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온더로드』의 「공포의 오디세이」 읽기

할리우드의 유혹적인 매력과 미국 대중매체의 저항할 수 없는 호소력 덕분에, 이제 이 모든 세월이 흐른 후, 세계는 이 전쟁을 ‘미국’의 이야기로 본다. 인도차이나는 단지 녹음이 우거진 열대의 배경을 제공할 뿐이다. 그 배경 속에서 미합중국은 폭력의 환상을 연출하고, 자신의 최신 기술을 시험하고, 자신의 이념을 강화하고, 자신의 양심을 검토하고, 자신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하여 고민하며, 그리고 자신의 죄를 문제 삼는다(혹은 문제 삼는 척한다). 베트남인, 캄보디아인, 라오스인은 모두 이 대본에 등장하는 소도구일 뿐이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쪽 찢어진 눈을 가진 인간 비슷한 동물일 뿐이다. 그들은 그냥 죽어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베트콩 놈들 말이다.
- 아룬다티 로이, 박혜영 옮김, 『9월이여, 오라』 108쪽

인도의 소설가이자 르포라이터인 아룬다티 로이는 2001년 9·11사태를 기해 미국에 팽배하기 시작한 애국주의, 그리고 그것으로 뒷받침되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패권 시대의 개막에 탄식하며 말합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제3세계 약소국들에 행사해 온 숱한 폭력의 역사에 대해선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들이 같은 종류의 폭력에 한 번 노출되자 그토록 간단히 극단적이고 위선적인 애국주의로 치달아 갈 수 있느냐고요. 그리고 그런 극도의 반성능력 결여의 기반에는 할리우드를 앞세운 역사 고쳐 쓰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저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르포라이터인 유재현 선생님의 『시네마 온더로드』에서 이런 아룬다티의 말과 공명하는 대목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특히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다룬 「공포의 오디세이」편이 그랬습니다. 이 글에서 유재현 선생님은 걸작 베트남전쟁영화로 기억되는 「지옥의 묵시록」을 아주 꼼꼼히 뜯어보며 이 영화의 진가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는 어떤 것인지를 밝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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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룩」은 언제?'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오랜 제작기간 끝에 등장했다고 한다.

흔히 ‘전쟁영화’라는 장르 구분에서는 영화의 퀄리티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서 치밀한 고증에 바탕을 둔 사실성을 들곤 하지요. 「지옥의 묵시록」 또한 막대한 제작비와 기간을 들여 정글에서 찍은 사실성 높은 영상으로 유명합니다.

영화의 리얼리티를 측정해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 코폴라 자신이 참전했던 전쟁을 다룬 영화이니만큼 리얼리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을 혐의는 높지 않았다.(158쪽)

「지옥의 묵시록」은 캄보디아의 정글에 은둔한 월터 커츠 대령을 살해하는 임무를 띤 미군 정보부 소속의 윌러드 대위가 남베트남의 냐짱(Nha Trang)을 떠나 커츠의 은신처를 향하는 오디세이적 영화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영화가 시작하는 냐짱을 제외한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소들이 허구적이다.(158~159쪽)

그런데, 유재현 선생님의 영화 읽기에서 드러나는 건 (의외롭게도) 그 모든 영상이 고증 불가능한 허구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 윌러드 대위의 행로는 남베트남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냐짱에서 시작되어 주로 수로(水路)로 이동을 하는데, 이들이 타고 오르는 강의 이름은 ‘넝’(Nung)으로 제시되지만 이는 허구의 강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실 보통은 ‘영화니깐’이라고 넘어 갈 수 있을 대목이지만, 유재현 선생님은 거기서 더욱 집요하게 묻습니다. 하다못해 그 넝강의 모델은 있지 않겠느냐고요. 그리곤 영화에서 제공되는 단편적 정보들과 역사적 사실들에 의존해 메콩강(Mekong江), 바싹강(Bassac江) 등 실존하는 베트남-캄보디아 간 경로를 윌러드 일행의 그것에 거듭 겹쳐 봅니다.

신기한 건 자칫 허공에 발길질하기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대목들에 오히려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에세이이길 거부하는 영화에세이라고나 할까요. 흔히 영화에세이라고 하면 당연히 영화의 이야기를 음미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 마련이건만, 유재현 선생님의 영화에세이는 자꾸만 영화 바깥으로 글이 뻗어 나가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읽기를 경험함으로써 보통은 의식하지 않는, 영화를 ‘보는’ 행위의 수동성을 깨닫게 됩니다. 「공포의 오디세이」 편에서 장장 여섯 쪽에 걸쳐 진행되는 이 지리적·역사적 고증은 영화가 제공하는 몽롱한 수동성의 경험으로부터 독자를 깨워 내는 과정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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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넝강은 메콩강이든 바싹강이든 실존하는 그 어떤 강일 수도 없습니다. 그 강들을 바로 그 강들로 만들어 주는 ‘역사’가 영화 속 넝강에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윌러드 일행이 만나는 적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자기 역사를 자기 손으로 세우려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전사들이 아니라, 도무지 해석될 수 없는 암호 같은 표정과 행위의 ‘베트콩’들입니다. 또 커츠 대령이 은거하는 곳은 베트남 고원지대-캄보디아 접경 지역으로 제시되는데, 영상으로 미루어 보면 그곳은 어느 모로 보나 앙코르유적의 폐허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 어디에도 앙코르유적이 있을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서구인들의 사고 속에서 ‘캄보디아’는 사면상(四面像)과 사자상으로 상징되는 앙코르유적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그려지는 것일 뿐.

