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단은 그 성격상 자금이 풍부하다고는 하기 힘들다. 그런 소극단을 위해 디자인을 맡고 나선 것은 십중팔구 극단원을 친구로 둔 신출내기 디자이너이게 마련이다. 신출내기 디자이너는 어시스턴트 업무에 쫓기느라 자기 작품을 해 볼 기회가 거의 없다. 그래서 디자인료도 없는 자원봉사 같은 것이라도 제 뜻대로 만들어 볼 수 있는 일감을 원한다. 디자이너는 그런 한때를 반드시 거치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그런 홍역 같은 시절이 있었다.
─ 하라 켄야, 「디자이너의 홍역」, 『포스터를 훔쳐라』, 34p

하라 켄야의 『포스터를 훔쳐라』를 읽다가 문득 전에 없던 동질감을 느낍니다. 독자적인 미의식을 갖추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독창적으로 소화해내는, 이를테면 그림자조차 밟기 죄송스러운 ‘스승님’에게서 어딘가 ‘동료’ 같은 모습을 보았다고나 할까요?

하라 켄야의 ‘홍역 같은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7년 전의 제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디자이너가 꿈이었지만 디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몰랐던, 그저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종이에 프린트(인쇄도 아니고;)되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던 시절입니다. 내 작업물이 ‘인쇄’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기쁠까를 생각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좀 과장되게) 두근거렸던 시절, 그때부터 저는 편집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습니다. ‘광고’와 ‘웹’이 대세였던 시절이지만 저는 편집디자인에, 그 중에서도 적잖이 얄팍한 상술 내지는 눈속임처럼 보이는 광고·홍보물보다는 콘텐츠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또 여타 디자인 작업물에 비해 덜 소모적인 ‘북디자인’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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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기억 속에 간직될 수 없는 것을 보고 / 이 공백의 지면에 맡기면 그대는 발견하리라 / 그대의 머리에서 태어나 잘 길러진 아이가 / 그대의 마음에 새롭게 익숙해진 것을. / 이러한 것은 그대가 자주 들여다보는 대로 / 그대에게 이로울 것이며, 그대의 책을 풍요롭게 하리라." (셰익스피어, 「소네트 77」중)

어렵사리 들어간 첫 직장(신입 북디자이너를 원하는 곳은 드물답니다. ㅠㅠ)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너무나 사소하고 기초적인 것들부터 배웠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 철렁했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사소한 것에 너무 많은 고민과 고통을 감당했던 제 자신이 안쓰러운 시절입니다. 내가 고른 사진 한 장, 그림 하나가 선배들의 작업물에 앉혀질 때의 기쁨… (요런 거 이해하실 수 있으실랑가 모르겠네요~) 또 야심차게 맡은 첫 작업물을 선배에게 수줍게 내밀고 이후 선배의 손에 하나부터 열까지 뜯어고쳐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쓰린 가슴… (요런 느낌도 아실랑가요? 하하;;)

하라 켄야의 홍역 같은 시절이 저에게 뭉클하게 와 닿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저의 경험 때문이겠지요. 그 시절 저는 매일같이 넘치도록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채워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 모든 부분이 제 자신의 과거이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 많은 부분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시 격했던 저의 감정들 혹은 굵직한 사건들뿐입니다. 디자이너로서 첫 발을 내딛는 그 농밀한 때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 조금 서글픕니다. 미세한 감정이나 생각의 변화들, 자잘한 사건들의 기록이 있었다면 과거의 나를 더 많이 이해하고 조금은 위로할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말이에요.

이런 아쉬움에 이제부터라도 ‘디자이너로서의 나’를 기록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삼겹살을 먹었고 남자친구와는 다투었다는 억지로 쓰는 방학 숙제 같은 일기 말고 온전히 ‘디자이너’로서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어떨까 하고 말이에요. 5년, 10년이 지나 ‘미래의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은 어떠한 맥락 속에서 존재하게 될지, 지금 저를 누르는 고민과 고통들은 시간이 지나 얼마나 사사로운 것으로 변해 있을지… 음… 한번 시도해보렵니다!^^

- 디자인팀 서주성
포스터를 훔쳐라 - 10점
하라 켄야 지음, 이규원 옮김/안그라픽스
2011/06/17 09:00 2011/06/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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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n 2011/06/21 19:40

    저도 같은 디자이너로써 제 작업이나 그때그때의 생각을 기록해야겠다는 필요성은 느끼지만 바빠서, 혹은 (거의 대부분) 게을러서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합니다. 주성님의 글을 보니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우게 되네요~ 화이팅입니다~^^

    • 그린비 2011/06/21 20:20

      이번을 기회로 삼아 의지를 쭉~ 밀고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
      두분 모두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