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장애인들은 무수히 많은 말들을 해왔지만, 그 말들은 좀처럼 사회화되지 못한 채 대부분 날것의 말 그대로 소멸되어 갔다. 이런 현실에서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은 장애담론의 장(場)을 형성하기 위한 텍스트의 생산뿐만 아니라, 기존의 억압적 장애담론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장애차별주의적인 세계를 변화시켜 나가는 실천의 과정인 '장애학-하기'를 질문하며 기획되었다. 우리는 이 '장애학-하기'가 필연적으로 공동의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다시 '장애학-함께하기'라 부른다. 함께 장애학을 읽고 성찰하는 것, 그러한 성찰을 말과 글을 통해 나누는 것, 장애/비장애라는 분할을 가로지르고 넘어서며 스스로의 변태(變態)를 시도하는 것, 절실한 삶의 요구를 걸고 아스팔트 위에 선 장애인의 곁에 함께 서는 것, 그리하여 장애라는 현상을 구조화시키는 세계의 배치를 변화시킴으로써 또 다른 장애학의 탄생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은 '장애학 함께 읽기'를 넘어 바로 이러한 '장애학-함께하기'의 일부로서 자리매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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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아마존의 눈물」의 스틸컷

'장애'란 마사이족에 있어 주로 일상적인 과업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실제적 무능력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무능력이 인격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신체적 차이들은 삶의 정상적인 일부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차이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해지기는 하지만, 사회적 관계성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결혼할 기회를 또는 최소한 아이를 가질 기회를 지녀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인격체란 타인들과 더불어 그리고 타인들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장애화된 인격체는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자이다.
─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67~68쪽

별다른 의심 없이 사용했던 '장애인'이라는 단어의 반대편에는 '정상인'이 있었습니다. 눈 두 개, 코 하나,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등등… 저는 예전에 장애인을 당연하게 갖추어야 할 것들이 결핍된, (이렇게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휠체어를 탄 후배 한 명이 제가 활동하던 동아리에 가입했습니다. 후배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되물어야 했고, 그때마다 후배는 천천히 온 힘을 다해 다시 대답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물어보기 미안한 마음에 알아들은 척 한 적도 많았고, 아예 말을 걸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다른 외모'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낯설음도 말을 안 거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함께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저는 그 후배가 무척 성실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말을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그 후배가 같은 동아리의 여자 후배에게 고백을 했다더라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 여자 후배는 늘 휠체어를 밀고, 함께 수업을 듣던 짝꿍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남자 후배가 누군가에게 고백을 했다는 것 자체에 놀랐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 남자 후배를 저와는 다른, 어쩌면 저보다 부족한 존재로만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 역시 사람이고, 함께 있으면서 정드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르는데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감정도 없는, 혹은 너무 어린 아이일 거라는 오해를 했었지요.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의 서문을 읽으면서 저는 그 후배가 떠올랐습니다. 여전히 저는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장애 개념을 갖고 있더군요.

