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기억의 문화이론을 위한 고전 『기억의 공간』!!

“20세기 말의 기억 예술가들은 …… 재난의 현장을 사후에야 비로소 보았다.”(494쪽)

고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는 한 연회에 참석해 연회장 지붕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다. 파편이 된 연회장에는 시체 더미가 쌓이고, 사람들은 얼굴이 일그러진 시체들 앞에서 절규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일그러진 시체들의 신원을 파악해야 했다. 신원 파악을 위해 그들은 지붕이 무너지기 전과 후의 모습들을 머릿속에서 잇기 시작한다. 남겨진 자들의 몸부림 속에서 기적같이 등장한 이가 바로 시모니데스였다. 그는 탁월한 기억력을 통해 일그러진 시체들과 연회 과정에서 봤던 이들의 모습을 연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모니데스가 했던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기억은 경험했던 사실, 자신이 방금 마주했던 사실을 회고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미처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경험했지만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더 이상 기억될 수 없게 된 것들은 어떻게 될까? 홀로코스트를 한번 생각해 보자. 홀로코스트는 기억될 수 있는가? 기억될 수 있다면, 누가 수백만 유대인의 죽음을 온전한 언어로 재현할 수 있는가? 홀로코스트 이후 기억연구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재현(기억)의 불가능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의식의 한복판에서 기억이론의 고전 『기억의 공간』(Erinnerungsräume)이 탄생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달리, 기억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그린비출판사에서는 ‘프리즘 총서’의 여섯번째 책으로 홀로코스트를 전후로 이루어진 기억양식의 변화를 추적한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기억의 공간』을 출간했다. 2003년에 경북대출판부에서 출간되었던 이 책은 개정판의 출간을 통해 초판의 상당 부분을 재번역했고, 사실관계상의 오류들을 바로잡음으로써 20세기 서구 지성계에 이정표를 세운 기억이론의 대가 알라이다 아스만의 손길을 한글로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고대 그리스 이후 전개된 기억에 대한 사유가 매체 발달사를 통해 어떻게 변화했는지, 홀로코스트 이후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망각이 기억에 선행했다는 것, 기억하기 전에 먼저 기억을 가능케 할 언어를 잃어야 했다는 것이 홀로코스트가 우리에게 던진 시대적 과제였다. 여기에 이 책 『기억의 공간』이 홀로코스트 이후 난관에 봉착한 기억에 역사적 전망을 제공한다.

매체와 예술작품에 담긴 기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아스만이 이 책에서 던지는 화두는 크게 두 가지다. 매체의 발달사는 인류의 기억가능성을 어떻게 확장시켰는가? 매체를 통해 재현되지 않았던 것들은 어떻게 재현(기억)될 수 있는가?

▷ 인간의 필멸성과 문자의 불멸성
매체는 기억의 지평을 변화시켰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이 물음과 관련해 아스만이 주목하는 것은 ‘문자’의 역할이다. 문자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을 기록에 남게 함으로써, 그의 고유명을 후세에 전달하고, 그리하여 기억의 가능지평을 확장시켜 준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예를 들어보자. 알렉산드로스는 어느 날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가서 눈물을 흘린다. 호메로스라는 위대한 시인을 가졌던 아킬레우스와 대비해 자신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알려 줄 뛰어난 시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왕은 자신의 명성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시인을 필요로 했고, 시인은 문자를 통해 왕의 존재를 영구불멸의 존재로 격상시켜 주었다.

문자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고대 그리스 이후 서구의 사유를 규정하는 핵심원리로 기능했다. 예컨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아스만은 서구의 ‘문자 형이상학’에 담긴 존재의 영구불멸성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다.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전승된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비교할 수 없다. 지나간 삶이 남긴 잔여물, 건축물의 잔해나 도구들 혹은 무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그 위로 불어닥친 시간의 폭풍으로 풍화되고 없다. 그러나 문자의 정신은 어찌나 순수한지 그것이 전승되어 해독되고 읽히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이기라도 한 듯 우리에게 말을 한다.”(본문 256쪽에서 재인용)

시간의 폭풍에 풍화되지 않는 것,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바로 문자라는 매체의 특성이다.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인류는 세대를 넘어서는 기억의 지평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록된 것의 저편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또한 부유하고 있다. 아스만의 두번째 화두는 이 기록되지 않은 것들에 집중된다.

