” 하고 외치신다. 계절별로 달라지는 밑반찬과 대구, 광주 지역에서까지 보내 준 맛있는 반찬들, 그리고 4구역 엄마들의 음식 솜씨가 더해져 이곳에 오면 배보다 마음이 더 풍요로워진다. 공동식사 시간은 용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다. 사람들의 활동 공간이 남일당과 레아, 기도천막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니, 용산에 있어도 다 함께 모일 기회가 많지 않다. 식사 시간에 모여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고, 서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새로운 정보도 나눈다. 힘겨운 투쟁 중이지만 밥 한술을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힘나는 일인지를 남일당 식당은 보여 주었다.

공동식사 시간의 평화로움은 잠시일 뿐, 용산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경찰, 용역, 구청직원들과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봄날 예쁘게 꽃을 틔운 화분들을 받치던 받침대며, 철거민들이 간이로 사용했던 화장실, 비를 피하기 위해 쳐 놓은 텐트, 예술가들이 그려 놓은 그림까지 경찰들은 구청직원과 용역들을 대동하여 모두 철거해 갔다. 구호가 적혀 있는 현수막을 뺏기지 않기 위해 경찰, 용역들과 줄다리기를 얼마나 해댔던가. 그 덕분에 여름 내내 4구역 엄마들의 팔과 다리에는 온갖 종류의 파스들이 훈장처럼 붙어 있었다. 그 싸움의 와중에 4구역 분들 중 가장 최고령이신 정복례 할머니는 경찰한테 눈을 맞아 2번이나 수술을 하셔야 했고, 경찰들과 가장 최전선에서 싸웠던 유가족 엄마들이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여러 번이었다. 철거를 계속하려는 용역들의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을 막아서다 뚝배기와 벽돌에 머리를 찍히고, 발로 밟히고……. 이 참혹한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경찰들의 수수방관에 치를 떨었다.

세상의 무관심과 계속되는 경찰의 탄압에 몸과 마음이 지쳐 가는 와중에서도 계절은 바뀌어 갔다. 여름 이후 유가족들은 순천향병원에서 용산 <삼호복집>으로 삶터를 옮겼고, 아이들은 이제 용산에서 학교를 다닌다. 남일당 앞에 노란 은행잎이 물들고, 추석 송편을 함께 만들고, 겨울을 나기 위해 김장을 하고, 재우 아저씨는 ‘용산참사 해결하라’가 적혀 있는 예쁜 군고구마통을 끌고 고구마를 팔았다. 모두가 잠든 아주 깊은 밤에 조용히 분향소를 찾아와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하다며 울먹이던 시민들,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살짝 놓고 가던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남일당의 밤손님들이라 불렀다. 더운 여름 시작한 시청 앞 노숙투쟁은 가을을 넘겨 추운 겨울을 맞이했고, 초라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노숙생활을 해야 했던 4구역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준 것 역시 지나가는 시민들이 살며시 내민 따뜻한 캔커피와 베지밀이었다. 그 마음들의 온기가 꼬박 1년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았나 싶다.

문춘이 시청에서 노숙하면서 진짜 거기서는 초라한 모습이잖아. 피켓 걸고 앉아 있으면 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안됐다고 따뜻한 캔커피, 베지밀 가져다 줬을 때의 그 고마움…… 그 캔커피 하나에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 좋은 거야. ……근데 어린 경찰들 전경차 옆에 서서 겨울에 보초 서면서 콜록거리고, 발발발 떨고 있을 때 진짜 뛰쳐 나가서 뜨거운 물 한 잔이라도 주고 싶은데, 그걸 못하는 거야, 우리가. 그럴 때 진짜 마음이 너무 아팠어.

의경들도 1년 동안 같은 공간에 그렇게 함께 살았다. 남일당 현장에서 경찰들과 수도 없이 부딪치고 싸웠지만, 그들은 미사를 드릴 때에도, 1인 시위 음악회를 할 때에도 고정(?) 관객이었다. 12월 30일 협상 타결 다음날, 정말 거짓말 같이 소음과 매연을 내뿜던 경찰차도 사라지고, 24시 경계근무를 서던 경찰들도 없어졌다. 그걸 보고 엄마들이 한마디 한다. “아이구… 경찰들 없어지니 시원하기도 하지만, 허전허네. 우리가 1년 동안 같이 살기는 살았나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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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은 "Voice of the voiceless" 목소리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미디어운동을 하고 있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풀뿌리미디어, 공동체미디어에 대한 연구와 네트워크 일을 해오다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촛불방송국 레아 활동을 했다. 마을마다 공동체미디어가 활발해지는 시점을 상상하며 운동하고 있다.
2010/12/01 16:26 2010/12/0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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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진한양 2010/12/02 10:58

    얼마전 전태일열사 40주년 이었지요? 그 분의 이름이 아직도 우리 가슴속에서 살아있는 것은 과연 '그분이 그렇게 큰 일을 했었다'라는 이유 하나만일까요?
    사람들 모두가 그 행동에 암묵적인 관심과 응원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포스팅 마지막에 박채은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의 관심과 지지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울러 또 다른 용산이 생겨나지 않에 우리들 가슴속에
    '남일당'의 이름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가신 용산의 열사분들과 남아 계신 용산의 가족분들이 마지막에 웃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 그린비 2010/12/02 12:26

      순진한양님의 관심과 응원도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연대망을 끈끈하고 촘촘하게 엮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