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레온티예프와 러시아 비잔틴주의(2)
최진석(수유너머 N)

‘슬라브족’ (Slavic)이라는 민족적 실체와 ‘정교’(Orthodox)라는 종교·문화적 정체성, 마지막으로 ‘제국’(Empire)이라는 국가 체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란 질문은 슬라브주의자들이 안고 있던 가장 중요하고도 절박한 문제였다. 민족/민중과 종교, 국가의 삼항 구조는 그 대리 표상들을 교체해 가면서 여러 가지 조합들을 만들어 냈는데, 가령 19세기 전반부에 교육부 장관이던 세르게이 우바로프가 ‘전제 정치-정교-민중’의 삼항일조를 러시아 제국의 국기(國基)로 제시했던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악명 높은 우바로프의 도식은 체제 수호의 목적을 위해 전제정을 중심으로 다른 두 요소들을 묶어 놓은 것이었고, ‘관제 국민주의/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의 대표적인 모델로 자주 거론된다.


한편, 키레예프스키와 호먀코프, 악사코프 등의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은 이상화된 민중의 이미지를 통해 다른 두 요소를 통합하려 한 경우로 볼 수 있다. 특히 국가라는 요소, 즉 차르의 전제주의는 그들에게 가부장적 모델로 전환되어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국가의 표상은 한 가족의 가장, 아버지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백성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자식들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이때 아버지는 무섭고 엄격하기보다는 모성적 사랑의 구현자로 나타나며, 따라서 이 모델은 ‘자애로운 아버지(황제)-신실한 자식(민중)’이라는 틀 속에서 실현되어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군주를 가장에 비유하는 가부장적 모델은 유럽의 봉건 제국에서는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지만, 군주를 자애와 사랑의 모성적 대리인으로 표상하는 것, 아버지-어머니로서의 군주라는 양성적(兩性的) 모델은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국가와 법, 제도의 수호자인 부성적 군주를 땅과 조국 등 전통적인 모성성의 상관물에 결합해 놓은 형상이었고, 궁극적으로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더욱 단단히 결속시키는 모델이었다. 군주가 단지 엄격한 아버지이기만 하다면 그는 타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군주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띤다면 저항은 곤란해진다. 모성에 대한 사랑이 민중들의 적대심을 완화시키는 탓이다. 프로이트가 『모세와 일신교』(1939)에서 진술했듯, 부성적인 주권자만이 타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이 러시아 민중에 대한 압살 기구로 전제주의를 지목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민중을 구원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차르에게 기대를 걸 수 있던 것도 바로 이런 양성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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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비, 「유형수들의 휴식」 _ 시베리아를 향하는 죄수들의 행렬. 그 틈에서 오른쪽 간수는 수레에 있는 죄수의 반지를 훔치고 있다.

이제 슬라브주의의 계보에서 출발했으면서도 격렬한 이탈선을 그으며 독자적인 사상의 움을 텄던 레온티예프에게 돌아가 보자. 문명과 역사, 국가와 문화/종교에 대한 그의 사유를 집대성하여 보여 주는 글은 1875년작 『비잔틴주의와 슬라브주의』(
Vizantizm i slavyanstvo)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문명의 3단계설이 조목조목 피력되는 글이기도 하거니와, 앞서 살펴본 국가-민족-종교의 삼항 구조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 조합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글이 이것이다.

레온티예프가 보기에 비잔틴 제국의 최대 장점은 엄격하고 명료한 신정 국가적 구조, 그 체계였다. 물론 비교의 대상은 가톨릭과 신교, 봉건주의와 근대 헌정 체제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서유럽이다. 서구에 대해 비잔틴 제국은 국가적·종교적·도덕적 면에서 철저히 구별될 수 있다. 첫째, 국가적인 면에서 비잔틴주의는 신권과 왕권이 결합한 전제주의를 내세웠고, 이는 오늘날 러시아 제국에 그대로 유습되어 남아 있다. 둘째, 종교적인 면에서 비잔틴주의는 정교라는 단일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처럼 역사적 분열을 알지 못했다. 모스크바의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수직 배열된 러시아 정교도 역시 단일한 신앙 체계를 갖는다(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른데, 러시아 교회 역시 17세기에 구교와 신교로 나뉘는 대분열을 겪었다. 하지만 구교도들은 정치적 투쟁에서 패배한 후 제도로부터 완전히 추방되어 지방에서 비밀스럽게 잔존하였기에 서구의 신·구교도와 같은 양립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특징은 도덕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곧 정치·문화적 이상의 문제에 해당된다. 비잔틴 제국의 도덕적 이상은 근대 서구처럼 인간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비잔틴주의의 도덕적 이상이란 인간의 개성 및 온갖 지상(地上)의 행복, 인간 능력과 가치에 대한 여하한 확신에 대해서도 철저한 환멸을 감추지 않는 데 있었다. 현실의 삶, 모든 인간적인 가치는 부질없다. 천상의 삶에 비할 때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이념적 가치 따위는 오만이며 독선이고 비도덕적이다!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 가치를 내버려라! 내세의 삶을 중시하는 기독교적 추구로 볼 수 있지만, 그 논리적 귀결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적 가치’라고 매도되는 근대의 정치적 이념들, 민족주의/국민주의, 민주주의 등 역시 무의미하고 추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배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민족주의/국민주의의 이념, 곧 한 민족 안에서의 동등한 평등과 자유라는 테제는 이렇게 기각된다. 레온티예프는 말한다. “우리는 비잔틴주의가 민족들 모두의 보편적 평안에 대한 어떤 희망도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상에서의 보편적 평등, 보편적 자유, 보편적 완성 그리고 보편적 만족이란 측면에서의 인류 보편성의 이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反)테제이다.”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은 서구에 러시아를 맞세우고, 러시아의 통일성을 다시 이룩하기 위해 가족 모델에 쉽게 의존했다. 예컨대 부모인 군주, 그의 자식들인 백성들이란 설정이 그렇다. 보수적인 국가 이데올로기로 손쉽게 전용되기도 했던 이런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감춰진 조건은 군주에 모성의 이미지를 결부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레온티예프는 이 모델로부터 과감히 모성을 제거해 버리고, 나아가 부성마저도 그 의미를 탈각시켜 버리라고 요구한다. 혈통 관계에 근거한 가족주의의 비유는 군주와 백성의 연대를 단단히 맺어 놓는 게 아니라 역으로 국체의 기반을 뒤흔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형제간의 평등한 결연에 근거한 사상은 궁극적으로 19세기 유럽을 진동시킨 민족주의/국민주의의 회오리에 연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체제는 혈통이나 가족의 비유를 거부해야 하고, 불가피하게 사용한다 해도 매우 미약한 정도에서만 허락해야 할 것이다. “혈통에 관한 정서는 다른 민족들보다 우리에게 더욱 약하게 나타났다. 귀족 정치의 원리 속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역사는 우리의 혈통 정서의 모든 힘을 국가 권력, 군주 체제, 황제 체제 위로 옮겨다 주었다.”