그러므로 「지옥의 묵시록」은 지리적으로 또는 (중요하지 않지만) 고고학적으로 무엇 하나도 사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제멋대로의 영화라고 해도 좋다. (……) 나는 프랜시스 코폴라가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기로 처음부터 작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163쪽)

이렇듯 「지옥의 묵시록」은 따지고 보면 전쟁영화라는 장르적 성격에 충실하지 않은 영화이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여타 전쟁영화가 거둘 수 없었던 성취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독 프랜시스 코폴라는 실제로 있었던 전쟁을 충실히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게 아니라, 그 전쟁이 낳은 공포로 가득 찬 미국의 악몽을 그리려 했음이 이로써 분명해기 때문입니다. 그 공포는 어떤 공포일까요? 영화 속 한 장면, 윌러드 일행은 강에서 만난 베트남 민간인들을 게릴라로 의심해 도륙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말 게릴라가 맞는지 혼란스러울 타이밍엔 갑자기 숨겨 두었던 폭탄이 터집니다. 또 다른 장면. 정글의 깊은 곳에서 갑자기 출현한 원주민들이 창을 던지고, 그 창에 윌러드 일행 배의 선장이 목을 꿰뚫려 죽습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사방에서 주인공-서구인들을 기습하는 ‘공포’가 「지옥의 묵시록」이 그려 낸 사실성(reality)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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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츠의 독백처럼 미국의 보수파들은 자신들이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왜 약한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을 대신해 거츠가 내놓은 해답은 원주민의 야만적 광기이다." (『시네마 온더로드』, 169쪽)

그런 면에서 유재현 선생님은 「지옥의 묵시록」을 가리켜 ‘공포를 향한 오디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미지의 장소에 유폐된 신화적 공포의 존재에 마주하는 이야기라는 점, 주인공이 행로에서 만나는 사건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을 엮어 만든 탐험 장르(quest genre)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형적입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지식과 책략으로 신화를 정복하고 귀향하는 데 반해 「지옥의 묵시록」은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지지 않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일찍이 운명의 장난에 휘둘려 길을 떠났던 오디세우스와 달리, 인도차이나의 오디세우스‘들’은 정복의 탐욕으로 미지의 땅에 보내짐으로써 어떤 지식과 책략도 무용해지는 지점인 ‘암흑의 핵심’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으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2001년, 편집과정에서 잘려나갔던 분량 50분을 덧붙인 ‘리덕스’판이 개봉됩니다. 이 새로운 「지옥의 묵시록」에 대해 대개의 평자와 관객들은 그래도 호평을 보냈던 모양인데요, 유재현 선생님의 경우는 상당히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계십니다. 「지옥의 묵시록」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던 힘(제국주의에 내재된 ‘광기’에 대한 통찰)이 사라지고 “미국인들의 전혀 새롭지 않은 반전적 자의식의 통념”만이 선명해졌다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영화에 독특한 뉘앙스를 부여해 주던 ‘광인’ 커츠 대령은 리덕스판에서 사로잡은 윌러드에게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읽어 주며 그 허위성을 조롱하는 ‘현인’이 되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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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에 자리 잡고 있는 공포는 어떤 공포인가. 그건 정글의 공포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공포이다." (같은 책, 165쪽)

사실 여기에 대해 제가 말하긴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시네마 온더로드』를 읽으면서 리덕스판에서의 변화가 그 20여 년을 통해 미국에서 형성된, 베트남전쟁에 대한 합의된 기억으로 「지옥의 묵시록」의 성취가 통합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인들 자신에 의해 이미 반성되고 단죄도 끝난 전쟁이라고, 새로운 「지옥의 묵시록」을 자신들의 도덕성과 양심의 건강함을 증거하는 기념비 중 하나로 갖겠다고. 그러나  9·11사태에 직면하여, 미국인들의 건전한 반전 의식이 순식간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맹렬한 지지로 돌변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던가요. 테러는 절대악으로 표상되고 그 초월적 지평에서 9·11사태의 인과성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시작된 미국의 전쟁들은 「지옥의 묵시록」이 보여 줬던 성취마저도 빛이 바래 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제국주의가 과거 자신들이 제출했던 파산선언을 망각하고 더욱 강력한 패권주의로 치달아 가는 동안, 청산의 주체가 되었어야 했던 우리 ‘원주민’들이 이룬 건 과연 무엇일까요?

- 편집부 김효진

지도로 본 메콩강과 바싹강의 위치


시네마 온더로드 - 10점
유재현 지음/그린비
2011/07/06 09:00 2011/07/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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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리꾼 2011/07/09 15:07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 사진에 대해 잘못된 설명이 적힌 듯 합니다. 사진은 연기 지도중인 코폴라 감독이 아니라, 영화 속 한 장면으로, 킬고어 중령으로 등장했던 로버트 듀발 분 아닌가요?

    • 그린비 2011/07/10 12:35

      누리꾼님 제보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