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일깨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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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피츠베크, <책벌레> _ 엄청난 서가의 책들을 통해 그림 속 인물이 얼마나 책에 빠져있는지 느낄 수 있다. 무릎으로도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라!

회상 혹은 (애정)고백 하나…… 하자면, 대학 때 독문과 선생님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독문과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수업에 매우 큰 인상을 받아 그 뒤로 독문과 수업을 곧잘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독문과에 계신 선생님들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렸던 것인데, 문학과 철학, 역사를 아우르는 독문과 특유의 수업방식을 통해 책을 읽는 재미, 책을 읽는 방법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독일문학사’, ‘독일지성사’ 등등의 수업을 들었는데요. ‘낭만주의’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운 것도 그때였습니다.

기억하기론 어느 수업도 낭만주의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문학 수업에선 괴테를 배우고, 낭만주의를 짧게 배운 뒤 바로 하이네나 릴케, 카프카 같은 작가들로 넘어갔고, 지성사 수업에선 칸트를 배운 다음 낭만주의를 언급하자마자 곧바로 헤겔과 맑스로 넘어갔습니다. 낭만주의에 대한 평가도 비슷했습니다.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태동해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려 했지만, 오로지 정신 속에서만 혁명을 일으켰고, 결국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운동, 나중에는 나치의 사상적 원류가 된 운동. 제가 들은 낭만주의는 이런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평가는 낭만주의가 사그라진 직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낭만주의의 아들이자 자신도 한때 낭만주의자였던, 하지만 그 뒤 철저하게 낭만주의를 비판한 하인리히 하이네는 『낭만파』(Die romantische Schule)라는 저서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철학적 토대를 결여하고 있고, (보수적인) 가톨릭에 빠져 있으며, 중세로의 퇴행을 주장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 하이네는 낭만주의자들, 그중에서도 낭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나는 낭만파에서 잘해야 피히테와 셸링의 몇몇 사상적 단편의 영향을 볼 뿐, 하나의 철학의 영향은 발견할 수 없다(하인리히 하이네, 정용환 옮긺, 『낭만파』, 한길사, 2004, 44쪽).

슐레겔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문학은 늙었다. 우리의 뮤즈는 물레질을 하는 노파와 같다. 우리의 큐피드는 금발의 소년이 아니라 머리가 하얗게 센 쪼그라진 난쟁이다. 우리의 감정은 시들었고 우리의 상상력은 메말랐다. 우리는 다시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중세의 소박하고 단순한 문학의 잊혀진 원천을 찾아야 한다. 거기에는 회춘의 음료가 우리를 향해 솟구치고 있다. 두 사람의 말은 메마르고 여윈 독일 민족에게 즉시 영향력을 발휘했다. …… 그러나 단 몇 방울만 마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길게 한 모금 쭉 들이마셔서 다시 젊어진 게 아니라 아예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낭만파』, 46~46쪽).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명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의 영화(榮華)를 모두 인식했고 현재의 모든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 고통의 위대함을 파악하지 못했으며 미래 세계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 고통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현재는 그에게 증오의 대상이었고 미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의 예언자의 시선은 오직 그가 사랑하는 과거를 향할 뿐이었다. 불쌍한 프리드리히 슐레겔, 그는 우리 시대의 고통을 재생의 고통이 아니라 죽음의 단말마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이 두려워 가톨릭 교회의 쓰러져가는 폐허로 도피했다(『낭만파』, 84~85쪽).

