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부름에 응답하기

재분배하려는 욕망은 잘 먹고사는 사회에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이 생겨나는 그런 결과가 아니다. 재분배의 욕망을 교육의 문화적 명령에 의해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독자는 그 내부에 압축된 모든 계보학적 노선과 더불어, “권리”의 반대를 “잘못”에만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 독자는 “권리”의 또 다른 반대어가 책임이며, 그러한 책임의 가능성은 권리에서 파생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책임은 자아 안에 자리한 우월성을 인식하는 데서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부름으로서 의식에 앞서 감지되는 것이다. …… 우리가 원할 수밖에 없는 게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어느 것도 타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가야트리 스피박, 『다른 여러 아시아』, 울력, 2011, 45~52쪽)

얼마 전 출간된 『다른 여러 아시아』에 실린 한 글에서 가야트리 스피박은 ‘타자’ 혹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매우 어렵지만 한편으론 대단히 감동적인 이 글은 지식을 전달해 주기보단 나에 관해 반성하도록 자극을 줍니다.
  이 글을 읽으며, 정의로운 사회 혹은 그것의 실현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피박의 기본 질문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선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는 강조점을 ‘우리의 권리’보다는 ‘타자에 대한 책임’에 찍습니다. 세상에는 (억압받고 있는) 수많은 타자가 있습니다(물론 ‘나’ 역시 그런 타자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나를 타자보다 우월한 존재로 가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피박은 이런 타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렬한 충격 속에서 깨닫고, 또 그들이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사고하고 실천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데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타자’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 글은, 이를 통해 오히려 ‘나’를 반성하게 만듭니다. 나는 타자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만큼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과 함께 “장차 도래할” 정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을까?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자기-갱신하는 실천을 할 만큼의 인내심을 가지고 있을까? 다시 말해 타자의 부름(calling)에 응답(response)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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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에서는 무력충돌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사태가 어떻게 될지 섣불리 예측할 수도 없다. 리비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단지 기름값이 오르게 된 계기로만 느껴질 지도 모른다.

스피박은 자본주의에서 ‘권리의 문화’는 성장했지만, 그에 반해 ‘책임의 문화’는 크게 쇠퇴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타자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욕망하고 실천에 옮기는 일은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을 진다고 해도 기껏해야 더 높은 자리에서, 물질적으로 조금 더 풍요롭고 지적으로 우월한 사람의 입장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책임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흔히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하지만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닙니다. 자신의 물질적․지적 우월함을 기반으로 타자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타자에게 관여하고, 이 과정에서 타자를 교육하는 동시에 타자에게서 배우는, 그런 상호적인 과정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섬세함, 상상력,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부름을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스피박은 ‘인문학’을 통해 이 훈련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물론 그가 계속해서 강조하듯 인문학은 하나의 ‘준비’과정이며, 훈련은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며칠 전에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부당해고에 맞서 농성을 벌이던 홍익대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들이 노사합의를 이루며 일터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것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이 사건을 보면서도 저는 역시 ‘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들의 부름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농성을 벌인 노동자들이 명시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청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연대하자는 그들(그리고 그들과 이미 연대한 이들)의 외침을 나를 부르는 소리로 받아들이는 건 저의 몫입니다. 타자가 실제로 나를 부르고 있건 아니건, 그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책임입니다. 저는 그들의 목소리를 저를 부르는 소리로 이해했지만, 그들에게 응답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개인적인 사정들이 있다는 핑계로, 혹은 그냥 귀찮아서 안 들리는 척 하고 있었습니다. 승리(라고 말하기에는 껄끄러운 감이 있지만)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 한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회 혹은 부끄러움이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워만 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스피박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다짐을 해봅니다. 이런 후회를 줄이는 것,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감각을 곤두세우고 아주 작더라도 지속적인 실천(들)을 하자는 것, 이것이 올 한해 저의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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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만지고 있을까?

다른 여러 아시아 - 10점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울력
2011/03/07 09:00 2011/03/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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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자 2011/03/10 20:45

    제가 고민하는 주제와 맞닿아 있는 글이라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을 공부한다거나 입에 인문학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더 타자의 고통이나 부름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아서 가끔 절망스럽기도 한 것 같습니다.

    • 그린비 2011/03/10 21:26

      반갑습니다. 고민하시는 주제와 닿아있다니 더욱 기쁘네요.
      자기 눈앞의 일에 급급하다보니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계기로든 더욱 더 타자의 고통과 부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