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전쟁과 파시즘, 개발과 독재, 이념의 왜곡, 인종 간의 불화와 종교. 영화들에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대개는 감내해야 했고 지금도 안고 있는 현대사의 상흔이 동일한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우리도 갖고 있지만 등판에 새겨져 있어 거울에 비추어야 간신히 볼 수 있는 바로 그 문신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영화들이 그런 종류의 거울이 되었으면 한다.”(「머리말」 중에서)

‘아시아’를 말할 때 아주 기묘한 거리감을 느낍니다. 아시아는 지금 제가 발을 붙이고 있는 땅의, 이를테면 성(姓) 같은 것입니다(국적은 이름인 셈이고요). 하지만 아시아가 이렇고 저렇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남의 집안일을 듣고 있는 듯도 합니다.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발음할 때는 느낄 수 없는, “나는 아시아인이다”라고 발음할 때 느끼는 이 설명하기 힘든 이물감은…… 그러나 저만 느끼는 것은 아니리라 여깁니다.

더 나아가, ‘유럽’이라는 지칭에서 오는 세련된 느낌, 그런 지칭이 자신 쪽으로 향해질 때 느껴지는 기꺼움이 있는 데에 반해, ‘아시아’라는 지칭이 자신을 향할 때는 상당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당장 그런 지칭을 취하시키기 위해 목에 핏대를 세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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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이라는 명칭은 어디서 왔는가? 유럽을 기준으로 해가 뜨는 곳이라는 방향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발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기준이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아시아에 덧씌워진 꺼림칙한 낙후의 이미지, 비하의 뉘앙스는 어디에 연원을 둔 것일까요? 『시네마 온더로드』의 저자 유재현 선생님은 아시아의 나라들의 등에 찍힌 ‘문신’의 존재를 말합니다. 이는 아시아 국가들이 예속의 징표를 등에 짊어짐으로써 스스로의 예속은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예속국에서 종주국에 이르는 수직적 축이 있어서, 예속국들 중에는 다른 예속국에게 자신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다른 예속국 위에 섬으로써 자신의 예속을 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알포인트」의 최태인 중위는 베트남으로부터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초대받은 것이었다. 전쟁은 남한이 도발한 것이 아니라 미제국주의가 도발한 것이다. 남한은 단지 제국주의의 마름으로 그 전쟁에 목덜미를 잡혀 끌려갔을 뿐이다. (……) 끌려간 자로서의 식민지적 자의식이 실종되고 침략한 자의 제국주의적 의식에 대한 명백한 흉내 내기가 횡행할 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타자화의 하위적 주체로서의 허위적 격상일 뿐이다. (……) 이 종착역의 플랫폼에서는 남한이 (제국주의전쟁의) 피해자가 아닌 순수한(!) 가해자로, 베트남 민중이 연대의 대상이 아닌 가련한 희생자로, 변질된 전쟁의 공포가 밑도 끝도 없는 시혜적 죄책감이 되어 버린다.” (180쪽, 「제국주의 함정, <알포인트>에도 있다」)

이 대목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런 특권(제국주의의 마름!)을 가졌던 예속국 남한이 만들어낸 기만적 자의식입니다. 피해자의 멍에를 쓰느니, 예속자로 남느니, 그럼으로써 역사의 타자가 되느니, 차라리 가해자의 말단이라도 되어 자신의 주체됨을 보장받겠다는 쪽으로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요? 제국주의 담론이 재현하는 아시아상(像)을 내면화하고서 스스로의 아시아임을 부인할 때, 정작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땅으로서의 아시아가 견디기 힘든 분열을 낳고, 그 결과가 이와 같은 ‘하위제국주의적 환시(幻視)’로 나타났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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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 <거울 속에 있는 정물> _ 우리 삶의 경계를 거울-현실, 거짓-진실로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전작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에서 신자유주의 아래 아시아의 공동운명으로서 ‘난민화’를 발견한 바 있는 저자는, 이 책 『시네마 온더로드』에서 홍콩으로 유입된 베트남 난민의 운명이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타고 중국대륙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제국주의전쟁이 격발한 난민화의 도미노 현상은 원환을 그리며 그 출발점에 함께 있던 남한과 다시 만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현실의 도처에서 목격하는 난민들의 형상이 그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난민화를 우리의 운명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정치적·경제적으로 낙후된 동남아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운명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그 지독한 착각의 근저에는 저자가 「알포인트」에서 밝혀낸 것과 같은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듯합니다.

결국 이 경우, 영화는 저자가 원했던 것과 같은 거울이 되는 데엔 실패한 것 같습니다. 금이 간 거울, 혹은 상을 제 마음대로 일그러뜨려 보여 주는 의심스러운 거울로서의 영화. 그리고 이때, 글쓰기는 그 거울이 비춘 상의 거짓을 도로 비춰 보여 주는 또 하나의 거울로 다가옵니다. 그 거울을 보며, 저는 다시 발음해 봅니다. “나는 아시아인이다.”

- 편집부 김효진
시네마 온더로드 - 10점
유재현 지음/그린비
2011/06/27 09:00 2011/06/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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