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냐? 그때가 바로 공부할 때다!

고미숙

저의 병이 두 무릎 아래가 힘이 빠져서 걸음을 걷지 못하는 병이라 …… 토막 둘을 양손에 갈라쥐구 궁둥이루 다니게 되었었습니다. …… 궁둥이루 다니는 것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조팝으루 주린 배를 채우면 뜰 앞에 앉아서 해를 보냈었습니다 …… (긴긴 해를 보내느라) 나무때기루 찌름한 꼬챙이를 깎아서 던지는 장난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심심풀이 장난으로 시작한 것인데 물건을 노리구 던지면 맞는데 재미가 날뿐더러 그것두 혹시 재주루 쓸데가 있을까 하구 일심 정력을 들여서 익혔습니다. 그래서 긴긴 해두 가는 줄을 모르구 보냈습니다.
─ 홍명희, 『임꺽정』 4권, 사계절, 2008, 강조는 필자

4권 「박유복이」 편에 나오는 장면이다. 유복이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가는 도중에 꺽정이네 집에 들러서 그간 살아온 내력을 들려주는 부분이다. 등장인물들의 인생역정이 워낙 파란만장하다 보니 특별히 주목을 받는 장면은 아니다. 보다시피 멋진 아포리즘이 담긴 것도 아니다. 헌데도 내게는 이 대목이 참으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재미나 감동 따위가 아니라 사무치는 느낌이랄까. 한 젊은이가 가난한 이모부 집에 얹혀사는데 앉은뱅이가 되었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악착같이 뭘 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긴긴 해를 보내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를 익혔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심정력으로 익히고 또 익힌다. 이거야말로 공부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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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 <자화상> _ "그냥 배운다.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논다. 그리고 그게 일상이다. 놀랍지 않은가?" (『고전 톡톡』, 195쪽)

우리는 흔히 몸이 아프면 공부를 놓아 버린다. 병이 다 나은 다음에 하겠다며. 그런데 사실 이건 속임수다. 막상 몸이 건강해지면 또 다른 핑계를 대느라 바쁘다. 결국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공자, 부처님, 왕양명 등 고전의 스승들은 이구동성으로 공부에는 때가 없다고 말한다. “아프냐? 그럼 그때가 바로 공부할 때다!” 글로 볼 때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막상 실제상황이 되면 이 말의 뜻을 완전히 망각해 버린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헌데, 이 청년으로 인해 그 말들이 신체를 육박해 오는 감응을 받았다. 그렇구나! 앉은뱅이가 되어서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뭔가를 쉬지 않고 연마하는 것, 이것이 공부로구나.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어떤 희망도 보상도 없이 ‘그저!’ 한다는 것이다. 흔히 공부에는 원대한 목표나 야망이 있어야 한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는 단지 그 순간을 충만하게 해주는 것 외에 어떤 대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지간히 공부를 해서는 이런 수준에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유복이한테서 큰 울림을 받은 건 이런 맥락이다.

『임꺽정』에 대한 책을 쓸 즈음, 난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 과로와 운동부족으로 오른쪽 다리가 퉁퉁 부어오른 것이다. 약을 먹으면 좀 좋아졌다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몸이 좋아지면 꼭 다시 산에 오르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때 문득 유복이가 떠올랐다. 다 나은 다음에 산에 가고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태에서 바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후배들과 함께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속도가 맞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후배들은 먼저 오르게 하고 뒤에서 따로 올라갔다. 그러면 후배들이 내려올 때쯤 중간에서 만나 같이 내려오는 식이었다. 물론 힘들고 고단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또 그 때문에 다리가 더 붓기도 했다. 하지만 몸 전체에 기운이 돌기 때문에 그걸 감내하는 능력 또한 커졌다. 그때 알게 되었다. 병을 다 몰아낸 다음에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살면서도 더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문자로 하는 공부 역시 그러하다. 공부 따로 삶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곧 삶이고 삶의 모든 과정이 공부다. 그런 점에서 아프고 괴로울 때가 더 공부하기가 좋은 때일 수 있다. 그때는 글자 하나하나가 사무치게 다가올 테니 말이다. 그 사무침 자체를 익히는 것, 그것이 곧 공부의 진수다!

※ 『고전 톡톡』의 2부 '고전과 通하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다음 주에는 맑스의 『자본』과 한 고병권 선생님의 글이 연재됩니다.
임꺽정 4 - 10점
홍명희 지음, 박재동 그림/사계절출판사
2011/07/13 12:00 2011/07/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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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문완료 2011/07/13 20:41

    고전과 '통'하시라고 아버지께 <고전 톡톡> 쐈습니다!

    • 그린비 2011/07/14 11:26

      우와! 멋지십니다! 짝짝짝!
      (꼭 그린비 책을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함께 나누는 그 모습이 멋진거죠~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
      아버지께서 고전와 '通'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