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책하고 인사하실래요?'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님께서 써주셨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그린비 블로그를 위해 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시다니, "감동백배", "완소 고추장"입니다! ^^*
소개는 짧게 끊고 바로 본문으로 갈까요? "고추장"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 요기를 눌러주세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읽기 위하여
   - 1857년의 원고에 대한 네 가지 생각

-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하나. 새벽 4시의 운명 -1857년의 맑스를 생각하며

1857년, 맑스는 불타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도 어둠은 그 곁에 다가설 수 없었다. 1857년 12월 8일, 엥겔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대홍수 이전에 적어도 요강(Grundrisse)이나마 명확히 하기 위해 내 경제학 연구를 요약하느라 요즘 미친 사람처럼 밤새워 일하고 있네.” 혁명의 파도를 예감했던 그는 마음이 바빴다. 경제학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밑그림 형태로나마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보통 새벽 4시까지”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는 불과 9개월 만에 인쇄 전지 50장이나 되는 분량의 ‘요강’을 작성했다.

우리 곁에 있는 책,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하 『요강』)은 이렇게 태어났다. 엥겔스에게 보낸 그 편지 구절에서 제 이름도 얻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혁명의 대홍수보다 더 빨리 작성되어야 했던 원고. 『요강』은 겉 말뜻과는 달리 사유의 건축가가 여유를 갖고 그린 설계도라기보다는 사유의 전사가 출정을 준비하며 신속하게 그린 전략 지도에 가깝다. 즉 『요강』은 토대의 안정감보다는 속도의 긴장감이 지배하는 책이다.

그러나 맑스가 혁명에 쫓기고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혁명 앞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1857년 유럽에서 발발한 공황을 목격하고 그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썼다. “내 자신은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지만 이번 봉기 때문에 1849년 이래 가장 기분이 좋다네.” 일 년 전에는 이런 편지를 쓰기도 했다. “혁명은 이번처럼 멋진 따블라 라사(tabulo lasa, 순수상태)를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걸세.” 그의 아내 예니도 어느 편지에서 당시의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당신은 무어[까만 피부였던 맑스의 애칭]가 얼마나 기분 좋아하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예전 그가 가졌던 모든 작업 능력과 경쾌함이 맑고 유쾌한 정신과 더불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몇 작은 봉기들이 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는 몇 차례의 경련과 발작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건강을 회복했다. ‘새벽 4시의 운명’이라 불러야 할까. 맑스가 잠든 시간, 프롤레타리아는 생각처럼 빨리 깨어나지 않았다. 새벽녘 어슴푸레함이, 어떤 모호함이 『요강』을, 아니 맑스의 저작 전체를 감싸버렸다. 혁명을 기다리며 밤을 태웠던 운명의 원고들은, 계속 뒤쳐지기만 하는 아침을 기다리며 지금도 새벽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는 게 아닐까.


둘. 추론의 어려움과 가공의 어려움 -『요강』의 개방성

『요강』을 읽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때로는 중단되고, 때로는 비약하고, 또 때로는 옆길로 새는 원고. 홉스봄(E. Hobsbawm)은 『요강』의 원고를 “일종의 지적이고 개인적이며 종종 해독할 수 없는 속기”라고 불렀다. 무엇이 『요강』을 난해하게 만드는가. 오랫동안 주석가들은 그 난해함이 미숙함과 관련된 것이라 믿어왔다. 정돈되지 않은 사유, 일종의 혼동, 창조적 시도에서 불가피한 부분적 실패, 결국에는 『자본』에서 깨끗하게 해소될 여러 잡다한 것들이 『요강』의 독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요강』을 격찬한 경우에도 대부분은 그것이 『자본』을 낳은 징검다리로서, 즉 ‘위대한 발견의 역사’에 속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요강』을 읽어야 할 어떤 적극적 이유도 가질 수 없다. 문헌학적 관심에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요강』의 긍정적인 부분은 『자본』에 모두 편입되었으니 읽을 필요가 없고, 편입되지 못한 미숙한 부분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또한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네그리(A. Negri)는 『요강』의 많은 주석자들, 맑스의 경제적 사유의 형성을 다룬 이론가들이 ‘비맑스적인 역사편찬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의 불만은 아마도 맑스에 대한 목적론적 독해를 향했던 것 같다. 마치 부르주의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 역사를 기술하며, 전 역사가 자본주의를 준비해온 것처럼 말하듯, 맑스 저작들이 『자본』이라는 책의 완성을 위해 준비되어 온 것처럼 읽는다는 것이다. 시간의 뒤편에 서서 역사를 회고적으로(retrospective) 꿰어 맞추는 식이다. “이런 방법은 발생의 연속성, 관념의 발전에 만족할 뿐, 비약, 단절, 수준의 다원성, 실천의 긴급성 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맑스를 넘어선 맑스』)

