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세상 앞에서 떳떳하게 살고 싶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당신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보았고, 나도 커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당함’은 반드시 학력과 직업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할머니는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셨고, 남들이 밟는 가장 아랫공간인 바닥을 청소하면서도 당당하게 살고 계신다.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당당한 삶’과 ‘편안한 삶’은 다르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가지는 것이 왜 당당하게 사는 것일까? 남들이 우러러보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당당함이 아니다.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에게 떳떳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생계를 충분히 책임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당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삶은 할머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편안한 삶이 아니다. 거기에는 괴로움과 고통이 밑받침하고 있다.
― 김해완, 『다른 십대의 탄생: 소녀는 인문학을 읽는다』, 그린비, 2011, 37~38쪽.

당당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회사 안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빼어난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만 같고, 집안에서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안팎으로 기여를 많이 해야 할 것만 같고, 그리고 또 ……. 내가 생각하는 그 ‘당당함, 떳떳함’을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필요했고, 그런 요구사항들을 생각할 때마다 오히려 내 등은 자꾸만 안으로 굽어만 갔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지금의 나는 정말이지 어떤 면에서도 떳떳하지 못하다. 당당해지기 위해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럴수록 점점 위축되는 것만 같다. 나는 언제쯤이면 당당해질 수 있을까? 아니, 언제쯤이면 당당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다 채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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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집으로」의 한 장면.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초코과자를 사왔지만, 손자는 여자친구에게 '잘'보이기 위해 할머니를 챙기지 않고 가버린다.

해완은 청소부인 할머니의 모습에서 ‘당당함’을 본다. 그가 할머니에게서 느낀 것이 ‘억척스러움’이 아니라 사실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 역시 우리 할머니의 모진 인생 역경과 생활을 듣고 또 보아 왔지만, 그것을 ‘억척스러움’이라 생각했지, ‘당당함’이라 생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채지 않아도 한결같이 새벽 4시면 일어나, 험한 물일을 하러 칠흑 같은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할머니. 아파서 종일 몸져누워 계시다가도 조금만 나아지면 바로 소쿠리 챙겨들고 뻘로 나가는 할머니. 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떤 때는 그런 할머니가 안쓰러워 혼자 눈이 새빨개지게 답답해하던 때도 있었다(내가 뭐라고...-_-). 왜 좀더 편하게 살지 않느냐고 말이다. 해완의 글을 보면서, 실은 그것이 할머니가 택한 삶의 방식이고, 억척스러운 게 아니라 당당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할머니 자신의 몸과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삶은 얼마나 고되고 외로웠을까. 해완의 말처럼, 당당함에는 늘상 ‘괴로움’이 밑받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 당당해지고 싶어 하던 마음들이 한없이 얄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내가 생각하던 ‘당당한’ 삶은 무엇이었을까? 트렌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어디서나 인정받고 대접받는 삶,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완벽의 결정체, 남의 질타와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갈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의 소유자……. 실은 주변에서 다 ‘네가 옳다’고 인정해 주고 떠받들어 주는 그런 ‘편안한 삶, 거칠 것 없는 삶’과 ‘당당한 삶’을 착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물질적으로도 편안하고,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는 지위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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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상드,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그녀는 여성에게 금지되었던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스스로 남장을 했다. 무엇이 그녀를 '당당하게' 살게 했을까?

나 역시 해완처럼 10대 시절부터 ‘당당해지는 것’, ‘독립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두 가지는 여전히 나의 가장 큰 꿈이다. 당당해지고 싶다는 꿈은 이렇게도 이루기 어려운 꿈인가? …… 아니, 그 전에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는 것 같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기꺼이 ‘편안한 삶, 안정된 삶, 인정받는 삶’을 버릴 자신이 있는가? 고통받지 않기 위해 당당한 삶을 원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자신은? 뻔한 대답 같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은 70대, 80대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흐미). 그 무수히 많은 선택들 중 탈학교라는 ‘하나의 선택’(‘하나’이긴 하지만 정말 대단한 선택임에는 틀림없다)을 용감하게 잘 해낸, 그 누구보다도 ‘당당한’ 10대인 해완에게 지지와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다른 십대의 탄생 - 10점
김해완 지음/그린비
2011/04/04 09:30 2011/04/0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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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한 2011/04/04 16:48

    이런 글에 댓글이 없다는 것이 아쉽네요.
    온통 연예관련 글들만 판치는 웹상에서 제가 꿈꾸어 마지않던 당당함을 보고 갑니다.

    • 그린비 2011/04/04 17:03

      아한님 반갑습니다!
      당당하게 사는 것은 스스로에게 당당해지는 것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확~ 들어온 것 같네요.(마..맞죠? ^^;)
      당당하게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2. Lipp 2011/04/04 23:44

    독립적이고 당당한 삶 ,, 해완이보다 많은 시간을 살아온 제게도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더 반성하고 더 고민해보고 더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그린비 2011/04/05 10:08

      아마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이런 생각도 드네요. ^^;
      즐겁게 사는 것과 또 다른 부분인 것 같습니다.
      Lipp님에게도 '멘토'의 가호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

  3. 웃긴행복 2011/04/13 16:10

    실은 주변에서 다 ‘네가 옳다’고 인정해 주고 떠받들어 주는 그런 ‘편안한 삶, 거칠 것 없는 삶’과 ‘당당한 삶’을 착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물질적으로도 편안하고,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는 지위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 고통받지 않기 위해 당당한 삶을 원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자신은?

    이 글 복사해서 저장해두고 볼께요.

    • 그린비 2011/04/13 16:29

      헉! 글을 소장하시기까지!

      이 글이 질문이 되고, 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