김도현 선생님의 인터뷰를 촬영하는 동안, '장애'라는 말 대신 '손상'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다름'과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정상인-비정상인'이라는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깨닫게 되었구요. 그동안 제가 얼마나 그 위계 속에서 차이를 가르고 있었는지 느끼게 된 셈입니다. 저는 이제 겨우 함께하기 위한 과정에 막 한 발을 내딛은 상태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인터뷰가 '장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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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김도현
1974년생으로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96년에 에바다복지회에서 발생한 비리사태를 접하며, 장애문제를 운동의 차원에서 처음 고민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노들장애인야학 사무국장, 장애인이동권연대 정책교육국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 등으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발달장애 전문 계간지 『함께웃는날』 편집장으로 일하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일원으로서 운동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쓴 책으로 『차별에 저항하라』(박종철출판사, 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 『장애학 함께 읽기』(그린비, 2009)가 있으며, 2004년에는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가 수여하는 제2회 정태수상을, 2009년에는 김진균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제4회 김진균상(사회운동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애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책으로 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으셨나요?
제가 장애인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1996년에 있었던 에바다복지회 비리사태였으니까, 대략 15년 정도 이쪽에서 일을 해왔습니다. 활동을 시작했던 초기에는 열악한 현실에 있다는 부분 외에는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장애운동이 필요하다, 이 근거를 이야기 할 때에도 장애인들의 열악한 현실밖에 이야기할 수 없었죠. 운동이라는 것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것도 현실이니까 당연히 현실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장애인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거칠게 단순화시켜서 얘기하자면, 우리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들은 장애인들의 무능력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이는 거죠. 우리는 어떤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쪽은 ‘장애인들이 시혜와 도움을 바라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소통이 안 되는 거죠. 코드가 다르고 공동의 소통이 가능한 기반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 공동의식을 만들고, 서로 변화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그런 실천의 일부, 그런 의미에서 장애학 관련 책을 쓰고 번역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장애학을 우리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앞서서 운동했던 지역들이 있었고, 또 거기서 먼저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고, 그게 장애학의 이름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이 외국어로 존재하니까 제가 보기에는 약간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절반이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현실에서는 외국어 텍스트들을 장애인들이 직접 접하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이러한 (장애학) 텍스트를 보면서  ‘아, 이게 이렇구나’ 하고 텍스트 자체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텍스트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고… 이런 번역된 텍스트가 있으면 그런 소통이 가능한 기반을 만드는 셈이죠. ‘장애학 컬렉션, 장애학 함께-하기’ 이런 표현으로 실천적인 함의나 의미를 부여했던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궁금합니다.
책머리에 보면, 편저자인 베네딕테 잉스타와 수잔 레이놀스 휘테가 장애연구들이 대부분 북미 지역이나 북유럽에 한정이 되어 있었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이 의미는 장애연구가 그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장애연구들이 그 지역에서 나타난 장애에 대한 개념, 장애에 대한 관념을 전제로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나라의 장애를 이 나라(서구)의 전제를 가지고 바라보니까 그 나라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나라(비서구)의 장애인들은 굉장히 방치되고 있다든지, 굉장히 학대받고 있다든지 이런 왜곡된 이미지나 상을 갖게 되는 거죠.

우리가 장애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한 사회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우주론이나 인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주론이나 인격에 대한 개념에 따라 장애개념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우주론이 낯선 말일수도 있는데, 세계론이라고 해도 돼요. 세계에 대한 해석이고, 세계의 존재자들에 대한 관계의 해석이죠. 이게 그냥 우주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또, 인간의 자격이란 것이 있거든요. ‘온전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 이런 것에 포함될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을 이야기하는데요, 인격에 대한 관념은 사실 어떤 한 세계에 대한 해석,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인격 개념이 다른 곳에서는 장애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고. 우리와 다른 문화,  우리와 우주론도 다르고 인격에 대한 개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곳에 가보면,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인과 다를 것이라는 문제설정을 한 것이죠. 실제로 그런 ‘다른’ 모습은 주로 비서구 사회가 많은데, 편저자들은 비서구 사회의 현지조사를 통해 ‘그러한 문제설정이 과연 적절한가’ 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고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이 쓰였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의 제목이 강렬한데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근대 사회 이전이나 국민국가 이전, 민족국가의 정체성이 성립되지 않은 부족사회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아는 민족은 없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잖아요. 민족이라는 게 특정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특정한 정치경제 공동체 내지는 문화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에 장애도 마찬가지 측면이 있다는 거예요.

