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사구체논쟁이 진행될 때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한국사회의 주요 과제가 '변혁'이라는 점에 동의를 했지만, 이것은 핵심적 내용과 운동노선의 설정을 둘러싸고 입장이 나뉩니다. 한국사회가 식민지반(半)자본주의인가, 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로 견해가 구분되었고,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경제성장 결과로 발생하는 계급적 분화에 주목하였습니다. 한국사회의 상황을 외세 지배하에 있다고 보는 관점,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사구체논쟁 내에서는 역사학자들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에 공명하는 학자들의 문제제기였습니다."
— 「정근식과의 인터뷰」,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54~55쪽

사구체논쟁은 뭘까, 이 문단을 읽으며 제가 새삼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찾아보니 '사구체'가 '사회구성체'의 줄임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구성체'란 맑스가 사용했던 단어 Gesellschaftsformation의 번역어다. 독일어 Gesllschft는 '사회'(society)에 해당되고, 영어 단어와 똑같은 철자의 Formation은 '형식'이나 '형태'를 뜻하는 Form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을 뜻한다. '형성물', '형성체'란 뜻인데, 형성과 비슷한 의미에서 '구성물', '구성체'로 번역되기도 한다. 직접적인 단어 그대로 '사회구성체'란 사회를 하나의 형성물, 구성물로 보는 입장을 표현한다. 사회란 동적인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형태로 구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 이진경, 「편집자 서문」, 『부커진 R 2』,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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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11일, 경찰에 맞서 화염병을 들고 싸우는 학생들

최근에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월급쟁이인지라, 따지고 보면 부르주아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에 가깝습니다. 노동자일 뿐 아니라 혁명 의지를 가진 부르주아지의 대항 세력, 이것이 제가 『공산당 선언』을 읽은 후 떠올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습입니다.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이냐 도시 노동자냐 하는 질문을 다시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과연 지금도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에 대한 의지가 많은 계급이라고 본다면,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닙니다. 회사에 다니고, 지금 생활이 만족스럽기 때문에 굳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면 평온한 지금이 뒤엉킬 수 있겠죠.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냐? 그건 또 아닙니다. 돈의 축적에 대한 별다른 욕심도 없습니다. 돈이 생기면 있는 만큼 쓰고, 없으면 안 쓰는 거죠.
  그럼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지금 새삼스레 '사회구성체론'이라는 오래된 명칭을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성격'에 대해 다시 묻는 것은 이런 조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 아니 20여 년 동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묻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의 삶이, 그리고 그 삶을 직조하고 추동하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20년 전 우리가 갖고 있던 이론적 틀에 우리가 사회를, 우리의 삶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고, 우리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세계를 통해 우리가 보는 방식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만능의 이론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 이진경, 「유연성의 축적체제와 시뮬라르크 자본주의」,『부커진 R 2』, 75~76쪽

'프롤레타리아도 아니고 부르주아도 아닌 내 정체는 뭐지?' 하는 의문은 '지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원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통장의 잔고를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잔고가 계속 변하고 너무 많기 때문에 모르는 경우),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과 집을 빌려 사는 사람, 사회 지도층과 지도층이 아닌 사람 등등. 소유한 '돈'의 양과 버는 방식만으로도 무척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정규직이면서 집을 빌려 살고, 통장의 잔고가 계속 변하는 등 딱 잘라 어떤 성격의 구성원이라 말할 수 없는 삶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경제적 패러다임이 이렇게 바람직한 것도 아니며 또 미래의 전망도 불확실한 것이라면, 지금이 바로 아주 근본적인 문제부터 다시 고찰하기 시작할 때이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으로 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그것들이 거꾸로 뒤집히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질문들과 진지하게 부딪칠 때에만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인생관과 가치를 얻을 수 있다.
— 홍기빈,『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 2001, 164쪽

사구체논쟁을 읽으며, 이 사건이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지 않고 다시 새로운 질문이 되어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을 날카롭게 통찰하는 '다른 활동'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활동들이 모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맑스의 선언문에 가슴이 뛰었지만, 그것이 제 생활과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간극을 줄여간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라는 말 속 '프롤레타리아트'에 제 이름을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름은 맑스가 불러 낸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다른 새로운 이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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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한 짝의 구두> _ 목사가 되려던 고흐는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목사의 길을 포기했다고 한다. 고흐는 구겨진 낡은 신발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 웹기획팀 이민정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 10점
김항.이혜령 기획,인터뷰,정리/그린비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 10점
홍기빈 지음/책세상
2011/02/28 09:00 2011/0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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