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원리는 복잡할 게 없다고 말한다. 모든 국민이 지배하는 게 민주주의라고(이름하여 국민주권!!). 다만 모두가 청와대에 앉아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으니 현실적으로 투표를 통해 대표를 뽑는 거라고(이름하여 다수결!!). 그래서 그 대표가 통치를 하는 거라고(이름하여 대의제!!). 민주주의 원리는 단순한데 다만 그것의 현실화가 어렵다고. 그래서 민주주의는 단계를 밟아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는 거라고(이름하여 민주주의 발전론). 민주주의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 견고한 상식과 통념을 깨기 위해 고병권은 플라톤부터 최장집까지 민주주의를 다시 읽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

국민주권은 과연 신성불가침의 것인가

민주주의는 특정한 지배체제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을 글자대로 풀면 ‘데모스(민중, demos)의 힘(kratos)’을 가리킨다. 주권은 모든 권력의 원천인 최고권력을 이르는 말로서, 일차적으로 입법권으로 나타난다. 주권자는 모두가 복종해야 할 명령으로서의 법을 제정하는 자로서, 국민주권은 그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국민주권만큼 민주주의(데모스의 힘)를 잘 보여주는 말이 또 있을까. 흔히 국민주권 하면 국민이 엄청난 힘을 지닌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 믿는 국민주권 체제는 국민이라는 이름의 절대권력이 한없이 나약한 개별 인민을 다루는(양육하든 통제하든)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주권자라는 점에서 아무도 개별적으로는 주권자가 아닌 체제. 주권자로서 국민은 참으로 신성하고 전능하지만 개별적으로 참으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다. 전능함과 무력함이 함께 모인 곳, 그곳이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자부하는 국민주권 체제이다.”(68쪽)

어떻게 전능한 국민주권과 무력한 인민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국민주권은 이질적인 다중(多衆)이 균질적인 국민(國民)이 되면서 만들어진 근대의 형성물이다. 다중은 단지 다중이라는 사실, 즉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주권을 표상할 수 없다. 국가 안의 국가처럼 존재하는 다양한 서약단체들, 가령 가문이나 마을, 동업조합 등을 해소함으로써 대등한 개인들(평등한 법적 주체로서의 개인들)이 각각 전체와 서약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다중이 ‘국민’이 되었을 때, 비로소 국민주권은 만들어진다. 그러나 국민주권은 현실에서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 시간과 공간, 능력 등의 이유로 모든 국민이 직접 통치에 참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효용성과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이런 식의 논의에 아주 익숙하다. 대의제는 여러 제약 때문에 불가능했던 인민의 직접 통치를 간접적 형태로나마 가능케 한다. 이제 대중은 투표(다수결)를 통해 자신이 국민으로서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4년에 한 번 하는 투표로 우리는 '충분히' 주권을 행사한 것일까?

‘주권’과 ‘국민’이 가상적이라면 대표는 현실적이다. 대표는 가상적으로 상정된 힘을 현실적으로 행사한다. 만약 대표가 없다면 주권은 가상적인 채로 남을 것이다. 현실에서 민주주의 논의가 눈에 보이는 대의제를 둘러싸고 이뤄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대의제 옹호론자는 말할 것도 없고, 대의제를 부정하고 직접민주주의를 꿈꾸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대의제에 대해 물으려면 일란성 쌍둥이격인 국민주권을 당연히 물어야 함에도 국민주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은 채 국민주권의 직접 실현을 추구할 뿐이다.

그럼 직접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저자는 대의(대표)를 지양한 직접민주주의는 어떤 기술적 조건(가령 전자통신기술의 발전)이 마련된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대표 없는 국민주권’을 꿈꾸는 것은 ‘상품은 원하면서 화폐는 원하지 않는 것’과 같고, ‘교황을 없애면 가톨릭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주권과 국민을 동시에 비판하지 않고서는 극복되지 않는다. ‘주권-국민-대표’의 도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으면, 대의제 민주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직접민주주의의 시도는 허무주의 혹은 무의미한 폭력 속에 빠져들거나 다른 형식의 대의제로 귀착되고 만다. 근대민주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정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주권이 문제되고, 국민이 문제되고, 대의가 문제되는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찾아져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자의 통치인가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다수결에 의한 다수자의 통치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다수결’과 동일시했던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가들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그리스의 민주주의 비판가들은 경멸적인 어감을 담아 민주주의를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민주주의, 즉 데모스의 힘이라는 말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축소하고 그것을 숫자에 의한 결정인 것처럼 비아냥댔다.

“만약 수적인 ‘다수’로 모든 걸 결정하는 정체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민주주의 이념이란 기껏해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과 통념 이상이 아닐 것이다. 이 경우 통념에 맞선 소수적 투쟁이야말로 민주화투쟁에 합당한 이름이지, 다수 의견을 이유로 그것을 제압하는 게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만약 어느 논자의 말처럼 민주주의의 핵심이 ‘정당들이 득표를 위해 투표자 다수의 관심이나 선호에 반응하는 노력’에 있다면, 소수자들은 아마 그런 민주주의에 의해 폭력적 배제를 경험할 것이다.”(41쪽)

수적으로 다수를 형성한 삶이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해 우위를 차지할 근거는 없다. 우리는 다만 교섭하고 소통하고 서로를 변용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역량이 바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역량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_ 플라톤은 스승을 죽음으로 몰고 간 민주정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자격자와 비자격자를 끊임없이 구분했고, 정치는 '지혜로운 자'가 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격 있는 소수대표자의 정치는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는 도달할 목표인가—정치학자 최장집에게 묻는다

