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영구보존성, 문자에 대한 열망

“그림이 지나간 것을 회상하듯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그저 원상의 희미한 복제를 제시하는 반면, 문자는 미래를 향해 살아 있는 정신을 방사한다.”(『기억의 공간』, 261쪽)

그림은 기본적으로 재현(representation)의 논리를 갖는다. 그림은 이미 존재했던 것을 다시 드러내는 것(re-presentation)이며, 언젠가 존재했을 거라 상상되는 것을 이미지화하는 행위를 통해 탄생한다. 그러나 문자는 조금 달랐다. 문자는 이미지화보다는 기록의 기능을 더 강하게 띠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부터 18세기까지는.
서구의 르네상스 시대부터 문자는 무엇보다 기억의 가장 탁월한 매체로 간주되었다. 그림과 건축물은 세월이 지나면 낡아 버리지만, 문자는 종이와 쓸 도구만 있다면 영원히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눈앞에 종이와 펜이 있다면, 당신이 쓴 기록이 타인과 후세에게 전해져 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에 종이가 발명되면서 문자의 역할은 서구인들의 기억의 영구보존성에 대한 열망과 결합한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다음 글을 인용하며 르네상스 이후 지속된 문자에 대한 서구인들의 형이상학적 태도를 묘사한다.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전승된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비교할 수 없다. 지나간 삶이 남긴 잔여물, 건축물의 잔해나 도구들 혹은 무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그 위로 불어닥친 시간의 폭풍으로 풍화되고 없다. 그러나 문자의 정신은 어찌나 순수한지 그것이 전승되어 해독되고 읽히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이기라도 한 듯 우리에게 말을 한다.(본문 256쪽에서 재인용)

문자는 기본적으로 영원성과 결합된 매체로 간주되었고, 현재를 미래로 연결해 주는 매우 특수한 매체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가다머는 말한다. 문자의 해독을 통해 우리는 ‘종이’라는 죽은 물질 속에서도 살아 있는 무언가를 만나게 된다고. 그리고 아스만은 말한다. 서구의 정신을 순수하고 영원하게 보존할 매체로 문자가 부상하게 되었다고. 문자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을 현재의 우리 삶에서 재생하는 능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시간의 속박에 묶인 필멸의 존재 인간을 영원과 무한의 강으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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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상형문자, 기록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문자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동시에 기억에 대한 열망과 연결되어 있다. 아스만이 이 책에서 서구의 ‘문자 형이상학’이라 부른 서구인들의 문자에 대한 찬양은 동시에 기억의 영원성에 대한 열망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기억의 영원성에 대한 열망은 기억을 통한 존재의 무한 지속성에 대한 열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18세기까지 기억은 문자의 기록을 통해 보장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림 이미지와 몸

그러나 문자의 헤게모니는 18세기 이후 지속될 수 없었다. 문자는 무엇보다 기록되지 않는 것들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림은 달랐다. 그림은 문자 기록의 투명성과는 다른 어떤 것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것과는 다른 어떤 것, 고정된 의미와는 다른 무언가를 말이다.

텍스트에 입각한 유산은 대낮처럼 환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림이나 흔적에 입각한 유산은 어둡고 수수께끼 같다. 텍스트와는 대조적으로 그림은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결정되어 있기도 하다. …… 기억 속에서 그림은 무엇보다도 언어 작업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등장한다.(297쪽)

문자와 그림은 기억 보존매체로서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때 관건은 문자와는 달리 그림이 재현하는 것이 어떤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림은 문자와 같이 음절, 단어 그리고 문장으로 명료하게 의미 구분되지 않으며, 색과 선의 불명료한 결합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창조해 낸다. “기억 속에서 그림은” “언어 작업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등장”하고, 이러한 그림의 다른 메시지 형식은 흔히 ‘텍스트’와 대립되는 개념인 ‘흔적’의 형식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림은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흔적처럼 보존하며 수수께끼 같은 어둠의 심연을 열어 낸다. 여기서 우리는 기록된 것과는 다른 기록되지 않은 것들의 역사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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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 <헤겔의 휴일> _ "나는 헤겔이 두 가지 상반되는 작용을 하는 이 물건들에 아주 민감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물을 허용치 않는 동시에 물을 허용한다. 나는 그가 휴일처럼 즐거워하거나 재미있어 했으리라는 생각에서, 이 그림을 헤겔의 휴일이라 부른다."