▷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
“트라우마는 몸에 직접 각인되어 그 경험을 언어적으로 작업하여 해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트라우마의 경험은 서사가 불가능하다.”(359쪽)

폭력의 충격으로 몸에 트라우마처럼 각인되어 기록 가능한 언어가 되지 못한 것, 그것은 기존의 문자와는 다른 매체를 통해 재현되어야 했다.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시대의 충격처럼 다가와 20세기 서구 지성의 재현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아스만에게 홀로코스트 재현은 근본적으로 언어와 문자 매체의 재현가능성의 한계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홀로코스트는 신체에 각인된 트라우마였으며, “신체적으로 각인된 것은 언어나 생각으로 옮길 수 없고, 그 때문에 기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381쪽). 여기서 홀로코스트를 전후로 한 기억양식의 변화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기존의 기억이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회고하는 것이라면,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은 근본적으로 먼저 망각의 심연을 건너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망각의 심연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유대인 학살의 트라우마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아우슈비츠의 모습

그렇다면, 이 트라우마의 경험은 어떻게 재현될 수 있을까? 아스만이 주목한 것은 문자나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20세기 후반 독일에서 나타난 몇 편의 실험적 예술작품들에 주목한다.

아스만이 주목한 예술작품의 사례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 하나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의 건축물 「상실의 집」(The Missing House)이다. 볼탕스키는 1990년 베를린의 동부 지역에 2차 세계대전 중에 붕괴되었던 집 하나를 복원하고, 전쟁 중 그곳에서 살았던 이들의 명단을 팻말에 달아 전시한다. 그 팻말 속에는 이곳의 세입자였던 이들 개개인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폭격으로 인해 집이 붕괴되기 전까지 얼마나 함께 살았는지가 기록되었다. 이를 통해 실종자, 전시 희생자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이 자신만의 고유명을 얻게 되었고, 전쟁의 공포로 추상화되던 그들의 삶이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으로 환기되었다.

아스만은 이러한 볼탕스키의 작업이 “실종된 것을 가시화하는 하나의 공간을 형상화한다”고 평가한다(517쪽). 주거지를 박탈당하면서 역사 속에서 잊혀진 이들, 오직 희생자라는 익명의 집단적 명칭 속에서만 존재하던 이들이 1990년 베를린 동부 지역의 구체적인 장소로 돌아와 자신만의 고유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스만은 나오미 테레사 살몬(Naomi Tereza Salmon)의 연작 사진 「아세르바테」(Asservate), 일리야 카바코프(Ilya Kabakov)의 설치물 「넝마주이」(Müllmann) 등을 분석하며 기록에서 지워진 것들, 매체에서 재현되지 못했던 것들이 특정한 공간적 조직방식에서 되살아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지워지고 재현되지 못했던 것이 되살아나는 장소를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이라 불렀다. 트라우마의 경험은 서사화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말과 문자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장소가 재조직되고, 거기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의미들이 살아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 재조직된 공간에서 망각의 베일이 벗겨지고, 20세기의 트라우마를 통해 잊혀졌던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가 무의도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라는 개념을 통해 망각됐던 것이 되살아남을 말했듯이, 아스만은 20세기 후반 독일의 설치예술들을 통해 재현의 가능성을 박탈당했던 것들이 되살아남을 목도한다.

21세기의 ‘기억의 공간’을 위하여

“역사란 마치 감광성을 띤 판이기라도 하듯 과거가 그림들을 보관해 둔 텍스트와 흡사하다. 그림들을 아주 또렷하게 인화하는 데 필요한 화학약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미래이다.”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과거는 단순히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다. 상흔으로 각인된 것들, 표현되지 못한 채 몸과 마음의 상처로만 남게 된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을 아프게 한다. 요컨대, 망각된 것은 잊혀진 것인 동시에 아직 떠나가지 않은 것, 치유되지 않은 것이라 할 것이다. 벤야민은 그 망각된 것이 회귀하는 시간을 미래라 불렀고, 아스만은 그 미래가 실현된 공간을 ‘기억의 공간’이라 불렀다.

