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레온티예프와 러시아 비잔틴주의(1)

최진석(수유너머 N)

서구주의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사상의 거점을 마련했던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을 떠나, 이제 19세기 후반을 장식했던 정치적 슬라브주의의 진영을 살펴보자. 키레예프스키와 호먀코프, 악사코프 등은 민족의 역사와 소명에 관해 숙고함으로써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들의 교의는 계명되고 보수적인 소수 귀족층에게만 전해짐으로써 큰 사회적인 호소력을 갖진 못했다. 고전 슬라브주의는 그들이 그렇게나 숭앙하던 ‘민중’과 실제로는 유리된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중요한 정치적 현실과도 별반 결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리 사마린 정도를 제외하고 고전 슬라브주의자들 가운데 자신들의 입장을 제도와 정책 속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는 드물었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사정이 변했다. 슬라브주의는 이제 세계사에서 러시아의 위치를 고민하는 ‘물음의 사상’에 머물 게 아니라 그 위치를 정당화하는 ‘현실의 운동’이 되어야 했다. 헝가리를 비롯해 러시아 제국의 변경에 있던 소수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했고, 1854~56년간 크리미아에서 벌어진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패배는 러시아 지성인들이 안고 있던 사상의 과제를 현실 속에 풀어내도록 종용했다. 서구주의자들이 농노 해방과 전제정 타파와 같은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면, 슬라브주의자들 역시 어떤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단지 이상(理想)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 운동 형태가 요구되었다. 니콜라이 다닐레프스키(Nikolay Danilevsky)의 범(凡)슬라브주의가 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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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1854~1856), 러시아는 알마 강 전투, 발라클라바 전투, 인케르만 전투, 세바스토폴 포위전 등 크림 전쟁에서 벌어진 4번의 전투에서 완패했다.

범슬라브주의자들은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이 꿈꾸던 러시아 땅의 고대적 이상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히려 가장 현재적인 것, 이른바 ‘슬라브적’이란 형용사로 묶일 수 있는 현실의 정치 지형이었다. 폴란드와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등 역사적으로 상이한 사회·문화적 권역을 이루었던 동슬라브인들은 어떻게든 같은 슬라브 민족으로 엮을 수 있는 정치적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범슬라브주의 운동은 ‘민족’의 이름으로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 물론, 그 운동은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수렴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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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레온티예프(Konstantin Nikolayevich Leontiev, 1831~1891, 왼쪽 사진)는 정확히 말해 범슬라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닐레프스키의 영향을 받아 자기 사상의 구조를 만들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스승의 관점과 목표로부터 이탈해 갔다.
청년 시절에는 문학 창작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레온티예프가 두각을 보인 분야는 외교였다. 1863년 외무성에 입사한 이래 약 8년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영사 업무를 맡아보았는데, 당시 투르크 영토에 속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자주 방문하여 그리스 정교 문화에 깊이 심취했으며 또 아시아 문화에도 상당한 흥미를 나타냈다. 외무성을 사임하고 귀국하기 1년 전부터는 아토스 산에서 수도승 노릇을 하며 금욕주의와 경건주의를 몸소 실천했는데, 여기서 형성된 견실한 신앙심과 불요불굴의 정신력이 귀국 후 그의 종교·사회·문화 비평의 주축이 된다. 말년에는 사회생활은 물론, 가정생활도 내던져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살았고, 그의 사상에 묻어나는 비관론과 염세주의는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레온티예프를 ‘러시아의 니체’로 부르게 했다.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럼 이제 레온티예프 사유의 궤적을 뒤쫓아가 보자.

고전 슬라브주의 선배들과 레온티예프를 구별 지어 주는 점은, 그가 사유의 서구적 뿌리를 근본에서부터 비판하고 배척했다는 사실이다. 피사레프나 도브롤류보프, 체르니셰프스키 등 동시대의 서구주의자들과 평행하게 레온티예프는 독일 관념론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이른바 ‘서구적’이라 부를 만한 사상이라면 무엇이든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것은 선배 슬라브주의자들이 내세웠던 러시아의 민중적 보편성과 평등한 형제애 등에 대한 적개심이자 냉소와도 연관된다. 그가 보기에 고전 슬라브주의는 서구와의 대결을 통해 성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적 사상을 자기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오히려 수용해 버렸기 때문이다. 레온티예프의 문명론을 읽어 보면 이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문명은 세 가지의 근본적인 발전 단계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한다. 우선 문명은 원초적인 ‘단순성’의 단계에서 출발하는바, 이 단순함은 전체 속의 각 부분들이 균질하고 동등한 특질을 나타내며 서로 구별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고대 혹은 중세인들의 삶이 아마 그랬을 텐데, 이는 문명의 초기 단계로서 야생적 힘을 보유하고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찬양될 상태는 아니다. 왜냐하면 부분들이 서로 구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결국 독특한 개성이나 고유성이 미개발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알겠지만,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은 고대와 중세의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바로 그런 동질적이고 동등한 생활 형식 속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구별되지 않음’이란 그들에게 계급적 차이에 의해 지배와 피지배의 분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레온티예프는 단순성이란 “아무런 발전의 징표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감히 ‘미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원시성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복잡성’은 그 다음 단계로서 더 중요한 문명의 수준이었다. 부분과 전체는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면서도, 각 부분들이 독특한 발전의 개별성을 표현하며 가지런히 위계화될 때 문명은 최고의 발전을 이룬다. 각 부분들의 질서정연한 구별 가능성이야말로 한 문명이 형태론적으로 단순하지만 구조적으로는 고도의 복잡성을 달성한 상태를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복잡다단하던 발전의 지절들이 다시 상호 통합되고 단순해지는 ‘하강기’다. 섬세하게 구별되고 개별화되었던 부분들은 다시 구별 불가능해지고 문명은 서서히 쇠락의 수순을 밟아 간다.

