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정리벽‘이 좀 있습니다. 이게 위생 관념까지 철저했더라면 결벽증으로 화했을 텐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고요, 그저 ‘편집증’ 정도라고나 할까요? 제 머릿속에서 구성된 합리성에 따라 무엇은 어디에, 무엇은 어디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편집자답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된 제 책상을 보고 기겁하는 제 동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심하진 않아서 그 자리에 없다고 막 잠도 못 자고 불안해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그러니 제발 오해들 좀 풀라고!!!).

아무튼 뭐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는 건 사실이죠. 함께 살던 동생과의 분가 이후 저는 비로소 제 공간을 온전히 제 것으로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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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았습니다. 나의 세계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질서가 말이죠. 하지만 그 생활이 1년을 넘긴 지금, 저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잘 구축해 놓은 질서라도 그 질서를 흩트리는 것들이 항상 등장한다는 것을요. 설거지니 빨래니 청소니 하는, 자잘한 생활의 때들을 때맞춰 치우는 일만 해도 꽤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그 정도면 말을 안 하게요. 한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나고, 수건걸이의 접착제가 약해져서 떨어지고, 청소기의 코드가 망가지고, 멀쩡한 이불에 콜라를 흘리고, 변기가 막히고,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면서 자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외칩니다. 새로 산 물건들의 자리를 정해 주고, 서랍 한 번씩 정리하는 따위의 일들도 빼놓을 수 없는데다가 이제 손댈 곳이 없겠지 싶은 타이밍이면 어머니께서 올라오셔서 살림의 위치를 바꿔 놓으시고…… OTL. 덕분에 저의 주말은 대개 이런 패턴입니다, 적당한 늦잠 후에 정신을 차려 보면 또 뭔가를 정리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그러다 보면 두세 시간은 훌쩍 가고, 이제 맑은 정신으로 책을 좀 읽어 볼까 하고 자리에 앉으면, 다시 졸음이 쏟아지고……. 아아, 이제는 확실히 알아요, 안다구요. 완벽한 질서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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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젋은이, 남자와 여자, 시민과 외국인, 인간과 동물의 분별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형상들의 잡탕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서로 번역가능하게 만들고 서로 소통가능하게 만드는 집합적 신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33쪽)

뜬금없이 이런 살림 타령을 한 것은, 고병권 선생님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겹치는 부분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민주주의가 어떤 최종적인 지향점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좋은 대표를 뽑으면, 좋은 법률이 시행되면, 그렇게 민주주의 체제를 갖춰 놓으면 우리의 삶은 민주주의적이 될까요?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살림의 질서’를 잘 구축하더라도 그 질서 안에 포함되지 않는 일들이 이어지듯이, 아무리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성공적이더라도 그 제도 안에 포함되지 않는 사건들이, 대의될 수 없는 이들이 등장하게 마련이라고요.

나는 한국 사회에서 대의제가 덜 발달했다기보다, 대의제의 발달과 대의제로부터 대중 추방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대의제가 발달했지만 ‘대의제 프레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 ‘난입’이나 ‘점거’는 대표들이 없거나 대표체제에서 배제를 경험한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강제로 들리게 하는 방법이다. …… ‘대의제=민주주의’ 옹호론자에게는 이런 식의 ‘난입’이나 ‘점거’가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 행위로 보일지 모르지만, 반대로 난입과 점거를 감행한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대의제에 의한 민주주의 파괴가 먼저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대의기구로부터의 배제, 대표들의 합의를 통한 배제가 그들의 삶을 먼저 위험에 빠뜨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의 충돌은 처음의 질문을 다시 끌고 온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_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100~101쪽

‘제도화’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들을 지켜 줄 제도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제도화되면 그렇게 그어진 선을 기준으로 또 다른 배제가 일어나는 아이러니가 수반되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러니를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로 삼아 그 제도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재구성해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흠, 그나저나 저희 집 살림은 어떻게 좀 안 되나요…….

- 편집부 태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2011/06/08 12:02 2011/06/0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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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강여호 2011/06/08 13:18

    민주주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수 있을지...
    문제는 운용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빠진 채 허상에 불과한 제도를 아무리 짓고 또 지어봐야
    사상누각이 아닐지 싶네요.
    사실 지금도 제도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지 않나요?

    • 그린비 2011/06/08 14:37

      여강여호님 안녕하세요~ ^^
      가끔 제도에 삶을 맞춰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먼저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