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반려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년에도, 몇 해 전에도 반려묘를 떠나보낸 적이 있기에 좀 덤덤해질 수도 있으련만……. 또다시 찾아온 이별은 제 감정을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저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반려묘의 빈 자리였습니다. 늘 앉아있던 공간은 그대로인데 갑자기 그 고양이만 없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회사에 가는 일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슬픈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동안 저는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계속 뭔가 사들였습니다.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 '불필요한 옷을 사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결심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장바구니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지요.(그 짧은 시간 동안 제 마음을 채웠던 것이 오직 '옷 사들이는 습관'이라니, 맘이 아프네요. ㅠㅠ)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TV도 보고 싶지 않고 멍하니 누워 있다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면 마우스 클릭 몇 번 해서 결제하는 과정을 두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깨기 위해서는 더 큰 충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몇 달 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꺼냈습니다. 그 책이 『전태일 평전』입니다.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폐되어 껍데기를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異性)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한 인간이 그의 인간성을 풍성하게 하는 과정은 곧 좁은 자아의 환상을 버리고, 그 껍데기를 깨고, 자신과 이웃과 세계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관심의 햇살이 비치는 곳을 향하여 나오는 과정을 뜻한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283~284쪽

저도 어릴 때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책에서 만난 전태일의 생활은 제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오로지 내일을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제가 지금 느끼는 슬픔, 공허함은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였지요.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 어린 여공들은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잠 안 오는 주사까지 맞으며 밤샘 작업을 했다는 부분을 읽으며, 재단사가 자른 옷감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펴가며 재봉틀을 돌리는 어떤 여공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마음이 허하다며, 그 많은 땀과 손길들을 손쉽게 소비하고 있는 제 모습은 정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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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고된 것 이상으로그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시다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수록 그의 가슴은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그의 울분은 치밀어올라 그의 생각은 깊어져갔다." (『전태일 평전』, 114쪽)

그때 저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지도 않고, 잘 웃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았습니다. 관계 속에 있지만, 소통을 멈추고 혼자 침몰하려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동료들을 위해 화를 내고, 그 장(場)을 바꾸려 했던 전태일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내 생각만 하고 살기도 급급한데, 어떻게 남까지 챙겨?'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탓이겠지요. 저는 전태일이 그렇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던 거죠. 제가 타인과 공감이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생각과 환경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옷을 너무 많이 사는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옷 한 벌을 만들기 위한 누군가의 노동을 떠올렸다면 장바구니를 비우는 데 망설임이 생겼을 겁니다. 주위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웃지 않고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려 애썼을 겁니다. 혼자가 된 것 같은 막막한 기분은 오직 저 혼자 만들어 낸 '상상 속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가 떠나 생긴 마음 속 빈 자리를 꽉 채우고 있던 슬픔, 분노, 자책을 지워버리고, 비어 있는 그대로 두려고 합니다. 때때로 그 빈 자리에 평화시장 재봉사의 손길, 제가 지금 사용하는 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손길들을 초대할 생각입니다. 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이 빈 자리임을 알려주기 위해 고양이가 제 곁을 떠난 거라고, 그렇게 의미부여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야 겨우, 저를 사로잡았던 '상상 속의 감정'들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빈 자리로 인해 오히려 혼자가 아님을, 함께 공감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존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웹기획팀 이민정
전태일 평전 - 10점
조영래 지음/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2011/05/19 09:00 2011/05/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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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2/04/10 17:49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그린비 2012/04/10 18:23

      앗! 브로구님 제보 감사합니다. 수정해서 적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