문명사의 두번째 단계가 당대 유럽의 상황에 조응한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레온티예프뿐만 아니라 고전 슬라브주의자들도 유럽은 너무나 발달해서 이제 몰락밖에 갈 길이 안 남았다고 선언했고, 일부 유럽인들도 이에 깊이 공감을 표한 바 있다. 가령 후일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가 쓴 『서구의 몰락』은 대표적으로 이런 정조하에서 나타난 저술이다. 문제는 러시아는 그럼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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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슬라브주의자들과 달리, 레온티예프는 러시아 역시 화려한 복잡성의 단계에 도달해 있노라고 답한다. 따라서 유럽에 비해 현저히 ‘젊은’ 나라도 아니고, 그래서 더 희망찬 미래를 기다릴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이 ‘야생적’이고 ‘젊은’ 러시아의 역사 철학적 위상으로부터 다가올 발전의 이미지를 공상한 반면, 레온티예프는 “부패해 가는 러시아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이 상태에서 결빙시키는 것”이라고 대담하게 선포한다. 화려한 복잡성을 유지한 채 역사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소리인가?

유럽은 서로마 제국의 후예지만,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 곧 비잔틴 제국의 적통을 물려받았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멸망당한 후로 러시아는 제국의 정치적 정통성이 종교적 정통성과 더불어 러시아로 전해졌다는 이데올로기를 광범위하게 퍼뜨렸다. 레온티예프가 의지하던 지렛대가 바로 그것으로서, 러시아는 국가적 기원에 있어 서구와 전적으로 다르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문명사적 전개 역시 서구와는 다를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정치와 종교가 한데 결합되었던 비잔틴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를 통해 지지되었다. 게르만족의 압박 때문에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로마 제국은 더욱 견고한 정치·사회적 형태를 구축했으며, 확실한 신분적 구별은 그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고, 그로써 화려하게 발전된 비잔틴 문화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레온티예프식으로 말해 부분들(각 신분들)이 서로 구별되는 개별성을 획득함으로써 전체(제국)의 중흥을 달성한 셈이다. 비록 나중에는 세력을 잃고 지리멸렬해졌지만 비잔틴 제국의 사례는 레온티예프의 문명 발달 이론에 역사적이고 이념적인 전형을 제공했음에 틀림없다. 러시아 제국은 비잔틴의 역사를 배우고 자기의 원리로 삼아야 했다.

레온티예프가 볼 때 19세기 후반에 크게 발흥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평등주의 따위는 문명 발전의 마지막 단계를 예시하는 결정적인 징후에 다름 아니었다. 한 사회 내에서 구성원들이 아무런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은 서로 식별 불가능하게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귀족주의적 신념에 따르면 질서와 안정, 발전은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의 신분에 따라 상이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고전적 슬라브주의자들의 차별 없는 공동체주의는 한낱 헛된 미망이요, 사회의 현실적 구성 원리도 아니며, 미적인 이상은 더욱 될 수 없었다. 서구의 병폐로서 19세기의 사회 사상을 어떻게든 막아 내고, 러시아를 현재의 상태로 ‘결빙’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다닐레프스키의 범슬라브주의도 동일한 관점에서 비판받는다. 슬라브적 민족 기원을 공유하는 동슬라브인들을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모아서 서구와는 다른 (정치적) 문명 권역을 이루자는 범슬라브주의적 기획은, 같은 슬라브 민족 간에도 성립할 수밖에 없는 차이와 위계에 대한 무감각에서 비롯된 오해의 산물이었다. 슬라브 민족임에도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를 보면 알 수 있듯,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동유럽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서구화되어 있었고, 역사적 기원을 거론하며 억지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유럽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촉발된 범슬라브주의 운동이 필연코 도달하게 될 귀결은 결국 서구적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주장했던 비잔틴적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동유럽의 많은 슬라브 민족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불러내 통합하려는 범슬라브주의의 소망은 억압된 민족의 ‘해방’을 통해 결국 러시아에 ‘혁명’이란 파국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온티예프의 이런 입장은 당시 러시아 공식적 정치 동향에 상반되는 것이었다. 제국의 관료들은 동유럽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해 은근히 범슬라브주의 운동을 부추기고 있었고, 알렉산드르 2세는 ‘전 슬라브 민족의 연대’를 정책화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온티예프가 볼 때, 진실로 러시아 제국이 독자적인 문명 권역으로 ‘화려한 복잡성’의 단계를 구가하려면 ‘불필요한 곁가지 무리’로서 동슬라브인들을 냉정하게 쳐낼 필요가 있었다. 설사 그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해도, 그것은 러시아가 주변 제국들과 동등하게 겨룰 만큼 충분히 강력해진 다음에나 시도할 일이었다. 러시아는 섣불리 슬라브인들을 민족주의적 정치 강령으로 호출하지 말고 러시아 자체의 세력 확장에 집중해야 했다. 그 시작을 위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는 러시아의 정치적·종교적 기원인 콘스탄티노플의 수복이 필요했다. 출전을 불분명하게 남겨 둔 채, 레온티예프는 콘스탄티노플을 그 옛 이름인 ‘차르그라드’(‘차르의 도시’라는 뜻의 고대 러시아어)로 부르며 전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원칙주의적이며 비판적이던 그의 태도가 많은 동시대인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반감을 불러일으켰음은 당연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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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있던 콘스탄티노플, 레온티예프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차르그라드'라고 불렀다.

2010/12/24 09:22 2010/12/2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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