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볼루션 - 백척간두진일보

28세의 남자이고, 2천만 원의 빚이 있으며, 튜브처럼 가끔 바람 빠졌다가 다시 차오르는 배둘레햄도 있는, 제겐 1515일 사귄 상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애는 제 생애 첫 연애입니다. 그러니까 20대 초반까지 저도 ‘커플지옥, 솔로천국!’ 교도(敎徒)였단 말씀. 혹은 연애에 관한 자포자기형 인간이었다고나 할까요. 작은 키에 오리엉덩이, 구부정한 자세로 주머니에 두 손 찔러 넣고 옆구리엔 ‘문지시선’ 한 권 끼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터덜터덜(을 의도했으나 사실인즉 뒤뚱뒤뚱?) 교정을 걷던 제 이십대 초반 모습(구보씨 워너비?!). 타임머신이 있다면 타고 날아가서 곡직불문하고 뒤통수 한 방 쥐어박으며 왜 사서 궁상이냐 한소리해 주고 싶은 그런 모습이, 지금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그러다가 군대엘 갔더랬죠. 그리고 거기서도 그치지 않던 저 궁상은 기어코는 제게 온갖 병을 얻어 주고 말았답니다. 신경과민, 위염, 만성적인 소화불량과 무기력증, 우울증, 불면증. 어느 순간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시작한 게 운동. 일과가 끝나고 나면 매일 녹초가 되도록 뛰고 또 뛰었다죠. 먹는 양도 줄이고 야식도 끊고. 어쨌거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자기 몸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는 일이라는 데에 생각이 닿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먼저 이 저주받은 절구통 몸매부터 어떻게 하자고 했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에리히 프롬의 저 유명한 『사랑의 기술』도 읽었다죠. ‘그렇다. 사랑! 오직 사랑만이 나를 구원하리라!’ 그리고 복학, 곧 연애 시작. 그리하여 저는 구원 받았을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홀로 갈 수 없다면, 절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그때 사랑이란 의지요 예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23쪽)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로 말하자면, 처음 만났을 때 후루룩 넘기고 놓아버렸던 책입니다. 이미 솔로 시절 『사랑의 기술』부터 스탕달 『연애론』까지 독파한(했다고 믿었던) 제게는, 무엇보다 목하 열애 중인 제게는 불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 제가 처한 이 현실, 빚과 베둘레햄이라는 올가미들은 대체 어떻게 된 연유로? 그걸 이제 와 『호모 에로스』를 다시 읽으며 반추해 봅니다.

1. 빚 : 제 빚의 상당 비중은 학자금 대출금이고, 이는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세대적 집단운명(?)으로부터 저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니까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당 비중’입니다. 나머지 ‘일정 비중’에 대해선 도덕적 추심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이렇습니다. 학식이나 먹고 땡볕에 교정을 걷는 연애,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을 기다렸던 연애, 마침내 제 운명을 구원하리라 예정되어 있던 연애에, 그깟 화폐에 의한 궁색함이 고개를 내밀게 하기 싫었습니다. 마침 우리들의 고마운 제1금융권에서 거의 독지가와 같은 선의로 마련해 준 ‘용돈 대출’이라는 학자금 대출의 옵션을 꼬박꼬박 한도까지 타 썼습니다. 집에서 용돈도 타 썼고 방학마다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역시 연애 쌩초보였던 제 여자친구, ‘잘 모르긴 하겠지만 우리 이렇게 펑펑 써도 되는 거야?’라고 가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 와도 제 대답은 ‘왓에버 네버마인드’. 비어 가는 지갑 생각하며 마음속으로는 진땀을 한 바가지 흘리면서도 입으로는 ‘왓에버 네버마인드’. 확실히 해두고 싶은 건, 지금 와서 아까운 건 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보단 돈과 함께 써 버린 시간, 돈으로 써 버린 시간이 아깝다는 겁니다. 그 시절 저는 세상 모든 것이 상품이 된 마당에 돈 없이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어떤 사건도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쇼핑 없는 삶, 백화점 없는 거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고로, 우리시대의 에로스는 이 상품들의 진열장이자 자본의 향연이 펼쳐지는 쇼핑몰을 따라 움직인다.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116쪽

