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무기를 우리가 드는 즐거운 상상

태하 씨, 리라이팅 다음 권이 확정됐어요! 오오, 정말입니까? 어떤 책이지요? 그건, 바로, 두구두구두구두구~ 군~주~론~! 오오… 오…? 음…? 군주론이라고요? 네, 군주론. 근데 반응이 왜 그래요? 아… 음, 제가 군주론을 읽어 봐서 아는데……. 그런 듣기 싫고 짜증나는 멘트는 집어치워요. 아, 그러고 보니 정외과 나왔죠? 네에… 맞습니다만 정치외교학과가 아니라 정형외과……. 또, 또, 또, 또 헛소리! 집어치우고, 자, 담당자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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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 책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과의 첫 만남(의 과장된 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응당 반갑고 행복해야 할 새 책과의 첫번째 만남이 왜 저리도 많은 말줄임표로 점철되었을까요? 그것은 (‘제가 읽어 봐서 아는’) 『군주론』이라는 책을 어떻게 ‘리라이팅’할까 하는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던 당혹감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출간된 리라이팅 클래식의 책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친절히 해설하거나, 혹은 독특하게 해석하거나. 하지만 (‘제가 읽어 봐서 아는’) 『군주론』은 비교적 쉽고 메시지도 명확하여 따로 해설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고,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에 대한 책도 이미 꽤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또 그만큼이나 텍스트가 ‘고정’되어 있었기에 어떤 독특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나아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줄 수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았고요. (게다가 『군주론』 원문 자체가 짧아서 두툼한 해설과 연표를 붙여서 책 한 권이 됐는데……)

이런 ‘지레’ 걱정을 가지고 정정훈 선생님이 진행하시는 『군주론』의  강의실을 찾았습니다. 여섯 번에 걸쳐 진행될 이 강의의 강의록을 모으고 다듬어 책으로 내게 되어 있었거든요. 마키아벨리가 살던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의 모습으로 가볍게 시작된 강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틀을 갖추어 갔습니다. 마키아벨리를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한 기본적인 설명들을 거친 후에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색다른 세계가 펼쳐졌는데요, 그 색다름이란 다름아닌 ‘맑스주의적 시각에서의 독해’였습니다.

그 핵심은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더 건강한 정치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그야말로 ‘계기적 인물’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부패한 귀족들, 그리고 덩달아 나태해진 인민들의 습속을 쇄신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그에게 군주란 택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혁명의 무기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측면에서 20세기에 그람시는 맑스주의 혁명정당이 ‘현대의 군주’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마키아벨리를 그대로 되살려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저자는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의 기획을 연결시킵니다. 프롤레타리아와 군주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존재를 결합시켜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것,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반전에 짜릿함이 느껴졌습니다. 허 참, 마키아벨리 그 친구, 현대에 태어났다면 아주 훌륭한 맑스주의자가 되었을 텐데 껄껄껄, 하면서 혼자 웃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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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리로디드」의 한 장면 _ "맑스에게 역사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자비한 현실 비판(즉, 혁명)이 필요했던 것처럼, 마키아벨리에게는 역사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기 위해서 군주의 무자비한 통일전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138쪽)

솔직히 말해서 『군주론』을 리라이팅 한다고 했을 때 제가 보였던 머뭇거림에는 ‘당파적 거부감’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군주론』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까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라면서 온갖 비도덕적인 짓거리들을 일삼는 권력자들의 얄팍한 자기근거의 이미지가 꽤 강하지 않나요? (‘제가 읽어 봐서 아는데’) 분명 『군주론』에는 그러한 이미지를 조장하고 권장할 만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고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장면을 상상하게 됩니다. 기업 회장님들끼리 고급호텔의 홀에 모여 강사를 모셔 놓고 『군주론』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철저히 짓밟는 것이 좋다”는 식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듣고는 ‘교양’을 쌓은 뒤에 회사로 돌아가 노동자들을 철저히 기계처럼 대하고 마구마구 짤라 버리는 거죠. 아무런 ‘반성적 사유’도 없이 말입니다. (아, 순전히 상상입니다만, 쓰면서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하지만 이 책『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에는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유쾌한 전복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지배자들과 권력자들의 무기, 그것이 어쩌면 가장 강력한 우리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저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시각에 입각하여 무엇인가를 읽어 낸다’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느끼게 되었고요. 흥미로운 독서였고, 즐거운 편집이었습니다. 역시 걱정은 ‘지레’ 걱정이 제맛이라는 택도 없는 소리를 해대면서, 마지막으로 오늘의 교훈 하나 남기지요. “뭐뭐 해봐서 안다”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고요.

- 편집부 태하
2011/04/27 09:00 2011/04/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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