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화 시대에 필요한 다차원적 정의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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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당시 '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고등학생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을 찾고 있을까?

‘정의’는 시대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김원식 선생님 인터뷰 중에 ‘정의’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씀하는데, 당시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국가의 목표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정의란 무엇일까’하는 질문은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는데, 계속 정의를 이야기한다는 점은 한편으로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내 생애에서 지금처럼 암울한 시기를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1960년대나 1970년대와는 당연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현재 나는 낙관주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집단 행동의 문제들을 극복하는 순간들에 의해서, 즉 그들이 규칙을 새로 쓰고 게임을 변화시켜 나갈 때 역사가 단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완전한 정의는 아닐 것이고 과거와 약간은 다르지만 불완전한 질서일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정의롭지 못한 배제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의 성취였습니다. 역사적인 지혜 덕택에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있는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변경시킴으로써 그러한 부정의들을 다시 한 번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258~259쪽  
불변의 정의는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저는 정의도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의와 부정의를 판단하는 척도는 시대 상황과 조건에 따라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시대의 척도가 어떤 것을 정의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왜 정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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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 김원식

국가안보전략연구소(INSS) 연구위원, 서울여자대학교 강사.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 「계몽의 자기파괴와 의사소통 이성」(2002)을 썼고, 이후 「인권의 근거: 후쿠야마와 하버마스의 경우」(2007), 「근대성의 역설과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전개」(2007), 「다중(Multitude)이론의 비판적 검토』(2008), 「인정과 재분배」(2009), 「생활세계 식민화론의 재구성: 배제, 물화, 무시」(2009), 「한국사회 갈등구조와 민주적 연대」(2010)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공저로 『한중일 시민사회를 말한다』(이학사, 2006), 『이성의 다양한 목소리』(철학과현실사, 2009),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옹기장이, 2010) 등이 있으며, 『이성의 힘』(동과서, 2000), 『하버마스와 현대사회』(동과서, 2007)를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주된 관심은 한국사회를 위한 종합적 사회비판 이론을 모색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해 사회철학의 최근 논의들을 폭넓게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1. 낸시 프레이저는 20~30년 전부터 활발히 활동했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책이기도 한데, 낸시 프레이저가 어떤 관심사 속에서 작업해 왔고, 어떤 문제들을 다루어 왔는지 궁금합니다.
프레이저는 1947년생으로, 글을 활발하게 발표한 시기는 주로 1980년대 초반입니다. 발표된 글을 통해 프레이저의 논의지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는 여성주의 논의입니다. 여성주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국내에서 단편적으로 소개되기도 했지요. 프레이저는 여성주의 논의에서도 계급 정치나 분배 문제가 중요하다는 시각을 가지고 여성주의를 민주주의 전반의 문제와 연결시켜 논의한다는 데서 독특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프레이저가 현대 비판이론 논의에 계속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리처드 로티를 다뤘던 글이 많고, 하버마스 이론에 많은 개입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푸코의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폭넓은 논의들을 해왔는데, 제가 보기에는 하버마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프레이저는 공적/사적 영역을 구별한 하버마스의 구별이 남성주의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가사노동, 육아 등은 사적인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영역의 논의에서 배제된다는 것이죠. 프레이저는 이렇게 여성의 시각을 가지고 사회 이론 논의들에 작업하는 작업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두 차원의 논의를 다루면서 문제들을 후기 자본주의, 지금 현재의 시대 상황들과 연결시키면서 종합적으로 포착해보려는 노력을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진행해왔던 것 같습니다.

2. 낸시 프레이저의 이론을 공부하고 번역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인지요?
저는 한국 사회의 기본 갈등, 기본 부정의(不正義) 구조를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0년도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한국 사회의 갈등이 세 가지의 축을 가지고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우선은 경제적 배제의 문제입니다. 비정규직의 확대, 청년 실업 증대들을 생각하면 이 부분은 쉽게 연결되죠. 또 한 축은 문화적 무시의 문제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자가 증대하고 자발적 소수자들도 증대하면서 이런 차이나는 존재, 즉 소수자들에 대한 무시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삶이 상당히 물화(物化)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쟁 논리나 시장 논리가 심화되면서, 효율성만 추구하는 획일적인 삶의 방식들을 둘러싸고 사회의 갈등 구조들이 다층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배제의 문제, 분배의 문제와 문화적 무시의 문제, 무시와 인정의 문제들을 어떻게 사회 이론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와중에 낸시 프레이저의 『재분배인가 인정인가』를 접하게 되었고 재분배와 인정에 관한 논쟁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경제적 배제의 문제, 계급 정치의 문제, 문화적 무시의 문제들이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데 시사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에 그린비출판사와 인연이 되어서 『지구화 시대의 정의』라는 책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3. 낸시 프레이저는 경제, 문화, 정치의 세 가지 차원에서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문화적 인정과 정치적 대표 문제는 생소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데, 이 두 차원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요?
쉽게 얘기하면, 출발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억울함부터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들, 사회적 부정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고통들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분석해 보는 거죠. 분석하다보면 정치·경제·문화 이런 분화된 삶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하나지만 그 현실의 요소를 분석적으로 구별해볼 수 있겠죠. 프레이저는 우리가 당하고 겪고 있는 사회의 부정의 혹은 고통을 세 가지 차원으로 구별하고, 세 차원의 정의관을 제시합니다.