만남에서 결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상품이 개입하지 않는 공간이 거의 없다. - 117쪽

쇼핑 없는 삶, 백화점 없는 거리, 상품화되지 않은 공간. 그런 것을 상상했어야 했습니다. 시장이 사랑을 곤경에 처하게 한다면, 그것을 넘어서는 비책을 발명하는 게 지금 사랑하는 자들의 책임이었을 터. 그리하여, 연애 4년차인 지금에도, 저희 커플은 상점가를 헤맵니다. 입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혐오를 내뱉으면서 상품을 사고 그로부터 자신의 분열상을 인지하고, 다시 거기서 눈을 돌리려다 서로를 의식하며 멋쩍어지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힘으로 일어선 자 힘으로 망한다고, 소비로 맺어진 연애는 반드시 소비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랑만큼 소중한 감정도 없지만, 사랑만큼 부서지기 쉬운 감정도 없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208쪽)

2. 배둘레햄 : 어느 날부턴가 사라진 줄만 알았던 베둘레햄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다시 부풀어 올랐습니다. 끊었던 야식이 돌아온 것과 함께. “야식(특히 폭식)은 외로움의 신체적 표상이다. 정신적 공허를 채우기 위한 몸적 반응이 바로 허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외롭고 두렵지만 사랑의 지혜와 기술이 없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금욕적으로 살아가면서 야식만 축낼 수밖에 없다."(35쪽) ‘난 솔로도 아닌데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아……’ 탄식을 흘립니다. ‘연애를 하고 있어도 나는 외롭구나, 외로워졌구나.’ 그런 아픈 자각. 물론 모든 연인들은 싸웁니다. 크고 작은 일들로 싸우고 그중 대개의 일들이 일상다반사인 것이 되고, 아주 드문 일들은 이별의 씨앗이 되기도 하겠죠.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 커플은 그리 많이 싸우진 않습니다. 제 생각에, 오히려 진짜 문제가 되는 건 ‘싸울 수 없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순정이 과잉이라면, 냉소는 과소다. 아주 다르게 보이지만, 실은 깊이 상통한다.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비관주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략)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절대 일정한 선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을 넘는 순간, 바로 밀쳐 낸다. 그 경계선을 어떻게 아느냐구? 그러니 그거 계산하느라 머리가 깨진다. 겉으로야 지적이고 냉철한 듯 보이지만, 그런 건 지성이 아니라, 잔머리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를 굴려 대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의식을 침범당하는 게 두려워서다.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는 게 겁이 나서다. 그렇다고 내면에 대단한 무엇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완강하다. 그 두려움의 표현형식이 바로 냉소다.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43쪽

연인들이 ‘사랑에 관한 비관주의’를 갖고 있다니! 그러나 사실이 그렇습니다. 앞서 말한 ‘연인들의 책임’을 방기했던 그 대가를 지금 이렇게 치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싸울 수 없음’을, 상대 마음의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꼭 맥주를 한두 캔씩 사왔습니다. ‘맛으로 먹는 거니까, 이쯤은 그냥 풍류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요. 그리고 돌아온 배둘레햄. 타임머신이 있다면, 연애를 갓 시작했을 때의 제가 날아와 제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즉,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사랑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존재의 궤적을 만든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145쪽)