레온티예프에게 민족도 종교도 다 함께 포괄하여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틀은 국가였다. 그래서 ‘전제주의 제국 러시아’(국가)는 ‘정교 러시아’(종교)나 ‘슬라브족의 러시아’(민족)보다 더 선차적이고 확고한 원칙이 되어야 했다. 이로써 레온티예프의 내셔널리즘은 민족주의도 국민주의도 아닌, 국가주의임이 명확해진다. 슬라브주의 선배들이 민중이라는 이상화된 타자를 통해 국가와 종교를 아우르려고 했다면, 레온티예프는 국가(전제주의)를 매개로 종교와 민중/민족을 결속시키고자 했던 것. 사회가 국가에 역점을 두고 조직될 때, 민중의 삶도 그 종교적 내용도 내·외적인 부침에 변함없이 보전될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이 한 나라가 정상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기간을 훌쩍 넘어 무려 천 년이나 유지되었던 원인도 그것이다. “이 전제 권력은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런 것이었기에, 교회가 세례를 주고 성유를 발라 준 전제 군주들의 권력하에서 비잔틴은 서구의 이교도 국가인 로마보다 천백 년 이상, 즉 민족들이 국가를 이루어 살았던 가장 오랜 시기에 맞먹는 기간만큼을 더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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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_ 종교가 삶에 큰 영향력을 미치던 러시아, 레온티예프는 민족과 종교를 포괄할 수 있는 틀이 '국가'라고 생각했다. 

국가를 존폐의 위기에 빠뜨리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섣불리 평등과 자유를 외치며 섬세하게 구분된 위계를 교란하는 행위였다. 즉, 섬세하게 분할되고 조직된 사회구조를 어지럽히고 각자에게 배분된 자리를 교란시키는 것,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을 서로 구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절대악에 다름 아니다. 이에 맞서 전제주의 정치는 오직 소수의 허락된 자들, 즉 군주와 대귀족들이 전담하고 나머지 사회 신분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직분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레온티예프는 민주주의를 표방한 헌법이 러시아에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외침(外侵)이나 반란보다도 무서운 일이라고 공공연히 단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기반을 가장 안전하게 보전하는 길은 백성들이 정치에 관심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들이 제한되면 제한될수록 그 정치는 견고해지고 의사 결정은 명료해지며 정치적 불안정성이 해소될 수 있다.


이토록 괴팍하고 반동적인 인물이 어째서 러시아 문화 지성사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실제로 레온티예프는 동시대인들에게 별다른 호감을 주지 못했으며, 현실 정치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더구나 소련 시대에는 철저한 반동 사상가의 하나로 지목되면서 거의 모든 저작들이 금서 판정을 받았고 그라는 인물의 존재 사실조차 희미하게 잊혀져 갔던 것이다. 레온티예프의 저서들이 다시 출판되고 읽히기 시작한 것은 소련이 해체되고 난 이후의 일인데(현재 총 12권 규모의 방대한 레온티예프 저작집이 발행 중이다), 러시아 민족주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조명 붐과 더불어 “민주적 헌법이 들어서는 날 러시아는 패망하고 말 것”이라는 악의 어린, 그러나 적중한(?) 예언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을 법하다.


레온티예프의 진가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한편으로, 그는 비잔틴과 러시아의 역사적·문화적 연결 고리를 복원하고자 했으며, 동시대의 사상가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던 비잔틴주의를 사유의 무대로 적극 끌어올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국가-종교-민중의 삼항 구조에서 국가를 사유의 지반으로 삼았다. 외교관으로 일한 적이 있었음에도, 사상의 문제에서 레온티예프는 우바로프처럼 국정 운영자나 입안자의 위치에 있진 않았다. 그를 국가주의자라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결코 관제 사상가였다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말년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가족을 버리고 운둔 생활을 함으로써, 비잔틴의 ‘비인간주의적’ 도덕을 실천했던 셈이다. 한마디로, 레온티예프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국가주의의 이념인(理念人)이었으며, 동시에 국가조차도 돌보지 않던 국가주의의 고독한 파수꾼으로 사라져 갔다.


2011/01/24 09:54 2011/01/24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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