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혹은 뼈 있는 물음: 우리에게 1492년은 어떤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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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년 로마에서 제작한 헨리쿠스 마르텔루스의 세계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메리카는 이미 알려진 대륙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스페인만이 페르난도 왕의 정치적 수완과 콜럼버스의 대담성 덕분에 항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권리를 부여받고,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포르투갈과 노골적인 경쟁을 벌이며) 대서양으로 뛰어들어 인도로 갔다."  -「1부 개요」중

(Tip. 그게 어떤 퀴즈 프로그램이든 가장 익숙한 장면을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딩동. 문제 나갑니다. 세계사적으로 근대를 연 세 가지 사건을 꼽는다면? 학교생활에 충실하셨던 분들이라면, 그리고 평소 남들보다 상식이 풍부하신 분들이라면 바로 ‘프랑스혁명’, ‘종교개혁’, ‘계몽주의의 등장’을 모범답안으로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상식은 없지만 상식도 쌓을 겸 퀴즈 프로그램을 보고 계시던 분들이라면 재빠르게 ‘아, 저거 외워둬야겠다’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줄곧 후자의 입장에서 퀴즈 프로그램을 즐겨 보며, 때로는 맞췄다는 기쁨에 으쓱해하기도, 때로는 상식의 부족함을 탓하며 자학하기도 하던 노-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노-멀한 저에게 이 책, 『1492년, 타자의 은폐』는 다소간 혼란을 안겨 줍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정복이 시작된 ‘1492년’이야말로 바로 (폭력적인) 근대의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1492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discover)한 해입니다. 이 당시 유럽은 사실 세계사의 중심이기는커녕 이슬람제국의 변방에 불과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두셀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던 유럽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껑충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는 때가 바로 ‘1492년’입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무력으로 정복한 이때부터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부와 노동력이 유럽 인구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던 것이며, 에 …… 좀더 ‘톡 까놓고 얘기하면’ 인디오들의 피와 살이 유럽의 눈부신 성장에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합리적 이성’을 내세워 근대를 이끈 서구유럽이 비이성적인 살인과 수탈을 오랜 기간 별 죄의식 없이 행할 수 있었던 건, 타자인 라틴아메리카를 ‘계몽하고 (동일자로) 포섭하기 위함’이라는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존재해 왔던 타자의 역사, 문화, 철학 모든 것이 이러한 논리하에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인디오들의 문화를 차이로서 긍정한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기이함’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를 더 이상 발견(dis-cover)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건 분명 ‘타자의 은폐(cover)’였습니다. ‘근대의 기원’, ‘1492년’에 대한 물음이 이제 단순한 ‘퀴즈’를 넘어 ‘뼈 있는 물음’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헤겔의 유머?

책을 편집하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웃음이 팍 터져 나왔습니다. 헤겔의 인용부분에서 웃음이 터지다니 말입니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헤겔의 유머 몇 자락 소개합니다(헤겔 『역사철학강의』의 내용을 본문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세계사는 동에서 서로 향한다. 유럽은 틀림없는 세계사의 끝이다. 아시아는 시작이다.(본문 18쪽에서 재인용)

아메리카에 관해서, 특히 멕시코와 페루의 문명 수준에 관해서는 많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다. 이들 문화는 매우 특별한 문화로 발전했으나 정신이 접근하자마자 소멸했다. …… 이 사람들의 열등성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분명하다.(본문 19쪽에서 재인용)

흑인의 특징은 의식이 어떤 확고한 객관성을 직관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가 관여하고, 인간의 본질을 직관하도록 해주는 신이나 법률이 그들에게는 없다.(본문 21쪽에서 재인용)

웃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왠지 씁쓸해집니다. 대놓고 웃자니 걸리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불결하거나 이질적인 이미지로 떠올리는 것 외에,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타자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묻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라틴아메리카 대륙과 사람들은 저에게 늘 비슷비슷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의 재현된 이미지들을 밖으로 꺼내어 놓는다면, 이 또한 분명 ‘유머’가 될 것임을 알기에 저, 이렇게 숨어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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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로, <The Supper> _ 콜롬비아 출신 화가 보테로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크기에 따라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뒤에 걸어가는 여성과 식사하는 남성의 차이를 보라!

