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생각하는 『지구화 시대의 정의』의 매력들


2010년의 키워드는 『정의란 무엇인가?』였던 것 같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나름의 답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책이었던 것이죠. 저는 이게 기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의’를 주제로 한 (그리 쉽지 않은) 한 권의 책이 한국 출판시장을 휩쓸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이 받은 관심에 비해 ‘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의미 있는 담론이 활발하게 형성된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정의가 그렇게나 규정하기 어려운 개념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보다는 도대체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는 질문이 더욱 시급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구화는 제한된 영토국가가 정의의 질문들을 다루는 데 적합한 틀이며 정의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생각, 즉 과거에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생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236쪽.)

이런 와중에 출간된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새로운 시각으로 정의 문제에 접근하는 책입니다.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고민할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라는, ‘틀’(frame)에 관한 물음을 던집니다. 그녀에게 정의란 동등한 참여입니다. ‘정의는 동등한 참여’라는 프레이저의 정의(定義)는 명료합니다. 그 단어에는 어떤 모호함도 없습니다(이 점이 정의를 정의하는 데 골몰하는 다른 정의론과 프레이저 정의론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대신 그녀에게 문제는 이 ‘동등한 참여’를 방해하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불평등들과 차별들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한 명의 주체로서 그런 불평등 · 차별을 겪지 않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정의로운 사회겠죠. 그렇다면 정의론은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도록 강제하는 질서(곧 부정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이론이 됩니다.
  오늘날 부정의의 양상을 드러내기 위해, 프레이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정의는 세 차원을 지닙니다. 내용, 당사자, 방법이 그 차원들입니다. 그런데 ‘지구화’ 시대에는, 이 세 차원 모두에서 쉽게 합의가 도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정의의 내용’을 보면, 이전에 정의 문제는 곧 ‘경제적 재분배’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동성애자·여성·타 인종 등등, 즉 통칭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종식하는 것도 중요한 정의 문제입니다. 이 두 문제가 상충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레이저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또 ‘정의의 당사자’와 관련해 보면, 예전에는 정의 문제는 한 국가의 ‘시민들’ 사이에서만 발생하고, 따라서 그 국가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국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부정의에만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인간이 초래한) 전 지구적 자연재해만 해도 그렇고, 그 외에 한미FTA나 얼마 전에 개최된 G20회의 등과 같은 초국적 협약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 삶에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은 점점 국경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정의의 당사자’도 한 국가의 시민으로만 한정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이처럼 프레이저의 정의론은 ‘지구화’라는 현실의 변화에 부응해 정의론도 자신을 혁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추상적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은 ‘정의’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정의를 규정하는 데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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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정의』의 원제는 'Scales of Justice'입니다. 이때 Scale은 '균형'과 '범위'를 뜻합니다. 지구화 시대에는 정의의 '균형'과 '범위' 모두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드러내는 의미라고 합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대략 이런 문제의식하에서 프레이저가 자신만의 독특한 정의론을 구축해 나가는 책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로서 저는 『지구화 시대의 정의』가 새롭고 흥미로운 주장들을 담고 있고, 그 주장들을 훌륭하게 논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내용뿐 아니라 다른 여러 면에서도 자극을 줄 만한 책입니다. 정의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그렇고, 문체가 그러하며, 이론에 대한 자세가 그렇습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저는 이 책을 읽는 게 너무 즐거워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이 책의 장점을 늘어놓곤 했고, 책이 나온 뒤에는 여러 명에게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배운 점, 이 책의 통찰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성찰하면서 우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도전이고, 무엇이 기회이고, 무엇이 위험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 내가 보기에 나의 작업은 이런 도전들의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러한 일이 단지 개인적인 작업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현재의 위기와 전망들을 명확히 해명할 수 있는 용어들과 개념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해방적인 사회적 투쟁들에 유용한 것으로 입증되는 몇몇 논증들을 정식화하거나 몇몇 개념적 자원들을 창조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비판이론에 쏟아 부은 시간들이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 259~260쪽.


