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공간』을 읽으며, ‘과거 청산’의 의미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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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노무현은 제주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에는 제주 4·3사건의 유족들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서 있다. ‘빨갱이 사냥’의 이름으로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 그 학살로 인해 냉전의 폭력성이 역사의 유해처럼 각인된 곳. 공항에 내린 노무현에게 제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꾸려 50여 년 전 제주에서 발생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케 했다. 그리고 이날 제주에 도착해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유족 앞에서 정부의 공식 사과문을 발표한다.

과거사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혹은 과거를 ‘청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노무현이 제주에 가서 청산하고자 했던 과거는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일어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었다. 그에게 그 과거는 억압적 국가권력이 일으킨 “과오”와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 4․3사건 사과문 중에서, 강조는 인용자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곧 냉전 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4․3의 대량학살은 냉전에 의한 것이고 그 냉전의 질서 속에서 국가가 범한 “과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고. 그 비극의 역사를 끝내고 미래의 화합을 가져와야 한다고.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말한다. 20세기는 총력전과 제노사이드로 얼룩진 야만의 세기였고, 이제 그 야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그런데 그럴수록 의문이 든다. 정말 우리가 청산해야 할 과거와 온전히 직면한 적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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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노라는 "우리가 기억에 대해 많이 언급하는 것은 이제 더는 기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여는 말」, 『기억의 공간』, 9쪽)

언젠가부터 내 마음을 불편케 한 말이 바로 저 ‘청산’이라는 단어다. 청산하겠다니 뭔가 마음이 불편해진다.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치유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과거가 야만적이었다면, 그 야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야만의 상처를 안은 이들의 언어로 충분히 재현돼야지 않겠는가. 가해자의 사과로 청산될 과거라면, 처음부터 ‘야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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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재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Erinnerunsräume)에서 과거 재현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어 ‘Erinnerung’을 사용한다. 이 책에서 ‘회상’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맥락에 따라 ‘회상기억’ 혹은 ‘기억’으로 번역되기도 했다)는 언젠가 경험했지만 기억의 심연에서 머뭇거리는 것, 억압되어 인식되지 못했던 것을 의식의 표층으로 불러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아스만이 회상(Erinnerung)이라는 개념을 트라우마와 연관시켜 사고한다는 점이다. 회상되어야 할 과거는 트라우마의 흔적을 안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언어로 충분히 재현될 수 없는 난점을 갖는다.

트라우마는 몸에 직접 각인되어 그 경험을 언어적으로 작업하여 해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트라우마의 경험은 서사가 불가능하다(『기억의 공간』, 359쪽).

트라우마란, 자아를 압도하는 어떤 경험이 인간의 기억에 새겨놓은 폭력의 흔적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간 것을 회고하기 위해 먼저 저 트라우마의 강을 건너야 한다. 물론, 모든 기억이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어제 한 일들 모두가 상처인 것은 아니듯 말이다. 아스만은 말한다. 20세기가 근본적인 트라우마의 경험을 선사했다고.

고대 그리스 시대에,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기억이란 직접 보거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회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문자나 그림은 인류의 기억을 개인의 영역에서 집단과 세대 간의 관계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매체가 개인과 개인, 세대와 세대의 사고를 연결해 주는 가교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기억은 기록된 것을 통해 전승된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는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고대 기억술의 전통에서는 예술이 기억을 도약하게 해주었다. 그때는 예술이 기억의 통로를 밝혀 주고 신뢰할 만한 이용 가능성을 열어 주면서 기억을 돕는 보조 기술의 역할을 하였다. 새로운 기억술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시작한다. 그 새로운 기억술은 망각하기 전이 아니라 망각 후에 온다(494쪽).

고대 그리스에서 시인들은 시를 통해 왕의 업적을 칭송하며 후세에게 그 업적을 전달한다. 그림은 인류의 경험을 암호화된 이미지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인류 경험의 보편성을 창조해 낸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기억의 매체였다. 그러나 20세기의 제노사이드는 먼저 경험을 재현할 언어의 코드를 박탈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단절을 구축한다. 망각이 기억에 선행했다는 것, 이것이 20세기에 나타난 기억 형식의 가장 결정적인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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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눈물 흘리는 여인> _ 게르니카의 폭격 사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 이 폭격 사건의 주된 목적은 독일의 폭탄과 전투기의 성능 시험 및 다리 파괴였다고 한다.

제노사이드란 넓게 볼 때 우리말로 ‘대량학살’, ‘집단학살’ 등을 뜻하는 개념이다. 이때 ‘대량’과 ‘집단’이 어느 정도의 양을 의미하는지는 여기서 중요치 않다. 문제는 그 경험이 우리의 기억에 하나의 장막을 쳤다는 점에 있다. 20세기에 와서 기억은 무엇보다 망각을 경유해야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문자나 그림을 통해 기록된 것 저편에서 남아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재현을 가능케 할 또 다른 언어의 응답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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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과거 청산’의 문제로 돌아오자. 국가는 가해자로서 희생자들의 유족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한다. 오늘날 과거 청산이란 가해자로서의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형식을 취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피해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상흔으로 얼룩진 그들의 목소리는 기록되지도, 서술되지도 못한 채 가해자의 선언 저편에서 부유한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사과가 아니라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역사를 새롭게 서술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은 기억 형식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분석해 가면서, 20세기 이후 기억의 문제가 처한 이러한 딜레마를 드러내 준다. 20세기 이후 ‘기억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20세기의 시대사가 낳은 폭력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오늘날 『기억의 공간』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이 바로 이러한 기억형식의 변화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포착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편집부 고태경
기억의 공간 - 10점
알라이다 아스만 지음, 변학수.채연숙 옮김/그린비
2011/05/02 09:00 2011/05/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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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나 2011/05/05 23:49

    '청산'이 아니고 '극복'이 옳지 않을까요?.
    청산은 과거의 것을 부정하며 없앤다는 것이지만, 과거가 그렇게 쉽게 없어지고 지워질 수 있을까요? 극복이라는 개념을 통해 피해자들의 상처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픔을 애도하고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대학때 수업시간에 배웠던 게 생각나네요.
    전진성 교수님의 '어떻게 부담스런 과거와 대면할 것인가? ' 라는 논문을 보시면 괜찮은 논의가 될 것 같네요. 여기서도 '극복'이라는 개념이 나오죠. 독일에서는 청산을 넘어 극복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나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문화적 기억물을 통한 재기억으로 이어가고 있답니다.

    4. 3 이 과연 청산되었을까요? 가해자의 사과는 당연한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청산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달리보면 청산은 또다른 아픔과 무관심을 유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알라이다 아스만의 말처럼 '기억'을 통해서 트라우마를 겪은 피해자들을 보듬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것이 4. 3을, 역사적 과오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 고태경 2011/05/06 11:09

      루나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독일에서 사용하는 '과거극복'(Vergangenheitsbewältigung)은 그 어조가 청산과는 꽤 다른 듯합니다. 이 작은 어조의 차이 하나에도 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네요. 답글 감사드리구요. 다른 글에도 또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 그린비 2011/05/06 11:17

      루나님 안녕하세요.
      단어의 의미와 사람들의 태도가 이어지는 것을 보며, 제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픈 집합적 기억들, 이것을 역사라고 부른다면 루나님 말씀처럼 청산이 아닌 '극복'이 더욱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블로그에서 자주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