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장애인들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빈민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배반자인 것처럼, 우리 장애인들은 미국적 이상을 타락시키는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러한 이상에서 이탈해 있는 정도만큼, 우리는 비장애인들에게 불쾌하고 혐오감을 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특히 안면의 손상이나 신체적인 기형이 있을 때, 우리로부터 뒷걸음질 친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어떤 사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가시적인 존재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불평등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이 가짜 낙원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들 역시 이러한 조건에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장애인들은 회피하고 싶은 두려운 가능성을 표상한다. …… 존 글리드먼과 윌리엄 로스는 그들의 탁월한 저서 『예기치 않은 소수자』에서 장애인은 타자가 된다고, 즉 실패·연약함·무력화의 살아 있는 상징, 정상성의 대척점, 그들의 인간성 자체가 의문시되는 존재가 된다고 적고 있다. - 로버트 머피, 「6장_사회적 만남들: 미국 사회의 침묵하는 몸」, 베네딕테 잉스타·수잔 레이놀스 휘테 엮음,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 김도현 옮김, 그린비, 2011, 267~268쪽

미국 인류학자 로버트 머피는 (1987년경에 쓴)「사회적 만남들: 미국 사회의 침묵하는 몸」에서 당대 미국에서의 장애인 인식, 장애인들의 처지를 고찰합니다. 그 자신이 생의 어느 시기에 장애인이 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던(“우리 장애인들”) 머피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당자사로서, 우리가 느끼고 있지만 말하기는 힘들었던 미묘한 문제들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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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 만들기 열풍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이상을 쫓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라는 이 책의 제목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글은,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장애’가 문제가 되는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어떤 능력이나 기능의 결여를 겪고 있는 사람입니다(이 정의 자체가 문제가 많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 중 하나이지만요). 그런데 머피가 묘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처럼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는 이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결여가 어떤 실패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지는(따라서 사람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점점 더 강고해지는) 한편, 아름다운 몸이나 건강한 몸은 점점 더 찬양받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신체적 결손’뿐 아니라 ‘사회적 삶에서의 실패’까지 표상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은 단순히 우리보다 못한 존재, 무시당해도 좋은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던) ‘두려움’을 가시화하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예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도 머피가 묘사한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장애인을 외계종처럼 생각하는 한, 그들은 장애인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다. 장애를 지닌 개인은 비장애인의 정상적인 기대 범위 밖에 있게 되며,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그/그녀에게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남겨지는 것이다. 그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아예 어떠한 접촉의 발생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다. 이는 휠체어를 탄 사람을 신체적으로 회피함으로써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으며,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를 지닌 사람에게는 손쉬운 해결책이다. - 같은 글, 270쪽

장애인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에 관해서 보자면, 사람들은 안전한 거리를 둔 채 이를 수행하곤 한다.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거나, 구걸하는 장애인에게 동전을 던져 줌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과 지나치게 가까워짐 없이 그들의 양심을 달랜다. 그들은 자선행위를 통해 그들 자신은 비양심적인 사람들과 다름을, 그리고 자신은 흠잡을 데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 같은 글, 291쪽

장애인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형상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접촉의 발생 자체”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련된 방식으로, 즉 기부를 하거나 성명서에 사인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장애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표현합니다. 이런 행동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머피의 생각에 따를 때) 이런 방식으로 장애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돕는 태도 이면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고, 이 두려움이 결국 장애인들을 보이지 않는/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로 더욱 몰아가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한 친구가 해준 얘기에 따르면, 외국(소위 유럽 등의 선진국)에 다녀온 한국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외국에는 한국보다 장애인이 많은 것 같다”라고 합니다(저도 이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바보같이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을 밖에서 잘 볼 수 없는 것, 이는 한국 사회에 장애인들이 밖(더 넓게는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한국 사회야말로 머피가 말한 (“불평등과 고난” 등에 대한) ‘두려움’이 극대화되어 있는 사회, 그래서 그 두려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애인을 어떻게든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만연한 사회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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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 _ "비장애인들은 또한 자신의 우월함을 단언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장애인들과 구별 짓곤 한다. 마치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장애인과 유사한 운명에 빠질 위험성을 완화시켜 주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책, 273쪽)

4월 20일은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었습니다(장애인차별철폐 1000인 선언단 홈페이지). 장애인들의 처지에 사회적으로 문제제기하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차별을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에 동참하고 싶어, 저도 약간의 관심과 후원금으로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을 통해 장애인을 차별하는 제도들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기분이 그렇게 개운하지만은 않습니다. 이 글을 읽은 후, 내가 장애 문제에 “안전한 거리를 둔 채” 관심과 지지를 보냄으로써, “아예 어떠한 접촉의 발생 자체를 억제”하고 나의 “양심을 달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머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령 비장애인이 장애를 지닌 상대편에게 존중을 표하기 위해 의식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할지라도, 비장애인은 그러한 만남에 가로놓여 있는 어떤 모호함,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문화적 지침의 부재, 그리고 아마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는 혐오감과 맞서 싸워야만 할 것이다”(같은 글, 274쪽). ‘장애인들을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장애인들을 차별하는 사회구조․제도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조금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문제이자 개인적 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라는 개인 차원에서는 다른 문제들보다 이 문제가 좀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애인들이 당해 왔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 차별에 대항한 사회적․제도적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순간,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이 순간, 혹시 내가 (제도 개선만으로는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는) 이런 종류의 “맞서 싸움”에는 여전히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불쑥 저를 괴롭힙니다.

- 편집부 김재훈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 10점
베네딕테 잉스타 & 수잔 레이놀스 휘테 엮음, 김도현 옮김/그린비
2011/04/21 09:00 2011/04/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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