우선,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이론적인 저작이지만, 그 이론적 틀은 전적으로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프레이저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사항보다는 ‘개념’과 ‘전체적인 이론적 구조’를 세공하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조는 현실에서 일어난 변화들, 새롭게 생겨난 부정의들을 성찰한 결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고전적 철학자들, 예컨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칸트처럼 한 번쯤 언급될 만한 인물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세계무역기구, 세계사회포럼, 사파티스타 운동, 초국적 기업, 신사회 운동 등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정의’ 개념을 탐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겠지만, 역으로 오늘날 부정의의 양상들을 우리에게 친숙한(더 정확하게는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례들로 설명하는 책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자신의 정의론이 ‘현실’이라는 지반 위에서 형성된 것임을 한순간도 망각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 사실을 개념들 속에 녹여 내기보다는 전면에 드러냅니다. 그녀가 구성한 개념들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각인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다음으로,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온전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정의론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의론’이 대체로 우리, 즉 평범한 사람들을 정의의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인상(혹은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기존 정의론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게임의 규칙’을 바꿔 나가는 일은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쉽게 말해 위정자들)의 역할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의론에서 ‘민주주의’에 관해 논의할 때도, ‘대의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목표로 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고요. 하지만 프레이저의 정의론은 보통 사람들을 ‘주체’로 대합니다(이는 앞서 언급한 ‘정의란 동등한 참여다’라는 정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녀는 우리가 좀더 많은 정의를 ‘수혜’받을 수 있도록 대의 민주주의를 더 합리적으로 만드는 방안을 고민하는 대신, 우리 자신이 직접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 방안을 고민합니다(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직접민주주의를 부르짖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란, 정의란 특별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주장을 우리는(적어도 저는) 자주 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프레이저의 책을 읽으면서 이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와 연관된 점으로, 프레이저는 국가의 정책만큼이나 사회운동을 중요시합니다. ‘지구화’ 시대에는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 모두가 심각한 도전을 받기 때문에, 기존처럼 정책이나 의회, 정상들 간의 협약만으로는 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나아가 그런 ‘제도적’ 행위들이 또 다른 부정의를 야기하기도 합니다(이를테면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거부함으로써). 이런 상황에서 정의론이 초국적 연대를 꾀하는 노동조합들, ‘대안지구화’를 추구하는 세계사회포럼, 다종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회복 운동 등에 주목(해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지구화 시대에는 정의의 내용과 당사자가 다양해지는 만큼,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도 다양해져야 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 주장 중 하나입니다.
  사회운동은 프레이저가 다른 정의론들을 평가할 때도 주요한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위르겐 하버마스나 리처드 로티 같은 선배 철학자들이 당대 ‘여성주의’ 운동의 의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그들 정의론의 한계였음을 지적합니다. 자신의 지적·정치적 경력을 여성주의에서 시작한 프레이저에게는 여성주의운동이 일종의 기준이 된 셈이죠. 물론 정의 문제를 고려할 때 항상 여성주의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여성주의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날 핵심적인 쟁점 중의 하나인 여성주의 문제를 포괄하지 못한다면, 그 정의론은 ‘이 시대’의 정의론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성주의 철학자이자 운동가이기도 한 프레이저의 정의론에는 권력에 맞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위해 싸우고, 의사결정 절차 속에 그들의 목소리까지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회운동이 중요한 차원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기존에 알고 있는 정의론과 프레이저의 정의론이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철학은 어렵다는 것이 통념이고,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읽어 본 대부분 철학책이 어렵기도 했고요. 하나의 철학이란 개념들로 지은 집과 같습니다. 현실의 문제에서 영감을 받은 철학저작도 그것이 추상적 개념들의 연쇄로 서술되면 어렵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프레이저는 그 개념들이 어떻게 현실의 변화에서 비롯되었고, 또 현실을 이해·변혁하는 데 그 개념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명시적으로 제시합니다. 그 개념들이 우리에게 쉽게 그리고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쉽게 읽히는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닙니다. 프레이저는 글을 매우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씁니다(이걸 글로 묘사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건 한편으론 그녀가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반 공중도 자신의 글을 읽고, 쉽게 이해하고, 자신의 주장에 공감하거나 비판하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프레이저의 글을 읽다 보면 ‘이건 아니지 않은가’라는 의구심이 들거나,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는 그녀가 자신에게 가해질 수 있는 반론, 자신의 이론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에 대한 도전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는 어려운 철학책,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 자체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 철학책에서는 받을 수 없었던 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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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미국 시민들. 프레이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대국과 거대한 기업들이 저지르는 초국적 부정의에 맞선 대중들의 저항운동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제가 생각한 이 책의 장점이 ‘이 책만의’ 장점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이제 와 밝히자면, 저는 정의론 관련 책들을 읽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훌륭한 정의론 저작이라면 많건 적건 이런 요건들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저의 자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가 과도하게 이 책을 감싼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지구화’에 몰입하는 그녀의 태도가 그렇게 신선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 혹은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감지하고는 있었던 것들을 이론적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이 책이 좋습니다.
  프레이저는 대단히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자신의 ‘다차원적 정의론’을 풀어 나갑니다. 그녀의 주장들과 논거들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녀의 주장이 시시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투쟁’이나 ‘적대’라는 단어에 비해 너무나 매끄러운 뉘앙스를 지닌 ‘정의’라는 단어(합리적 이성을 갖춘 주체들이 합당한 절차에 따라 담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는)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됐건 이 책이 고민할 가치가 있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과 답을 제시하는 방식이 좋기 때문에 저는 진심으로, 좀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편집부 김재훈

지구화 시대의 정의 - 10점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그린비
2011/01/17 09:00 2011/01/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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