그러면서 네그리는 『요강』의 독해가 어려운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았다. “어려움은 추론의 실제 내용보다는 원고의 형태, 가공하기 곤란한 특성에서 발생한다.” 추론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말 절묘한 지적이다. 마치 형상이라는 거푸집을 거부하는 질료처럼, 체계의 완성에 저항하는 텍스트!

연속을 끊어버리는 급작스런 비약과 단절, 단일 차원을 무너뜨리는 다양성과 다원성, 차분한 성찰이 아니라 신속한 성찰.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나 『자본』과 다른 『요강』의 특이성이 발견되어야 하는 곳은 거기가 아닐까. 다시 네그리의 설명을 빌리자면, “『요강』은 본질적으로 개방적인 저작이다. 방법의 영역에서 더 철저하게 증명되어야 하는 가설이 있을지라도 개방성이 『요강』을 특징짓는다.” 즉 『요강』의 경우, 개방성은 독해자에게 요구되는 태도이기 이전에 텍스트 자체가 독해자를 향해 취하는 태도인 셈이다.


셋. 투쟁으로서의 글쓰기 -『요강』이 드러낸 힘들의 평면

『요강』은 시간적으로는 틀림없이 맑스의 과거 작업과 미래 작업 사이에 있다. 그는 1840년대 중반 이래 경제학 연구를 지속해왔다. 특히 1849년 독일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이래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시민사회의 해부학은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철학 비판은 경제학 비판으로 변화했다. 당시 그는 정말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1850년 9월과 1851년 10월 사이에 그가 작성한 초록은 무려 52명의 경제학자들의 저서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요강』을 집필하기 전에 작성한 초록이 이미 수천 쪽에 달했다.

1850년대 초반에 맑스는 경제학에 대한 자기 입장을 정리했다. 비판의 무기들인 개념들도 이때 생겨났다. 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 사이에 ‘잉여가치’에 기초한 ‘자본’ 개념이, 그리고 엥겔스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추론컨대 50년대 초반에 리카도를 근본적으로 비판한 지대론과 화폐론이 만들어졌다. 맑스가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저서의 출간을 생각한 것은 이때였다.

1851년 4월 그는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5주 후에는 이놈의 경제학 전부를 청산할 수 있을 정도로 진척되었네. 이것이 마무리되면 나는 집에서 경제학의 초안을 작성하고 대영박물관에서 또 다른 과학에 몰두할 생각이네. 이제 경제학에 싫증이 나기 시작해. 기본적으로 이 학문은 종종 극단적으로 미묘한 특수 문제들에 대한 고찰이 아무리 많다 해도, 스미스와 리카도 이후로는 어떤 진전도 보지 못했다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출판 계획 자체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는 1857년의 공황이 왔다. 『요강』의 독일어판 편집자의 말처럼 맑스가 “새로운 혁명적 약진을 기대하며 ... 노동자들을 가능한 한 빨리 경제 지식으로 무장시키고, 계급의식을 강화하며, 그들 계급의 새로운 역사적 과업의 파악을 돕도록 자신의 경제 이론을 마무리하는 것을 자기 의무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무기의 비판가인 프롤레타리아에게 비판의 무기를 제공하길 바랐는지 아니면 그 자신이 비판의 무기를 들고 무기의 비판에 나서려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상황을 관찰하는 학자이기보다 상황에 개입하려는 사상가였다는 사실이다. 『요강』에서 이루어진 비판은 관찰의 과학이 아니라 개입의 과학, 당파적 과학이다. 그의 ‘투쟁을 위한 글쓰기’는 ‘투쟁으로서의 글쓰기’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어떤 글쓰기도 투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런 글쓰기가 『자본』과는 다른 색채를 『요강』에 부여한다. 어떤 이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없다.”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자본에는 자본의 운동이 있을 뿐, 혁명과 계급투쟁이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요강』은 『자본』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지평이 어디인지, 자본의 운동이 이루어지는 장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경제학, 더 나아가 과학이 근거하고 있는 장(field)에는 강력한 계급투쟁의 전하가 흐르고 있다. 과학이 근거하고 있는 곳은 어떤 확고한 근거도 불가능한 힘들의 장, 투쟁의 장이다. 근거 밑에는 근거가 없다! 맑스의 ‘경제학 비판’은 경제학이 의존하고 있는 경제학의 외부, 힘들의 장, 계급투쟁의 장을 드러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요강』은 『자본』을 달리 읽게 한다. 『요강』의 맑스는 『자본』의 맑스가 보여준 자본의 변증법, 자본의 운동이 단순한 논리적 전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이탈적 힘에 대한 힘겨운 투쟁의 결과임을 알게 해준다. 논리학은 힘들의 장에서 자본이 거둔 일정한 승리를 치장하는 언어학일 뿐이다. 그러나 힘들, 권력들, 계급투쟁의 성패는 매 순간 개방되어 있다. 힘들에 대한 개방은 승패를 항상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자본이 가리키는 방향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나가려는 힘들의 도전은 영원히 계속된다. 『요강』은 이러한 힘들의 불안정한 평면, 모든 과학이 근거하는 이 불안정한 평면에 대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은 이 평면 위에 올려져 있다.