자본주의가 하나의 세계체제고 요즘 같은 경우 자본주의가 손을 뻗치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문화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은 사회들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작년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다가왔던 다큐 중에 「아마존의 눈물」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그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 개념이 없잖아요. 그런 사회들에서도 물론 다리를 저는 사람들도 있고,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장애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장애가 없고 장애인이 있을 수 없는 거죠. 분명히 (사회적 차이에 따라 장애가 논의되는) 맥락이 다르다는 거고, 그 다른 맥락 속에서 다른 삶의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제목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장애등급제도가 궁금합니다. 한국 사회 외에도 이 제도를 채택한 곳이 있는지요?
(장애등급제도는) 사람들을 생의학적인 손상이나 기능의 제약 정도에 따라 1급부터 6급까지 등급을 매기고 국가에 등록시켜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먼저 생겼고,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국 사회 사회복지제도 전반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장애등급 말고 또 하나가 있죠. 군대에서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기잖아요. (일본에서는) 군대에 갈 사람에게 너는 몇 급, 너는 몇 급 이렇게 정하는데 이 등급이 면제까지 나뉘어 있잖아요. (군국주의를 지향했던 일본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전쟁에 내보낼) 사람들 몸에 자연스럽게 등급을 매기게 되었고, 이것이 일반적인 제도가 되었는데 그걸 또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면서 한국 사회에도 (등급제가) 정착이 되었죠. 특히 주민등록증제도를 통해 국민들 전체를 일괄적으로 등록하고 관리하는 나라가 많지 않잖아요. 이런 부분에서 등급제가 한국 사회와 잘 맞았던 부분이 있었고, 그래서 장애등급제도를 받아들이기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정확히 얘기하면 장애등급-등록제죠, 이건 한국 사회와 일본밖에 없습니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에 앞서 현재 장애계에서는 '장애등급제 철폐'를 보다 이슈화시키고 있는데요, 장애등급제와 관련된 쟁점이 궁금합니다.
(2000년 이후 장애인 당사자들의 투쟁을 통해 장애와 관련된) 사회서비스나 복지급여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어요. 대표적인 것으로 활동보조인 서비스, 장애연금, 장애인 콜택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서 장애인들이 이런 항목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무조건 장애인의 등급으로 나누어서 제공을 했던 거예요. 활동보조인 서비스는 무조건 1급까지만, 장애연금은 무조건 2급까지만(물론 중복으로 적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2급까지), 장애인 콜택시는 무조건 3급까지…. 이렇게 무 자르듯이 잘라 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나는 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고, 나는 뭔가 더 할 수 없고…’ 이런 것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으면 그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장애인계가 이것(장애인등급제)의 폭력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복지제도를 시행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면 자연 증가되는 예산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산이 증가하게 되니까 정부에서는 장애등급 판정 제도를 더 엄격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장애등급을 매긴 다음에 다시 그것을 심사하는 제도를 둔 거죠. 2007년부터 조금씩 시행이 되었는데, 전면화된 것은 작년(2010년)부터에요.

(전문가들의) 심사를 통해 장애인들의 36.4%, 즉 장애인 3명 중 1명의 등급이 하락했습니다. 예산을 늘리지 않기 위해 장애등급을 하향조정한 것이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지 않고, 어제의 내 필요가 오늘의 내 필요와 다르지 않은데’ 갑자기 등급이 조정되면서 어제까지 이용하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급이었다가 갑자기 4급, 5급이 되니까 콜택시도 이용할 수 없고, 장애연금도 받을 수 없게 되고 이렇게 바뀌었죠.

그래서 장애인들이 장애등급제가 얼마나 폭력적인 제도고 비인간적인 제도인지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제도로 인해 필요한 것을 받으려면, 스스로 장애를 인정하고, 장애라는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 장애등급제가 결국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봐왔던 장애 정체성을 가진 장애인들을 계속 만들어 내는 악랄한 기계장치이고 규율권력이구나 이런 것을 느끼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장애등급제 폐지가 현재 장애운동에서 전면적인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2010년 하반기부터 장애계에서는 장애등급제의 폐지를 위한 공동 대응기구가 꾸려져 투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만난 정부 관료들은 장애등급 없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냐고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장애등급심사의 문제점은 개선해야겠지만, 장애등급-등록제 자체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합니다. (…)

주민등록제도처럼 장애등급-등록제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제도와 문화로 자리를 잡아, 그것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인간과 장애에 대한 새로운 시야, 상상력, 관계론적 관점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인간다운 삶 이전에 그 ‘인간다움’과 ‘인격’의 가치 및 기준들을 재고해 볼 수 있다면, 이 책이 갖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할 것입니다.
─ 같은 책,「옮긴이 후기」중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 10점
베네딕테 잉스타 & 수잔 레이놀스 휘테 엮음, 김도현 옮김/그린비
2011/04/19 09:00 2011/04/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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