한편, 몸은 문자나 그림과는 달리 메시지 표현 주체 그 자체에 내재한다. 인간의 눈이 망막의 내부를 볼 수 없듯이, 인간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의 흔적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문제는 몸이 주체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기억의 흔적을 보존하는 매체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몸은 어떻게 기억을 보존하는 것일까? 아스만은 몸과 기억의 문제를 다루며 흥미롭게도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자아의 정서를 압도하는 경험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그 상흔(trauma)의 경험을 온전한 언어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녀에 따르면, 몸에 새겨진 트라우마의 기억은 크게 두 가지 표현양식을 통해 환기되는 것이다.

말은 몸에 새겨진 기억의 상흔을 재현하지 못한다. 따라서 언어는 트라우마에 대해 양가성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공포를 추방해 주는 중요하고도 삶에 절대적인 말, 즉 주술적이고 심미적이고 치유적인 말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를 싸고 있는 빈껍데기인 창백하고 일반적이고 통속화하는 말이 있다.(353~354쪽)

말은 트라우마에 직접 가닿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트라우마의 경험을 왜곡하거나 통속화하게 된다. 통속화한다는 것은 트라우마에 각인된 충격과 혼란이 일상어에서는 배제된다는 것, 그 충격이 제거된 단어의 빈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아스만은 말한다. “트라우마의 경험은 서사가 불가능하다”고(359쪽). 문자는 기록하고, 그림은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이미지 체계 속에서 재현하지만, 트라우마에 의해 기억을 가능케 할 언어를 잃은 몸은 그러한 재현의 가능성 일체를 박탈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몸의 기억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 인류사가 지나칠 수 없었던 경험이 있다. 홀로코스트가 그것이다.

홀로코스트와 재현

홀로코스트는 기억될 수 있는 것일까? 기억될 수 있다면, 누가 무엇을 통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인가? 이전까지 기억의 문제가 기억 매체의 영구보존 가능성에 의존해 논의되었다면, 적어도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 문제는 과거의 재현양식 그 자체의 가능성을 문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홀로코스트는 기억 이전에 기억을 가능케 할 언어 자체를 박탈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봤듯이, 서구 매체사에서 기억은 크게 볼 때 문자와 그림이라는 두 가지 보존 매체를 통해 유지되었다. 문자는 시간의 풍화 속에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찬양받았고, 그림은 문자가 재현하지 못하는 비가시적 지시물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그러나 과거를 재현할 매체가 존재하더라도 매체를 통해 표현될 경험 자체와 우리가 직면할 수 없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20세기의 제노사이드 경험은 인류에게 시대의 트라우마를 남겼고, 그 트라우마는 인류의 과거와의 직면 자체를 불가능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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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 한국 사회에서도 전쟁은 큰 상처로 남아 일부에서는 그 상처를 환기시키는 것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때 트라우마란 어떤 것일까? 아스만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가능성에 대해 논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트라우마’의 개념에 주목한다. 일반적으로 상흔(傷痕) 혹은 외상(外傷)으로 번역되는 트라우마는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이자 자아에 뚫린 구멍이며,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비가시적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트라우마가 비가시적 흔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흔으로 각인된 경험들을 기억/기록의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트라우마가 자아에 뚫린 구멍이라면, 현재의 온전한(혹은 온전하다고 가정된) 자아를 유지하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먼저 그 트라우마의 기억으로부터 도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 문제는 기억 매체의 보존성 자체가 아니라, 시대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기록될 수 없었던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하는 것에 모아졌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기억의 난점에 주목한 철학자였다. 그는 기록과 기억을 대립시키는데, 이는 기록된 것 속에서는 우리가 직면해야 할 상흔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묘사를 통해서 어떤 내용이 기억에 수용된다. 그래서 그런 기록은 망각을 막아 주는 좋은 보호막인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 왜냐하면 기록된 것만이 다시 삭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땅히 기록할 장소나 시간이 없어서 기록되지 못한 것은 …… 달리 말해 가능한 경험의 소재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동시에 잊힐 수도 없다.(본문 356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한편에는 기록된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마치 우리에게 지나간 것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면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들은 기록될 수 없었고, 따라서 기억의 가능지평 자체에 속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아스만은 이 문장을 인용하며 리오타르가 기존의 기념비와 문자기록들을 망각의 형식으로 보고 있음을 강조한다. 기록된다는 것은 동시에 기억의 가능지평을 확정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고, 따라서 그 가능지평에 속할 수 없는 것들을 양산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 혹은 자아의 찢겨진 흔적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이 배제된다.