넷. 문명화된 맑스와 야만스러운 맑스 -『요강』을 마저 쓴다는 것

시간 순서에 대한 목적론적 편견 때문에 사람들은 『요강』을 『자본』을 위한 준비라고 쉽게 말해왔다. 실제로도 『요강』과 『자본』의 구성은 언뜻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강』은 자본의 생산과정을 검토하고(제1편), 자본의 유통과정(제2편)을 다루며, 그 후에 이자, 이윤(제3편) 등을 다루는데, 이는 자본의 1권에서 3권에 이르는 순서와 완전히 상응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세하게 검토해보면 두 저작의 내용 구성은 적지 않은 편차를 보인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로스돌스키(R. Rosdolsky)의 저명한 연구(『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를 참조할 수 있다. 그는 『요강』과 『자본』을 비교하면서 맑스가 당시 작성했던 개요들을 끌어들이는데, 특히 1857년의 개요는 두 저작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1857년의 개요에서 맑스는 총 6개의 부를 구상했는데, 제1부는 자본, 제2부는 토지소유, 제3부는 임금노동, 제4부는 국가, 제5부는 외국무역, 제6부는 세계시장이었다.

이 구상에 따르면 『요강』은 제1부인 자본에 관한 기술인 셈이고 나머지 부들은 집필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은 자본에 관해 다루면서, 1857년 개요의 제2부인 토지소유와 제3부인 임금노동까지 포괄하고 있다. 토지는 『자본』의 3권의 지대편에서, 임금노동은 1권의 임금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따라서 1857년의 개요에서 1부에 해당하는 것을 ‘자본’에 관한 논의로 묶은 『요강』과 그 개요에서 1-3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자본’에 관한 논의로 묶은 『자본』의 실제 편제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맑스는 『요강』을 집필할 당시에 작성한 개요의 제4부에서 제6부에 이르는, 국가, 외국무역, 세계시장에 관한 논의는 『자본』에서도 다루지 못한 채 기약 없는 후속작업으로 넘겨 버렸다.

