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마키아벨리를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이전에는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쯤으로 여겼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호감형이네?'라고 느꼈지요.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고정된 이미지로 상대를 본다면 상대의 다른 모습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상대에게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정된 이미지를 깨는 과정이 계속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맑스와 마키아벨리, 언뜻 들으면 상반되는 두 사람이 공명하는 지점을 고민한 정정훈 선생님의 인터뷰를 함께 만나 보시죠. 마키아벨리의 비정하고 잔혹한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맑스주의의 역사에는 승리의 기록보다는 패배의 기록이 더 많았을까? 왜 자유와 평등을 보편화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적 열망이 담긴 투쟁들은 거의 대부분 좌절해야만 했을까?
  이런 질문 속에서 나는 마키아벨리를 읽는다. 마키아벨리는 아름답지만 추상적인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논리가 지배하는 처절한 현실에 철저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정치적 사유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거대한 힘에 함몰되지 않았다. 그의 사유를 추동했던 것은 인민의 해방이라는 '이상'이었다. 필요한 것은 그 이상을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구현하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의 기예였다. 자유를 위한 투쟁, 평등을 위한 싸움이 승리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현실성을 나는 마키아벨리로부터 배웠다. 그와의 만남을 통하여 맑스주의와 민주주의가 한갓 도덕적 이상과 추상적 원칙에 매몰되어 현실의 투쟁 속에서 무력화되어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의 중심'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책머리에」,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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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현재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사회적 배제와 문화정치’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을 동료들과 함께 썼고, 『부커진 R』, 계간 『문화/과학』, 『실천문학』 등에 글을 발표했다.



1. 군주론은 고전 필독서로 많이 꼽히는데, 책의 어떤 면모 때문일까요? 선생님은 군주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마키아벨리 이전의 정치사상은 정치를 신의 뜻에 따르거나 세계의 초월적인 원리에 순응하는 과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주체적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파악하고 그 원리에 따라서 행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인간의 의지 문제로 변화시켰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근대의 주체철학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죠. 군주론이 고전이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키아벨리가 근대적인 정치 개념을 잘 보여주는 사상가라는 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사상과 현실적인 세계에서 어떻게 힘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는 정치사상을 구분한다면, 후자의 정치사상(현실주의 정치사상)의 시발점을 마키아벨리라고 많이들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근대 정치사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할 때 그 기원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 마키아벨리는 기득권을 옹호한다는 이미지가 강한 것 같습니다.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어떤 면모를 부각시키고자 했나요?

군주론에 보면 유명한 말이 하나 있어요. “상대를 밟을 때에는 저항의 여지가 없이 아주 확실하게 밟아야 한다” 이런 말이 있거든요. 영화 친구에도 인용되었을 정도로 잘 알려진 말입니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도덕적인 덕목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권력을 유지할 수가 없고 필요에 따라서는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악덕도 행할 수 있어야 강한 군주이고 성공하는 군주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보면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무 짓이나 해도 된다’라는 입장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위의 이야기처럼) 마키아벨리가 직접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거짓말이나 날조된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이 이야기를 어떤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했는지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가 중요하지요.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각각 국가 체제를 이루어가고 있었고, 이 결집된 힘으로 정복전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이 도시국가들이나 군주국가들에서는 귀족들이 인민들을 착취하고 있었는데, 귀족들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할 뿐 통일국가를 만드는 일에는 무관심한 상황이었죠.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귀족들을 어떻게 누르고, 인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이탈리아를 통일시킬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과정에서 정직, 관용과 같은 대의명분만으로 이 프로젝트(통일국가로서의 이탈리아)를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왜냐하면 귀족들이나 도시국가의 기득권자들과 싸워서 이겨야만 통일국가를 만들고 인민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국가를 만들 수 있는데 적들은 그렇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대의명분에 따라서 싸우지 않거든요. 싸울 상대들이 비윤리적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내가 좋은 원칙에 따라서 싸움을 해봐야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마키아벨리는 현실이 윤리나 도덕, 대의명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현실에서 통용되는 싸움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 때로는 비정하고 냉혹한 수단들을 감수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마키아벨리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기존의 이미지만으로 보지 않고) 무엇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비정한 수단을 승인했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3. 그람시, 일튀세르, 네그리 등 소위 ‘맑스주의자’들이 마키아벨리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의외로 느껴집니다. 이들은 왜 마키아벨리에 열광했을까요?

네그리, 알튀세르, 그람시가 마키아벨리에게서 발견하는 지점들은 다 달라요. 네그리는 마키아벨 리가 열어젖혔던 내재성의 정치적 지평을 본거죠. 초월적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리들(네그리적 용어로 말하자면 다중들)이 ‘국가를 창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열심히 봤던 것이고, 이를 구성권력과 연결시킵니다.

알튀세르의 경우는 제가 보기에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정세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구체적인 상황과 구체적인 요소들이 만나는 조건들에 따라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이데올로기 문제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서 ‘군주의 외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또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는 종교의 중요성, 인민들의 습속과 무의식을 장악하는 정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데, 알튀세르는 이 부분을 이데올로기론으로 읽어내지요.

