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민주주의는 주권(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형식의 삶을 일정하게나마 확보한 곳, ‘법대로 사는’ 사법주의를 넘어 ‘사는 법’의 윤리가 구축되는 곳, 바로 코뮨들의 구성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주권을 찬탈하기 전에 주권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에서 시작될 것이다.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77쪽

오늘은 아버지 49재다. 살아생전 “법 없이도 살 분”이라는 얘길 많이 들으셨다. 지금껏 살아온 내 경험으론 대개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키는 편이었고, ‘법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법을 무시하거나 잘 지키지 않았다.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만들면서, 나는 정말이지, 자식 사랑이 지나쳐서 주먹부터 휘둘렀던 재벌총수와는 다른 이유에서 ‘법 없이’ 살고 싶어졌다.

홍대앞 두리반 식당, 내 친구가 운영하던 식당이다.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정말 ‘법 없이’도 살 친구다. 식당을 차리기 위해 몇 년 동안이나 부부가 목욕탕에서 먹고 자며 남의 때도 밀고, 라면도 끓여주며, 한푼 두푼 억척스레 돈을 모았다. 그걸 밑천으로 차린 식당에서 칼국수 팔아 그럭저럭 애들 공부시키고 살았다. 식당을 한 지 3~4년쯤 되던 2009년 12월 24일, 철거용역업체가 늘 하던 ‘법’대로 식당의 탁자며 의자를 모조리 들어내고 출입구를 철판으로 막아버렸다. 그날, 친구는 한밤중에 철판을 뜯고 들어가 무작정 농성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농성이 두 번의 겨울을 넘겼고, 이제 두 번의 여름을 맞고 있다. 그동안 몸으로, 재능으로, 성금으로, 격려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싸움을 함께했다. “옆에서 함께해준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진작 포기했을 거야.” 친구의 말 속에서 나는 “‘법대로 사는’ 사법주의를 넘어 ‘사는 법’의 윤리”를 요구하는 ‘대중의 힘’을 보았다. 민주주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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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끊긴 채 300일을 넘긴 두리반의 투쟁은 아직 진행 중이고, 두번째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법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줄 수 없다면 법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데모크라시)는 데모스와 크라토스가 합쳐진 말로, 본래 뜻은 ‘대중의 힘’이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 들어 대중은 국민에게, 힘은 주권(법)에게 각각 그 자리를 넘겨주면서, 이제 민주주의(사는 법)는 법치(법대로 사는)를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국민으로서 똑같이 고귀합니다. 그러니 누구도 법 앞에서 평등한 거지요.” 어떻게 해서 ‘대중의 힘’이 ‘법의 힘’으로 바꿔치기 되었을까(네, 맞습니다. 책 보시면 압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바꿔치기가 잘못된 바꿔치기라는 거다. 제대로 된 바꿔치기라면, 법의 힘이 막강해져 가는 만큼 대중의 힘도 막강해져야 하는데, 현실은 반대다. ‘도시재개발법’의 비호를 받는 강제철거의 폭력 앞에 철거민의 삶은 벗겨진 채 고스란히 노출된다. ‘비정규직보호법’ 앞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조 가입조차 불가능하다. 노조의 ‘합법적’인 투쟁에 돌아오는 건 법의 이름으로 발부되는 손해배상청구서다. 내가 철거민이 아닐 때, 내가 비정규직이 아닐 때, 다시 말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국민일 때, 법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법대로 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하에서, 밧줄 위를 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언제든지 타던 밧줄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다. 언제든 ‘국민’에서 ‘비국민’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제는 물어야 한다. 법이 나를 대신해서 생각해주고 판단해주는, 법에 기대서 사는 그런 삶 말고, 나의 감정, 나의 양심, 나의 생각에 충실한 삶의 양식과 그 가능성에 대해. 법대로 사는 게 더 이상 편하지 않고 불편해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는 법’의 윤리를 우리의 삶 속에 구축할 수 있을 것이고, 내 친구의 농성도 그때야 비로소 끝이 날 것이다.  

- 대표 유재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2011/05/25 09:00 2011/05/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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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pela 2011/05/27 10:32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보도록 하자."<시민의 불복종>소로우. 글을 읽다보니 이 글귀가 생각나는군요..

    • 그린비 2011/05/27 11:17

      hpela님! 멋지십니다! 짝짝짝!
      법이 행동과 사유에 제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라는 생각이 드네요. 법은 꼭 지켜야 한다, 법이 없으면 혼돈 상태가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는 문장이 정말 멋지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