하지만 로스돌스키의 문헌학적 성취를 존중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과연 1857년의 개요에서 맑스가 쓰고자 했던 ‘임금’이나 ‘토지소유’에 관한 내용들이 『자본』에 담긴 그 내용일까. 네그리가 지적했듯이, 『요강』을 집필하던 당시의 맑스가 ‘임금’에 관한 부분을 쓰기 위해 모아두었던 자료의 일부가 『자본』의 임금편에 들어갔다고 해서, 맑스가 구성한 ‘임금노동’에 관한 책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자본』 1권에서 임금은 한편으로 자본의 한 차원이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과 재생산의 추동력 역할을 한다.” 즉 『자본』에서 임금은 자본의 논리가 구축되는 한 계기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노동일에 대한 투쟁의 긴 기록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본의 논리 바깥에서 삽입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요강』에서 임금은 자본으로부터 이탈하는 적대적 주체의 집합적 형성, 즉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산출과 깊이 관계한다. 『요강』에는 자본으로부터 이탈하는 힘들, 자본이 제 논리를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포획하는 그 힘들의 운동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자본을 가능케 하는 힘은 자본을 불가능케 하는 힘들을 불러옴으로써만 작동한다는 역설, 자본을 매번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고 가는 힘들의 존재를 『요강』은 분명히 확인시켜준다. 『자본』이 자본이라는 독사(doxa)의 지배만을 보여준다면, 『요강』은 모든 ‘독사’가 사실은 ‘파라-독사(para-doxa)’를 수반한다는 것, 더 나아가 두 힘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파라-독사’가 더 근본적임을 보여준다.

로스돌스키의 해석을 따르면 『자본』은 1857년에 썼던 원고인 『요강』은 물론이고, 당시 쓰려했던 원고의 일부(임금노동과 토지소유)를 포괄한다. 즉 『자본』이 『요강』보다 방대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당해 보인다. 즉 『자본』에 드러난 것은 대체로 하나의 방향 뿐이라고. 그 점에서 『자본』이야말로 『요강』의 일부분이라고. 즉 『자본』은 『요강』이 드러낸 투쟁하는 힘들의 바다 위에서 구축된, 자본의 지배 논리에 대한 폭로라고.

우리는 맑스가 1857년에 쓰고자 했던 부분, 『자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이 비단 국가, 외국무역, 세계시장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다루지 못한 주제들을 채워 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가 쓰고자 했던 부분, 그러나 충분히 써지지 않은 부분, 우리가 마저 써야 하는 부분은, 자본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들에 대해서이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들, 힘들이 나아갈 다른 방향에 대한 발명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써나가야 할 부분이다.

아마도 『자본』을 완성태로 놓고 있는 사람들은 『요강』의 여러 절들에서 온갖 미숙함을 발견할 것이다. 가령 「자본주의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에서는 조잡하고 유기체적인 역사발전론을 목격할 것이고, 기계 발전에 대한 단상을 담은 「고정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 같은 곳에서는 인간주의의 잔재를 발견할 것이다. 실재로 꽤 많은 이론가들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앞글은 조잡한 역사 발전 단계론이기는커녕 사회형태가 구성요소의 배치에 따라 얼마나 상이한 형태를 띠는지, 역사 발전에 얼마나 다양한 계열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뒷글은 창조적이고 협력적인 일반지성의 문제를 포착하게 한다. 물론 이 글들은 기존 맑스주의의 역사이론이나 노동가치론을 뒤흔들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요강』의 힘이고, 맑스가 책의 제목에 즐겨 사용했던 ‘비판’이라는 말이 갖는 참된 의미이다. 그는 1843년의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실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 여기서 무자비하다는 것은 그 비판이 도달할 결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존재하는 힘들의 투쟁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위험을 무릅쓰고 힘들의 투쟁에 들어가는 일, 힘들의 반대 방향을 읽고 또한 발명하는 일. 『요강』을 마저 쓴다는 것은 그런 일이 되어야 한다. 강단에서 논리학을 풀고 있는 세련된 맑스, 문명화된 맑스가 아니라, 길거리의 먼지를 뒤집어 쓴 맑스, 진리의 힘 이전에 힘의 진리를 내세우는 야만스러운 맑스. 『요강』을 마저 쓰는 자는 바로 그런 맑스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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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크리티컬 컬렉션 01
칼 맑스 지음, 김호균 옮김 | 도서출판 그린비 | 갈래 : 인문, 경제

ISBN(13) : 978-89-7682-704-3 (1권), 978-89-7682-703-6(세트)
2판 1쇄 발행일 : 2007년 10월 30일 | 신국판 양장 | 4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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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7 14:16 2007/12/1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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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책]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Justice)

    Tracked from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mple Life 2011/10/14 18:19  삭제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정의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정의란 무엇인가?세 달 전.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물었습니다."달리는 기차 앞에 다섯 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어.""브레이크는 고장 났지. 그대로 달리면 다섯 명이 죽고. 잽싸게 다른 철로로 방향을 튼다면 한 명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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