그람시가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과 가장 많이 공명하는 것 같아요. 그람시가 살았던 시대가 20세기 초중반인데, 그 당시 파시스트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람시에게는 어떻게 이탈리아의 해방된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를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던 거죠. 그때 이탈리아는 북부 공업지역, 남부 농업지역으로 구분되는 상이한 사회집단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어떻게 하나의 의지 안으로 모이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 그람시의 중요한 문제의식이었어요. 마키아벨리가 사분오열된 어떻게 이탈리아 인민들을 통일시키고  국가의 형식으로 모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것 처럼요.
이 고민 속에서 그람시는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적 존재, 인민들을 통일시킬 수 있는 존재가 당시 이탈리아 상황에서는 맑스주의(정치) 정당이라는 말을 쓰면서 자신만의 기획을 가지고 오죠. 이런 면에서 셋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제가 봤던 점은 네그리, 알튀세르, 그람시 모두 맑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맑스주의 정치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정치를 도덕의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맑즈가 정치를 이야기할 때 폭력의 기능을 빼놓지 않거든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근본적으로 폭력 혁명이잖아요. 『공산당 선언』에 보시면 부르지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너네(프롤레타리아)는 국가도 부정하고 가족도 부정하고, 폭력을 일삼는 집단 아니냐’고 비판합니다. 맑스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거든요. 우리(프롤레타리아트)는 실제적으로 가족이 해체되어 있는데 국가나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것은 너희들(부르주아지)에게나 의미가 있는거다 라면서 도덕적 관념과 무관한, 도덕적 관념을 넘어서는 정치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서 맑스의 사상이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치는 도덕의 영역이나 초월적 원리의 영역이 아니라는거죠. 그래서 제가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대조를 하고 비교를 하면서 가장 많이 참조했던 사람은 맑스입니다. ‘군주’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읽어 낸다거나 군주정치에서 이행의 문제를 사유하려 했다는 점, 마키아벨리가 했던 인민에 대한 옹호와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옹호했던 점들을 함께 사유했던 것은 맑스(맑스주의)와 마키아벨리의 공명을 보려고 했던 작업이었습니다.

4. 오늘날 다시 마키아벨리를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요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스트레스, 생존 자체의 스트레스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1위라는 발표도 있었구요. 인간의 가장 큰 충동이라는 건 (자기를 보존하는 것,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코나투스) 결국은 생명 유지이거든요. 그런데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는 뭘까요? 가장 근본적인 충동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도덕성, 정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워낙 현 정부가 도덕성이나 정의와는 거리가 먼 행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발은 권력을 사용하는 형태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연예인들이 조금만 삐딱해도 TV에 못나오는 상황을 들 수 있겠죠. 얼마 전, 김미화씨도 라디오 진행을 그만두기도 했구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국민들이 (비도덕적인 상황에 대한) 분노는 있는데, 분노를 표출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도덕성과 정의에 대한 요구가 실제로 가야할 정치의 영역으로 가지 못하고,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만만한 영역으로 가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재도전을 한 것을 사람들은 공정성이 무너졌다고 느끼고 분노하는 현상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부패와 연관이 깊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국가나 공동체의 공동이익을 위해 참여하고 활동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익이 침해되는 상황을 불편해하고 분노하지만, 그 세력과 싸우기에는 힘든 상황이다 보니 (싸우기에) 만만한 대상을 찾는 방식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런 방식은) 좀 위험하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정의가 필요없다’고 말하거나 ‘우리가 힘을 키워서 엎어야 돼’라고 가는 방법도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정치는 궁국적으로 대중들, 인민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들의 정치적 역량을 잘 모아서 이 힘들이 긍정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희생양을 만들지 않고, 정치권력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정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설파함으로써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왜냐면 대다수의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고,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유지하는 강한 지배자들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럼 이들과 싸워야 하는데,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저는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만큼 이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비정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비정한 방법을 승인할 수 있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용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이걸 누가 가르쳐줬는가 할 때, 저는 마키아벨리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을 짓자면 저는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을 하려는 사람들이 마키아벨리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마키아벨리의 책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도 마키아벨리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문제를 성취하기 위해 싸울 때,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도덕에 호소하지 않고 현실이 돌아가는 원리에 입각해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전략들과 정책들을 채택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 상황 속에서도 배워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1/05/25 14:44 2011/05/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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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손잡이 2011/05/26 04:21

    군주론 하면
    '나라를 운용하는데 용병을 사용하지 말아라'
    밖에 기억나지 않는 건 왜일까요 ^^;

    • 그린비 2011/05/26 11:35

      양손잡이님 안녕하세요.
      그 이야기가 나온 맥락을 파악하셨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아닐까요? ^^;
      얼마 전에 미드 <보르지아>를 봤는데, 거기에서도 프랑스 군대 앞에서 (이탈리아) 용병들은 무력하다는 내용이 나왔던 기억이 나요.
      예전에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민족국가 군인들이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생에 대한 욕망이 우선이었던 이탈리아 용병이 더 자연스러웠던건 아닐까...이런 생각도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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