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한 통념에 던지는 23개의 반문(反問)
― 우리가 알던 불교는 진짜 불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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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인 '고타마'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라는 뜻의 '붓다(불 · 부처)'를 더하여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하기도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미래에 역사가들에게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꼽을 것이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와 그리스도교를 대체한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사람들은 이에 수긍하기는커녕 토인비가 연로하여 총기가 흐려졌다고 수군거리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인비의 예상은 적중하여 최근 30년 사이 서양에서는 불교 붐이 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89년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치솟는 인기의 절정을 찍은 불교로 인해 서양의 사찰이나 젠 센터(명상센터)에 사람들의 발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리처드 기어나 샤론 스톤과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까지도 불교신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간접적으로나마 민간 포교에 앞장서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양권에서는 현각(玄覺) 스님과 같은 푸른 눈의 출가자들까지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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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중적 불교 붐 속에서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는가?”, “불교는 환생을 가르친다?”, “모든 불교도들은 깨달음을 추구한다?”와 같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질문을 던지는 불교학자가 바로 이 책의 저자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 오른쪽 사진)이다.
  일본 선불교계의 석학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의 제자이자, 미국 불교학계 내에서 선불교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고 있는 그가 이 책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에서 이렇게 불교에 대해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가 불교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 19세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진보했음은 자명하나, 여전히 특정한 관습적 사고 속에 사로잡혀, 문제제기와 질문의 범위가 늘 같은 영역 안에서 맴돌고”(8쪽)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칫 불교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통념들 중 하나로 고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문의 형식으로 불교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이 책의 원서 Le Bouddisme는 ‘통념’이라는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저자는 “불교의 경우, 이러한 단순화의 시도가 종종 도를 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단순화된 부분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불교가 무엇인지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이 시중에 나와 있으며, 그 책들은 각기 나름대로 ‘불교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이 책을 통해 기존의 책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무엇이 불교가 아닌지를 설명하려고 한다”(5쪽)고 선언하고 있다.

저자는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유일한 사람인가?”,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등등의 반문을 던지며 이 책 어디에서도 “불교란 이것이다”라고 정의 내려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질문거리로 삼은 모든 것들이 ‘불교가 아니다’라고도 잘라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교가 한 마디의 명제로 단순화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통념이 고정화하는 것, 그리하여 불교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 또 불교 전통을 풍성하게 만든 여러 요소들은 쏙 빠뜨린 채 불교의 ‘정신’만 남기는 것을 경계한다. 문제는 우리 역시 이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너무나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각종 유·무형의 상품들로 불교를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의 불교를 계속 발전시켜 나갈 것이냐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도 던지고 있다.

☞ 책 함께 읽기 : 불교를 믿으면 정말 환생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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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황으로 볼 때, 당신의 아들 제시가 바로 도르제 라마의 환생입니다.
─ 고든 맥길(Gordon MacGill, 영화 「리틀 붓다」(1994)

티베트 라마승의 환승의 문제는 오랫동안 서구인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이 문제는 항상 불교가 가진 이성적 혹은 비이성적인 측면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지는데, 이 점은 또한 「리틀 붓다」와 같은 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

하지만 여기서의 환생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연속인 윤회와는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윤회란 개인의 업에 의해 결정된 어느 단계에서의 존재가 이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 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티베트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은 라마 승려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티베트 전통에 따르면 존재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다시 나고 싶은 곳을 소망하면 원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티베트불교가 불교 교리사 가운데, 상대적으로 늦게 발전한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티베트불교만을 정통 불교로부터 나온것처럼 그리고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왜곡하고 있다. 실제 이러한 환생에 대한 생각은 12세기 말엽 칼마파(Karmapa)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 학파의 라마승 중 한 명이었던 뒤쑴 켄파가 자신의 환생에 대해 예언하는 것에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은 지도자가 죽은 이후에도 그 학파 내에서는 그 지도자의 위엄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개념은 곧 티베트불교의 다른 학파들로 급속히 번져 갔는데, 겔룩파(Gelugpa)가 '달라이 라마'라는 계보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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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라 궁_ 해발 3,700미터로 티베트 자치구의 라싸에 위치하고 있다. '포탈라'라는 이름은 '관음보살이 산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의 '포탈라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환생이라는 것은 티베트 문화라고 하는 특수한 문화적 맥락 안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까지 환생이란 실은 티베트와 그 근방의 왕국들(부탄, 시킴, 라닥, 몽골)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인도불교에서 환생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개념이며,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발달한 불교 전통, 혹은 중국권 불교 전통에서도 환생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를 믿는 지역은 서서히 티베트로부터 몽골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제3대 달라이 라마는 처음으로 '달라이'란 칭호를 몽골의 왕, 알탄에게 받았던 인물이다. 제3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자 그의 환생인 제4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인의 몸으로 환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환생이라고 판명된 어린아이는 놀랍게도 알탄 왕의 증손자였다. 더 최근에는 많은 티베트인들이 잇달아 세계 전 지역으로 망명을 떠남에 따라 자연히 유럽과 북미 지역에까지 티베트불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화 「리틀 붓다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 베르나르 포르 지음, 김수정 옮김,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10_불교는 환생을 가르친다?」, 86~88쪽

2011/03/08 09:00 2011/03/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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