프레이저는 정치, 경제, 문화 세 차원의 부정의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지만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 없으면 무시받죠, 무시받아서 돈도 못 벌고, 그러면 당연히 그런 사람들을 정치적 대표로 뽑아주지 않는다는 거죠. 이게 다 서로 연결되고 겹쳐 있긴 한데 이 세 가지의 사회적 부정의가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거예요. 프레이저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이렇듯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사회적 부정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적 영역에서는 시장의 논리와 구별되는 차원의 제도화된 인정/무시질서가 있다는 것이죠. 한국 사회에서는 학벌주의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대학에 나와야 인정해주고, 그 이외의 대학은 인정 안 해주고, 지방에 있는 대학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이런 인정질서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동성애자가 부자일 수도 있죠. 그래도 무시받고 혐오받는, 경제적인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가치화된 의미질서에 따라서 무시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정치적 영역에서는 기본적으로 대표 불능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예로 들면 정당체제가 시민들의 새로운 욕구를 전혀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구나 의사를 대변해주지 않으니까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거죠. 보수정당 체제로 인해 새로운 의사 표명이 되지 못하는 점, 이런 경우들을 정치적 부정의로 볼 수 있습니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정치적 부정의가 개별 국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구적 단위에서도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국민국가의 틀에서만 이야기하다보면 빈곤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자신들에게 분배해달라는 요구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빈곤한 국가의 경우에는 영향력이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아예 틀에서 배제가 되는 거죠.

프레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부정의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만, 그러한 부정의들은 상당히 다층화되었고 서로 환원될 수 없을 정도로 나름의 독자성을 가지고 사회적 부정의들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선생님께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약간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이 책 표지에 보면 하버드 대학의 강의실과 미국대학의 교수가 나오는데 제가 싫어하는 것들이기도 하고, 인문학 책 중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광고하는 건 처음 봤거든요. 사람들이 그 책에 관심을 갖고, 주변에서 읽는 걸 보면서 읽는 사람들의 이면에 사회 정의에 대한 욕구 같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도 있지만 그것을 이론적으로 성찰해 보려는 문화적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정의를 하나의 규범이나 이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뭔가 고민하려는 것은 큰 변화인 것 같습니다. 정부도 공정사회를 모토로 가지고 나오고, 이것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과 연관되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회 정의에 대한 민심의 흐름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요즘 제가 관심 있게 보는 것은 복지국가 담론인데, 향후 선거에서 복지국가 프레임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이런 식의 흐름들은 바람직한 틀의 설정을 위한 논의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중요하고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5.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악셀 호네트 교수와 낸시 프레이저 사이의 논쟁을 담은, 2003년에 발간된 『재분배인가 인정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계급 정치냐 정체성 정치냐, 재분배냐 인정이냐 하는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현대 사회의 쟁점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에 관한 중요한 저서죠. 이 책에는 『지구화 시대의 정의』에서 프레이저가 이야기하는 논의의 틀이 형성되고 확정되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재분배인가 인정인가』 에서는 ‘재분배’와 ‘인정’을 둘러싼 논쟁에 한정되었다면,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국민국가 너머의 프레임을 제시하는 문제들이 보완되어서 형성된 것입니다.

『재분배인가 인정인가』는 현대 사회철학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 상황들을 상당히 전반적으로 균형 있게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구화 문제, 지구화에 따른 사회 부정의나 사회 갈등이 다양화 되고 다층화 된다는 문제들을 우리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접근해야 되는지 포괄적으로 다뤄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이번 책을 번역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 - 10점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그린비
2011/02/18 09:00 2011/02/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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