기념비가 세워진 장소, 설치예술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 장소에서 기억(Erinnerung)이라는 시간적 궤적은 장소(Raum)라는 공간적 궤적과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잊혀지고 실종됐던 것들이 현재의 삶으로 귀환한다. 20세기의 양차대전, 식민전쟁 그리고 민족전쟁으로 얼룩진 트라우마의 기억 속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공간’이 아니겠는가. 독일 기억이론의 거장 알라이다 아스만의 이 책은 그러한 시대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있어 이정표적인 이론적 성찰을 제공해 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은이/옮긴이 소개
지은이 소개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영문학과 이집트학을 전공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튀빙겐 대학에서 이집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9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빌레펠트 학제간 심화연구소, 미국 프린스턴 대학, 텍사스 주 라이스 대학에서 펠로 활동을 했으며,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독일 콘스탄츠 대학 일반문학부 영어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1990년 이후 문화인류학과 문화적 기억, 기억과 망각에 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과거의 긴 그림자』(Der lange Schatten der Vergangenheit, 2006), 『문화학 입문』(Einführung in die Kulturwissenschaf, 2006), 『기억 속의 역사』(Geschichte im Gedächtnis, 2007) 등이 있다.

옮긴이 소개
변학수
1958년에 태어났다. 경북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철학석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이며,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유럽어교육학부 독어교육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학평론가, 문학치료사 슈퍼바이저(프리츠 펄스 연구소)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프로이트 프리즘』(책세상, 2004), 『문학치료』(학지사, 2007), 『문학적 기억의 탄생』(열린책들, 2008)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시와 인식』(문학과지성사, 1992), 『독일문학은 없다』(열린책들, 2004), 『이집트인 모세』(그린비, 2010) 등이 있다.

채연숙
1962년에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독일문학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유럽어교육학부 독어교육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치료사 슈퍼바이저(프리츠 펄스 연구소)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서정의 침몰』(삼지원, 1999), 『글쓰기치료』(경북대학교출판부, 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독일 서정시 입문』(담론사, 1997), 공역서로는 『문학은 아직도 고혹한 피의 작업』(종문화사, 2004) 등이 있다.
2011/04/25 09:00 2011/04/25 09:0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1382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여강여호 2011/04/25 09:52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가 동시대 인물인가요? 호메로스의 출생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면 영웅은 시인을 가져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인지......제가 글을 제대로 안읽었나 봅니다요..ㅎㅎ..

    행복한 한 주 시작하십시오.

    • 그린비 2011/04/25 10:14

      여강여호님 안녕하세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호메로스의 생몰연도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고, 아킬레우스는 신화 속 인물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느 날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가서 눈물을 흘린다. 호메로스라는 위대한 시인을 가졌던 아킬레우스와 대비해 자신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알려 줄 뛰어난 시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왕은 자신의 명성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시인을 필요로 했고, 시인은 문자를 통해 왕의 존재를 영구불멸의존재로 격상시켜 주었다."

      이 맥락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호메로스의 기록을 통해 후세까지 알려지게 되어, 영구불멸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문자'의 영향력이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에게는 그런 시인이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던 것이죠.

      4월의 마지막 월요일, 즐겁게 시작하시길 바랍니닷! ^^*

  2. 뿌요뿌요 2011/04/30 18:53

    와~ 이 책 다시 출판되어 나왔군요~

    경대 출판부에서 너무빨리 절판하는 바람에 완죤 실망이 컸었죠.

    어렵게 구해 읽었으나 솔직히 번역이 좀..... 사실관계도 좀 틀린 부분들이 있었고....

    실망이었었죠. 그린비에서 냈다니 왠지 이번엔 제대로 나온 것 같아 기대가 크네요.

    서점 나갈때 한권 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책을 출판해주셔서요!!!

    • 그린비 2011/05/02 09:40

      뿌요뿌요님~ 반갑습니다.
      이번 개정판에는 아쉬워하셨던 부분이 반영되었습니다.
      서점에서 반갑게 만나시길 바랄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