2008년, 서울시청 앞으로 쏟아져 나온 대중들은 1987년 서울시청 앞에서만큼이나 민주주의를 묻고 요구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한’ 민주화에 대한 이 요구의 정체는 무엇인가. 민주주의 단계론(혹은 발전론)은 과거의 민주화는 이 단계까지밖에 나가지 못했는데, 이를 다음 단계, 다음 영역, 다음 수준까지 확대·성숙시켜야 한다는 이론을 가리킨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논의에 참여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불완전한 민주화로 정의하고, 현재의 민주주의 위기는 그 불완전한 민주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의를 주도하고, 나름 이정표 역할을 한 것이, 2002년에 출간된 정치학자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다.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최장집의 견해는 대규모 사회운동의 출현에 대한 부정적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단계를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단계와 ‘민주주의의 제도화’ 단계로 나눈다. 그가 볼 때 2000년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의 재등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 민주주의가 아직도 안착되지 못했다는 증거, 다시 말해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2008년의 대규모 촛불시위도 그에게는 일종의 퇴행이거나 병리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운동에 대한 필요는 그만큼 적어지기 때문이다.”(88쪽)

그러나 문제를 이런 시각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운동이 어떤 새로운 주체를 낳고 있는지(가령 전통적 대학생이나 노동자와는 다른 비정규직, 중고생, 이주노동자들의 등장), 그 운동의 구체적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더 나아가 민주주의 이념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민주화’가 어떤 단절과 변화를 겪고 있는지 놓치고 만다.

80년대 민주화 시위는 한마디로 진정한 ‘대표’를 찾는 운동이었다. 87년 운동의 대표적 구호는 알다시피 ‘직선제 쟁취’였다. 참된 정치적 대표(대의)로서 직선 대통령, 운동의 참된 대의기구로서 민주노조와 학생회 등이 당시 민주화 운동이 낳은 주요 성과였다. 그런데 2000년대의 문제들은 대통령이 진정 국민이 뽑은 사람이 아니어서도 아니고, 노동조합이나 학생회가 진정한 대의기구가 아니어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80년대 민주화가 낳은 대의기구들이 2000년대의 사안들에 무능하다는 것, 심지어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점에서 한국사회의 90년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90년대는 한편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는 때였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때였다. 군사정부가 문민화되고, 투표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며, 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이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다수 대중들은 부와 권력, 여론에서 바깥으로 내몰리는 주변화를 경험했다. 대의제가 발달했지만, 대의제 프레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마치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제도화되었지만, 동시에 노조 가입이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폭증한 것처럼 말이다. 한마디로 2008년은 1987년의 성숙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6월 항쟁 당시의 사진 _ "민주주의에서는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심지어 숫자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민주화 투쟁이란 그런 근거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폭로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7쪽)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문제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가진 후진사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어떤 완성모델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발전론이 완성모델로 삼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조차 2000년대 들어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거기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논란이 된 대부분의 사안에서 현재의 대의시스템, 특히 지배정당들은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발전의 관점, 성숙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에는 끝이 있고, 따라서 “아직도 거리 시위냐”하는 비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선형적 발전의 끝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완성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어떤 체제나 시스템이 아니라, 달라지는 조건에서, 그때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데모스의 힘’이다.

민주주의는 좋은 지배자를 가진 삶이 아니라 지배자 없는 좋은 삶이다

“오랫동안, 적어도 플라톤 이래로 서구의 사상은 정치가를 ‘좋은 목자’의 이미지로 그려 왔다. 정치학은 ‘좋은 목자’를 선별하는 기술로 축소되곤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근대적 이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주의란 인민이 자기 삶을 관리하고 육성해줄 좋은 대표를 찾는 일인 것처럼 간주되곤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좋은 목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이 양떼로 전락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삶을 가꾸는 능력이 없을 때, 대중은 삶을 지배하는 권력에 자신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무능과 두려움 속에서 이 대표, 저 대표를 갈아타는 일만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 운명은 결국 엘리트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데모스의 힘’이 아닌 ‘엘리트의 힘’이 민주주의의 역량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109쪽)

익숙한 민주주의와 결별할 때 새로운 민주주의가 도래한다. 아니 민주주의는 항상 새롭게 도래하면서 기왕의 민주주의를 낡은 것으로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저자는 지배와 명령의 거부가 또 다른 지배와 명령의 발생으로 이어지지 않는 삶의 형식, 복종과 의탁이 아니라 자기지배와 자기배려가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 복종이 아닌 평등한 협력을 통해 큰 힘이 발생됨을 알려주는 삶의 형식을 발명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민주주의라고 한다. 저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집권’을 둘러싼 투쟁공학으로 축소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 즉 ‘데모스의 힘’은 사람들의 복종을 끌어내는 통치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권력이 유포하는 유혹이나 공포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의 크기, 권력조차 그런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의 크기로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도래한 민주주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싸움은 우리 삶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과, 이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대안적 형식의 발명을 둘러싸고 벌어질 것이다.

- 대표 유재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2011/05/23 09:00 2011/05/23 09:0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141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가끔오는 2011/05/23 15:12

    한국 학자가 쓴 진보적 민주주의론 책이 정말 읽고 싶었는데 딱 나왔네요ㅎㅎ 바로 사러 갑니다~

    • 그린비 2011/05/23 16:26

      고병권 선생님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읽으시고, 강좌도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