제가 수업을 통해 받아들인 낭만주의의 이미지도 하이네가 해석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낭만주의는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것,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변증법적 이행의 과정에서 안티테제로만 역할한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독일낭만주의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고, 대학을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낭만주의를 다룬 책을 읽어 볼 생각을 한 적도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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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작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도입부가 너무 길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편집후기를 쓰고 있는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초기 독일낭만주의 연구』에서 프레더릭 바이저(Frederick C. Beiser)는 이런 이미지가 대부분 허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초기 독일낭만주의자들의 텍스트를 면밀하게 읽는 동시에 그 텍스트들과 당대의 지적․정치적 컨텍스트를 연결시킴으로써, 낭만주의자들의 문제의식과 목표, 해결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합니다. 바이저에 따르면 초기 독일낭만주의는 지금까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오해받아 왔고, 이 책에서 바이저의 목적은 이 오해들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오해는 초기 독일낭만주의가 ‘문학운동’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이 선입견 때문에 초기낭만주의는 주로 문학이론에서만 다뤄져 왔고, 이런 학문적 분업 탓에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고 바이저는 주장합니다. 그가 보기에 초기낭만주의는 문학 혹은 문학이론이었을 뿐 아니라, 철학 혹은 세계관이기도 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또 이 세계의 문제들을 나름대로 해소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이저는 초기낭만주의에 대한 연구가 형이상학과 윤리학, 정치학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초기낭만주의 ‘사상’의 전모가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낭만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낭만주의가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조류였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오해는 첫 번째 오해가 해소된 후에야 비로소 해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초기낭만주의가 형이상학적․윤리학적․정치학적 성격을 지녔음을 분명히 한 후, 바이저는 그들의 목표가 근대성이 초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당대의 현실을 개혁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처럼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낭만주의의 철학과 이상, 한계에 접근합니다. 그렇지만 이 ‘새로움’은 사실 철학사가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이 연구하는 주제의 언어 자체에 밀착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바이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사가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도 초기낭만주의의 개별성을 재구성하는 것, 자체의 맥락과 고유한 이상에 따라 그것을 내부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26쪽).

다시 말해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모범적인’ 방식으로 초기낭만주의자들의 언어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의 해석이 새로워 보이는 것은 그만큼 초기낭만주의를 학문적․사회정치적 맥락 속에서 진지하게 다룬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초기낭만주의라는 사상 조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지니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이저가 보여 주는 초기낭만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초기낭만주의자들은 ‘근대성’이 낳은 문제들에 직면해 그것들을 해소하려 노력했고(그들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잠시 제쳐 두면), 그 문제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초기낭만주의자들은 근대 사회가 기계적 합리주의, 소외, 아노미, 원자주의 등의 폐해를 낳았다고 생각했고, 그에 맞서 우리가 어떤 인간, 문화,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지를 탐구했습니다.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초기낭만주의자들의 고민들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요. 제게는 그들이 ‘감성’ 혹은 ‘감수성’을 강조한 것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근대 사회에서 ‘이성’은 점점 더 차가운 계산적 합리성만을 의미하게 되었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 타인의 문제에 공감하는 일은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낭만주의자들이 ‘감성’을 ‘이성’ 위에 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성과 감성을 함께 계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발리스에게서 최고의 단서가 발견된다. 어느 미출판 단편에서 그는 세계를 낭만화하는 것은 세계의 마법과 신비, 경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친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일상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볼 수 있도록 감각을 교육하는 것이다. …… 근대인의 임무는 한때 소박하고 직관적인 차원에서 초기의 인류에게 주어졌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과의 통일성을 자기-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 저 통일성을 재창조하는 열쇠는 세계의 재신비화에, 감각의 낭만화에 있었다. 우리가 세계의 미와 신비, 마법에 다시 눈뜰 때만, 우리는 다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기 때문이다(『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188~190쪽).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주어진 일들만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다 보면 점점 더 감성이 쇠퇴하게 되고, 뒤늦게야 그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작은 일에 기쁨이나 아픔을 느끼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결국에는 타인과 사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초기낭만주의 시대 사람들의 모습일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득 내 삶 안에 그 어떤 놀라움, 신비스러움, 타인에 대한 공감도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무미건조하기만 한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급격히 우울해지곤 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신가요? 잃어버린 감성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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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산책> _ 우리는 타인 뿐 아니라 자연과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을까?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해소하지는 못한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줍니다. 물론 우리보다 앞서 이 문제와 씨름했던 이들의 사유가 깔끔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제기를 경청할 때, 우리는 그 문제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어쩌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기낭만주의자들의 사유를 오늘 우리가 따라가 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며,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를 들춰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 편집부 김재훈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 - 10점
프레더릭 바이저 지음, 김주휘 옮김/그린비
2011/03/23 09:00 2011/03/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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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동민 2011/04/20 12:23

    좋은 책 잘 보았습니다.

    간만에 숨가쁘게 책장을 넘길정도록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린비 2011/04/20 14:08

      윤동민님 안녕하세요.
      『낭만주의의 명령』은 표지도 예쁘고, 내용도 재밌죠~(자화자찬이라 민망하네욧^^;)
      앞으로도 자주 뵈었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