기억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지나난 것들을 다시 모아내는 것(re-membering)을 의미한다. 그런데 20세기가 우리에게 던진 과제는 그 다시 모아냄의 과정 그 자체의 핵심에 자아의 찢겨진 흔적이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은 그 찢겨진 흔적과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이 트라우마의 경험을 관통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되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시대의 트라우마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재현양식

아스만이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 문제를 논하기 위해 주목하는 것은 20세기 후반 독일에서 나타난 몇 개의 예술작품들이다. 특히 그녀가 주목하는 것 중 흥미로운 것들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건축물 「상실의 집」(The missing house)과 나오미 테레사 살몬(Naomi Tereza Salmon)의 연작 사진 「아세르바테」(Asservate)이다. (볼탕스키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이 책에 대한 소개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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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살몬의 연작 사진,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적 삶이 파괴된 이런 광적인 사건이 있음으로 인해서 물건들은 수집되고 분류되어 서고에 보관된다."(같은 책, 519쪽)

살몬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발견된 희생자들의 유품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진 촬영을 통해 그녀가 취한 전략은 유품들의 이미지를 모든 시공간적 관련성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기억행위는 기억의 대상과 관련된 연상행위를 촉발한다. 연상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그 대상과 얽힌 과거의 사실들을 재구성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흔히 사용되는 연상방법이 다름 아닌 압축과 전치의 방법이다. 예컨대, 아우슈비츠 부근에 비석들이 줄지어 있다고 해보자. 병렬된 비석들을 보며 사람들은 바로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들을 연상하게 될 것이고, 그 희생을 낳은 시대의 야만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반면, 살몬이 이 연작 사진을 통해 시도하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연상 작용과의 단절이다. 연상 속에서 기억은 이미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이 안고 있던 개개의 고유한 삶과 희생 과정에서 겪었던 구체적 갈등들을 추상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희생자’라는 명칭 속에서 개개의 삶들은 그 고유명을 잃고 ‘희생자’라는 익명의 집단정체성 속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이때 이러한 환원을 통해 형성된 ‘아우슈비츠 = 야만’이라는 등식이 역사의 기록으로 고착되어 이미 해결될 수 없는 과거의 오류로 환원되는 순간, 비석 속 존재들의 고유명은 비가시화되고, 학살의 현장에서 외쳤을 그들의 목소리 역시 사상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의 연상 작용이 낳는 이러한 난점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살몬은 사진 속 유품들을 고립된 공간 속에서 형상화하면서 이 문제를 돌파하고자 했다. 살몬은 모든 공간적 의미망들을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유품들이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었다는 것, 그 고통의 언어들이 모든 역사적 이해지평으로부터 추방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나아가 우리가 지금 그 유품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지평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환기시켜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살몬의 연작 사진은 기억의 연상 작용 자체에 대한 근본적 단절이자, 트라우마의 재현양식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스만은 살몬의 이 작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 앞에서 소외된 대상들의 분명한 윤곽들이 드러나게 된다. 오염되지 않은 배경은 역동적 콘텍스트가 파괴되었음을 말없이 입증해 준다. 그런 맥락에서 유품들이 발견되었다. 이런 배경은 죽음의 제조기를 남긴 백지상태를 보여 준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침묵의 빈 공간을 결코 비켜 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이미지들은 어떠한 징후의 미화 작업도 피해 간다.(521~522쪽)

연상 작용을 통해 폭력의 현장에서 벗어난 이들이 주관적으로 행하는 미화작업이 이 작품 속에서는 실패하게 된다.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억이란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억이 파괴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환기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살몬의 연작 사진 속에서 모든 유품들은 고립되어 있다. 그 날것의 고립성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해석하지 못한 무엇이 있음을 알려 준다.


- 편집부 고태경
기억의 공간 - 10점
알라이다 아스만 지음, 변학수.채연숙 옮김/그린비
2011/05/20 09:00 2011/05/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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