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허무의 종교인가?
-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함께 읽기

불교는 '무'를 숭상하는 종교이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숭배가 있는가!
이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정사실임에 틀림없다.
— 빅토르 쿠쟁(Victor Cousin)

19세기 '불교 허무주의'에 관련된 논의는 유럽의 철학적 담론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붓다를 사악한 존재 정도로 보는 경향이 있었던 부정적인 오리엔탈리즘은 지난 세기 초엽에 어떻게, 또는 왜 그런지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붓다를 이상화하는 경향을 띠었던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으로 대체되었다.
  서양에서 '불교'는 19세기 초반부터 그 시초를 잡을 수 있는데, 이때가 불교라는 신조어가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의 불교가 가지고 있는 치유적이고 자비와 관대함을 가르치는 종교라는 설명 태도는 이전에 불교를 '무를 숭상하는 종교'라고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니르바나[Nibbāna, 열반]은 산스크리트어로, 붓다가 도달한 궁극적인 경지를 뜻한다. 대조적인 단어로 삼사라(Samsāra)가 있는데, 삼사라는 생사의 반복을 의미한다. 소승불교에서 니르바나는 모든 욕망의 소멸, 순수한 부재를 의미했다. 대승불교에의 최고의 목표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되는데, 이는 존재의 종식이라기 보다는 세계를 신성하다고 인식하고,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그 세상이 바로 불국토이다"라는 말이 바로 대승불교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세기에 허무주의적으로 니르바나를 해석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사람이 바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었다. 헤겔은 불교의 니르바나를 단지 無로 보았는데 이것은 불교도들의 제일원리로,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나중에는 반대로 보긴 했지만, 헤겔은 불교의 무를 존재함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모든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절대성으로 보았다. 절대성으로 전환하는 것은 인간의 상대적이며 조건 지어진 개인적 특성을 절멸시킨다. 따라서 공은 무가 아니며, 충만함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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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1770~1831)은 루터교 신자였다고 한다. 헤겔은 불교를 無로 보았지만, 이는 단지 없음이란 의미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헤겔의 후계자들은 헤겔의 미묘한 뉘앙스를 유지하지 못했다. 『법화경』을 처음 번역했던 학자마저도 붓다는 "사유 원리의 절멸 속에서 최고의 선을 보았다"고 언급했고, 그의 제자는 "만일 세상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절멸'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불교가 "허무주의의 교회"(에르네스트 르낭, Ernest Renan)로 불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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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1788~1860)는 가장 좋은 예술로 음악을, 가장 좋은 종교로 불교를 꼽았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불교에 더욱 비관적 태도를 갖게 한 인물이다. 그는 불교를 무신론적 종교라고 보았다. 니르바나는 그 자체로 무가 아니었다. 단지 언어와 사고의 무기력함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드러나는 것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니르바나를 무로 정의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삼사라가 니르바나를 구성하거나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단일한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라고 말했는데 이 관점은 헤겔의 관점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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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1844~1900)의 철학은 많은 오해를 받았다. 특히 "신은 죽었다"는 말을 책임지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그 오해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니체는 불교를 무에 대한 향수 혹은 의지에 대한 무기력함으로 보았으며 "비극은 불교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의 효력과 원한에 대한 승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 불교는 영혼을 원한으로부터 아예 해방시켜 버린다—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회복에 이르는 첫 걸음인 것이다. "적대는 적대를 통해 종결되지 않고, 우호를 통해서 종결된다" :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의 서두에 위치하고 있다.(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42쪽)

로제 폴 드루아에 따르면, 불교에 대한 오해는 19세기 전체에 걸쳐, 그리고 그 이후로까지 계속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 전통과는 너무 다른 교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당시 철학자들의 애처로운 무능력을 드러낸다. 유럽인들은 아마도 칸트 이후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구심점을 잃어버리게 만든 '신의 죽음'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두려움을 불교에 투사했던 것이 아닐까?

─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4_불교는 허무의 종교인가?」의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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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있는 한 식당의 모습, 붓다는 그의 사유와 관계없이, 어떤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 10점
베르나르 포르 지음, 김수정 옮김/그린비
2011/03/14 09:00 2011/03/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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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진한양 2011/03/14 17:11

    아... 오랜만에 들려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느 강의에서 들었는데 니체(?)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가 매너리즘에 빠져 고인 물처럼 썩었을 때 불교는 '떠남'을 제시하며
    움직였다고 하는 내용이 생각이 나요.
    고여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설법을 하는... 항상 발전을 꾀는 모습을 말하는 듯.. ㅋ
    그런데 전 아직까지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의 참 된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ㅠㅠ

    • 그린비 2011/03/14 18:07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잘지내셨는지요?

      '불교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불교가 아니지 않을까?'라는 질문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저도 책을 읽다 공(空)과 무(無)에 대한 오해가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불교가 막막하게 느껴질 때 읽기 좋은 책이랍니다! +_+

    • 순진한양 2011/03/15 11:31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무엇은 무엇이다'와 '무엇은 무엇이 아니다'는
      어떻게 보연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아요.
      자꾸 정의를 내리려고 골머리를 쓰는 것 보다는 脫정의를 통해서 접근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 그린비 2011/03/15 13:08

      자꾸 질문을 만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그런 질문들이 한번에 쫙~ 꿰질 때! 그때의 기쁨은 엄청나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