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민주주의의 바람(風/願)

민주주의는 정체를 규정하는 특정한 근거(원리, 척도, 기준)을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 근거가 한계를 드러내는 곳, 그것이 비판에 직면한 곳에서 제기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민주화가 의미하는 것은 ‘교정’이 아니라 ‘이행’일 것이다. 즉 정체를 그 척도에 비추어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이 민주화라는 것이다. 기존의 척도에 비추어 잘못을 교정하는 것은 그 척도를 유지 보수하는 일로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공안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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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획이 운동의 기획이었고, 민주주의의 기획이었던 셈이다. 또한 삶을 가꾸는 능력이 운동을 조직하는 능력이자, 새로운 권리, 새로운 제도를  요구하는 능력이었던 셈이기도 하다. " (같은 책, 108~109쪽)

예를 들어 당신은 대학생입니다. 당신은 대학생이며, 어느 노동자의 딸이거나 아들이며, 여느 대학생들이 그렇듯 매 학기 등록금을 치르기가 벅차 학자금 대출을 받는 이입니다. 그런 당신, 요 일주일 간 저녁마다 광화문에 갔습니다. 가서 ‘반값등록금’ 구호를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외쳤습니다. 그런 당신, 함께 집회에 나와 있던 대학생들 70여 명이 연행됐었다는 이야길 들었고, 그에 치밀어 오른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스무 명이 또 연행되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불법시위 세력이므로 그때 그곳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당신들은 당신들의 요구로 인해 연행된 것이 아니며, 사실 그 요구에 대한 대답은 전혀 들은 바도 없습니다. 요구는 묵살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시의부적절하게도 불법시위를 통해 그 요구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절차를 걸쳐 ‘자격’을 얻지 않고서 요구했기 때문에, 당신들의 요구는 ‘소요’라는 라벨이 붙은 유리병 속에 넣어지고 코르크마개로 봉해집니다.

당신들은 요구할 것이 있어서 거리에 섰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권력의 주인인 국민으로서 권력을 행사하여 요구를 관철해 보고자 거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경악스럽게도 경찰은, 아니, 정부는 주인의 주인됨을 판가름해주는 대단한 대리인이었습니다. 절차를 무시하고서, 다시 말해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정치’ 행위에 나서는 국민이라면 마땅히 교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정치는 정치적인 것에 달통한 우리 정치인들의 것이니, 너희 자격 없는 자들은 ‘나가 있어!’라는 말인 거죠.

바로 이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싹트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곳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나라라면, 지금 민주주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묻는 것이 현상의 시비를 가리는 최선의 방법 아닐까요? 그들은 절차에 대한 준수, 절차에 따라 합의된 내용에 대한 복종에 민주주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대하여 거리에 선 당신들은 말합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있다’고요. 여기서 흥미로운 대립이 생겨났습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 VS 민주주의자’라는 대립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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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불투명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책을 버리고 총을, 편안한 삶을 버리고 혁명의 유랑을 택했다." 『체 게바라 평전』, 706쪽

자,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봤으면 합니다. 먼저 그들의 불만입니다. 그들은 당신들이 정치의 자격 없이 정치에 나섰다는 데에 대해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정치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맡아서 하는 사람이지 정치를 독점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정치는 독점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닌, 일종의 자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당신들의 부적절한 정치적 행위를 교정하고 추방하려 할 때, 실제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정치’ 자체에 대한 제약입니다. 대지를 구획하듯 정치를 구획하려는 영토화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들에 대해서입니다. 정치가 정치인의 것이 아니듯,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자의 것이 아닌 걸까요? 그에 대해선 이 말로부터 대답의 단초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간의 통념들을 다시 묻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것들의 기반이 생각보다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잘해야 한 무더기의 믿음이었다. 내가 이 책을 쓰면서 발견한 것은 그 믿음이 가리고 있던 ‘지하’였다. 그라운드 아래의 언더그라운드. 토대와 형상이 무너진 그곳에서 나는 절대적 평등과 연대를 발견했다. 법 이전의 평등과 척도를 넘어선 연대, 그리고 복종이 아닌 협력에서 나온 권리와 힘이 거기 있었다.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가 거기 있었다는 게 아니라 우리 세계를 아름답게 하는 힘이 거기 있었다는 말이다. 근거와 척도, 자격과 조건을 넘어선 그 연대의 힘이 ‘데모스의 힘’, 즉 민주주의였다.” (6쪽, 강조는 인용자)

민주주의는 어딘가에서 발견하여 모사하고 안착시킬 어떤 ‘세계’가 아니라, 지하수맥처럼 우리 세계의 저류를 이루고 있는 동시에 세계를 혁신하는 ‘힘’이라는 것,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바람(風)에의 바람(願)이라는 것. 그러니, 분명하지 않습니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바람을 품은 이들의 것이라는 게.

- 편집부 김효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2011/06/16 09:00 2011/06/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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