두셀은 이처럼 헤겔의 유머 아닌 유머, 헤겔의 역사관을 예로 들어 근대의 계몽적 이성을 비판합니다.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근대의 이성은 서구유럽이라는 동일자의 시선에서 타자의 이성을 부정하고 소거시켜 버리는 논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서구유럽의 이성이 다른 이성들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서구유럽의 논리 아래에 다른 모든 이성들을 포섭시켜 버렸기 때문에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두셀의 주장입니다. 두셀이 어떻게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를 ‘정복하는 자아’로 전도시키는지, 그 자세한 내용은 이 책 『1492년, 타자의 은폐』를 직접 참고해 주세요.^^

내 맘에 꽂힌 어떤 주(註)

이 책을 편집하면서 저에게 가장 와 닿았던 문장은 저자가 각주에 그저 흘려 지나가는 말처럼 써 놓은 한 문장이었습니다. ‘세계적 석학’, ‘세계적 해방철학자’라는 말에 겁먹은 나머지(내가 이런 분의 책을 편집하게 되다니;;;) 벌벌 떨며 교정지를 읽어 나가던 때, 저의 긴장을 풀어 주는 동시에 가슴을 뜨끈뜨끈하게 달구어 준 문장이었습니다(이밖에도 각주에 보석과도 같은 문장들이 여럿 숨어 있으니 꼭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담이지만, 내 조국 아르헨티나의 어떤 유대인이 초기 자금을 기부한 덕분에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등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설립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아르헨티나 팜파에서 밀을 경작하던 일꾼과 목축을 하던 가우초(gaucho)의 객관화된 가치가 독일로 이전되어 유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초석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반(半)인디오, 가난한 사람, 가우초의 일생이 대농장주와 대지주의 상품으로 객관화된 것이다. 나는 저 사람들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삶을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 청구서를 요구하는 저 사람들의 심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하려고 한다.(본문 6쪽, 각주 4번)

이 문장에서 서구유럽인들의 얼굴, 유럽사회의 빛나는 도시 위로 라틴아메리카의 반(半)인디오, 가난한 농민들의 얼굴이 묘하게 오버랩됨을 느낍니다. 만약 근대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면, 마땅히 이 민중들의 목소리로, 언어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500여 년간 수탈된 삶과 언어를 돌려달라는 이들의 이름으로 되었어야 할 근대 이후의 작업들이 여전히 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근대의 토대, 근대를 다루는 토대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두셀의 기획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야 할지를 말해 줍니다. ‘근대성 신화’, ‘윤택한 유럽인의 삶’을 떠받치기 위해 제물로서 희생되어야 했던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입장, 그들의 심정이 되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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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데 자네이루에 서있는 거대한 예수상. '브라질'은 '빨간 나무'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이다. 우리는 유럽이 식민지를 점령한 이후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1년은 과연 괜찮습니까?

2011년, 우리는 또 다른 신화들에 짓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발신화, 성공신화, 경쟁신화……. 철거민의 삶 위로, 미친 등록금을 충당하느라 자신의 피를 파는 대학생들의 삶 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 위로 삐까뻔쩍한 건물들이, 허울뿐인 대학이, ‘자율과 규제완화’에 춤추는 기업들이 줄줄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한편, TV를 돌리다 보면 ‘경쟁은 성공을 위한 하나의 시련이자 과정일 뿐’이라고 포장하는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가끔은 그런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있는 제 모습이 섬뜩섬뜩할 지경입니다. 제 작은(!) 바람이 있다면, 우리가 이 책에서 서구유럽인의 잔혹함만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신화들이 존재하는지, 이 이면에서 고통받는 삶은 왜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는지, 우리의 윤택한 삶이(비록 겉으로만 윤택할지라도)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편집부 김미선
1492년, 타자의 은폐 - 10점
엔리케 두셀 지음, 박병규 옮김/그린비
2011/06/02 09:00 2011/06/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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