일견 저희 커플은 여전히 순조롭습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당신들은 참 오랫동안 변심 않고 잘 지내는 것 같다고 그럽니다. 사실로 항상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건너야 하는 강폭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이 느낌이 사실이라고 해도 결코 어느 한 명에게 귀책시킬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사랑에 관한 비관주의’는 필경은 ‘이별에 이르는 병’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요즘 섬뜩섬뜩하게 저를 덮쳐 옵니다. 자의식을 지키는 연애, 서로가 섞이는 경험을 거부하는 연애는 성립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러므로 진정,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나를 멸망시킬 용기가 있는가?’”(154쪽) 우린 1515일을 이어 온 우리의 연애를 멸망시킬 용기가 있을까? 연애의 갱신, 아니 혁신을 위한 발심(發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렇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건 단 ‘한 걸음’이다. 사랑에 관한 오만과 편견, 자의식을 둘러싼 망상의 그물망을 벗어나 한 걸음, 단 한 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백척간두진일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271쪽

이제 곧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어야 할 스물네 살, 제 연인이 말했습니다. 이 사회는, 이 세상은 도무지 자기 같은 사람은 상관하지 않고 돌아가고 있어서 너무 우울하다고. 세상은 너 같은 건 널리고 널린 상품 중 하나일 뿐이라고,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한낱 부품에 그칠 거라 자꾸 을러대는 것 같다고요. 사랑에의 비관은 결국 삶에의 비관에서 오는 것. 저는 한참 대답을 고르다 말했습니다. 7월 9일, 함께 부산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요. 그곳에는 ‘너 같은 건 널리고 널린 상품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저 을러댐에 한사코 ‘아니다’라고 외쳐 온 사람이 있으니, 그 소리를 들으러 가보자고. 그날 함께 ‘아니다’를 외치러 수백수천의 사람이 모인다니, 그 소리를 들으러 가보자고. 그리고 그 ‘아니다’의 외침이 백척간두의 한 사람을 다시 든든한 땅 위로 발 딛게 하는 것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를 보고 오자고. 그곳에서 우리 연애의 벡터를 바꿀 영감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예감으로 말했습니다.

- 편집부 김효진
2011/07/14 09:00 2011/07/14 09:0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146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앙~물고연습 2011/07/19 13:13

    써버린 돈보다 써버린 시간이 더 아깝다.
    싸운 시간보다,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흘려보낸 시간이 더 아쉽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문제다.

    이 시대의 질문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 할 수 있을까?" (저도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만)
    이런 질문을 던질때엔 제 안에서 의지하고 기대려는 마음을 발견하게 되네요.^^
    흠~ 시대를 거슬러 새로운 질문을 찾아야 겠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한가닥 했던 철학자들은 어떤 질문을 하며 사랑에 대해 생각했나요?

    • 그린비 2011/07/19 13:53

      앗, 어려운 질문을...!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중에서 사랑에 대해서 한가닥 했던(!) 사람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평생 독신이었고, 니체도 그렇고...^^;

      "어떻게 사랑을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스스로 잘 살 수 없는 사람은 사랑도 쉽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그렇거든요. -_-;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관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기 위해 저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하;;

      이앙~물고연습님이 썼던 세번째 줄의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문제다"와 감응하는 대답이 되었을런지요.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지나간 시간이 지금의 우리를 구성하고 있지 않습니꺄? ^^*

  2. 김유진 2011/07/20 22:00

    저같은 경우는 스스로 자신이 작아질수록 점점 사랑에 대하여 마음을 닫아가게 되는데,

    오히려 사랑에서 답을 찾으셨네요.

    • 그린비 2011/07/21 00:22

      사랑이 급변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 아닐까요!
      소중한 사람과 마음을 주고 받는다고 느낄 때 큰 힘이 되잖아요.(물론 스스로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요 ㅎㅎ;)
      유진님도 답을 찾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

  3. 2011/10/14 12:32

    두 번째사진 출저가 어떻게 되나요??

    • 그린비 2011/10/14 13:28

      안녕하세요.
      문의하신 이미지는 타로카드 중 '연인'을 나타내는 일러스트입니다.
      제가 이미지를 얻어온 사이트는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http://bit.ly/r32s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