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성장 없는 연애’란 없다

사랑이 위대한 건 삶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번의 사랑을 했는데도 삶의 지평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면, 또 존재의 내공이 커지지 않았다면 그건 좀 의심해 봐야 한다. 사랑이 아니라, 습관적 연애중독증일 가능성이 많다.
― 고미숙,『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 298쪽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사랑(연애)은 단언컨대 내 가슴을 들었다 놓았다는 했을지언정, 내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더라도, 그건 경치 좋다는 곳, 맛있는 음식점, 남들 다 가 봤다는 유명한 곳에 가기 위해서였다, 내 존재의 움직임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렇게 연애를 반복하다 보면 가끔은 갔던 곳이 겹치기도 하고, 먹었던 음식이 겹치기도 하고, 심지어는 했던 멘트가 겹치기도 한다;;; 뭐 어쩌랴 싶었다. 갈 만한 데는 정해져 있고, 만날 먹는 밥은 또 거기서 거기고. 시적으로 언어를 구사할 게 아니라면 했던 말 또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삶을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주기는커녕, 데이트 코스 하나 다른 지평으로 인도해 주지도 못하는 이 빈곤한 연애(질)를 스물여섯 되도록 네 번이나 ‘반복’해 왔다(오노!).

‘반복’이라고 말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싸우는 이유도 매번 비슷하게, 그리고 이별하는 수순도 매번 비슷하게……. 왜 헤어졌는지 누가 물어 왔을 때 답하는 이유도 비슷했다. ‘누가 먼저 식은 거지, 뭐’, ‘아무리 생각해 봐도(사실은 생각 안 해봤다) 성격이 잘 안 맞았어’, ‘대화가 좀 안 통했던 것 같아’ 정도의 대답. 내가 아니라 그 자리에 누굴 앉혀 놓아도 이상할 것 없는 대답. 네 번에 걸쳐 연애를 했는데도 나아진 게 없는 대답. 솔직히 헤어져서 아픈 감정 추스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헤어졌는지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시큼한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자꾸만 올라와서 식도가 쓰리다. 뭔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몸의 신호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의 원인은, 다름 아닌, (남들 다 좋아 죽는다는) ‘연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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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반년 동안 오직 사랑─맹목적인 사랑─만을 위해 인생의 다른 의의를 모두 소흘히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는 바로 생활이다. 사람은 반드시 살아가야 하고 사랑은 바로 그것에 수반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노력하지 않는 자를 위해 활로를 열어주는 일은 결코 없다." - 루쉰, 「죽음을 슬퍼하며」, 『방황』, 178쪽

- 충만함이 뭐예요?

“사랑을 함으로써 자기 몸 전체가 배움의 현장 속으로 힘겹게 들어가는, 이런 게 충만함이거든요.”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 204쪽.

충만함? 연애할 때의 나는 거의 언제나 ‘결핍감’에 허덕이는 상태였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그리고 연애가 잘 풀리지 않을 땐 언제나 살이 쪘다. 먹어도먹어도 늘 배가 고팠으니까. 긴 시간 만나지 못했을 때는 그렇다 쳐도, 종일 붙어 있었던 순간에도 왜 난 그 결핍감에 늘 허덕였던 것일까. 사랑하는 상대를 눈앞에 둔 그 순간까지도, ‘어떻게 하면 즐거울 수 있을까?’라는 헛헛한 생각만을 하며 보내왔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오늘은 어딜 가야 좋을까, 뭘 먹어야 기분이 좋아질까, 뭔가 특별한 걸 해보고 싶어……. 만나기로 했던 그 장소에 둘이 딱 붙어 서서 머릿속에서만 ‘어딜 갈까, 무얼 할까’ 고민만 하는데 족히 삼십 분은 걸렸다. 정말 최악인 것은, 만나서 그 고민을 하다가 싸우기 시작해서 그날 하루를 다 망쳐 버린 적도 많다는 것이다. 그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생각을 해보면, ‘그냥 어딜 가서 뭘 하든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언제나 그 최악의 상황 한가운데 서서 불같이 화를 내기 일쑤였다. 차라리 그런 생각을 하느라 헛된 시간을 쓸 바에야, 마음을 비우고 같이 목적 없이 길을 걷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걸 해보겠다고 다짜고짜 ‘오늘 뭐할까?’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늘은 뭘 했는지, 기분은 어떤지, 요즘 즐거운 건 없는지, 힘든 건 없는지’를 묻는 게 맞는 순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위한 ‘기쁨조’인 것처럼 ‘즐거운 이벤트’에만 몰두하느라(요란스러운 게 아니더라도), 정작 서로의 일상과 삶에는 관심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을까. 배울 게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아무리 배워도 내 것처럼 몸에 붙지 않는) 데이트 기술이 아니라, 서로의 삶이지 않았을까.

- 내겐 언제나 불안한 연애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은 이런 심연의 폭풍을 경험한다. 문제는 그 절호의 찬스를 그냥 흘려보낸다는 거다. 사랑이라는 걸 대상의 문제로만 접근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받아 주는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등등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요컨대, 오직 최종적 결과(결혼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만 집착한다. 따라서 거기에선 존재의 전이가 일어나기 어렵다. 존재가 뒤바뀌는 체험을 하려면 폭풍 자체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폭풍이 내 몸의 세포조성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도록 몸을 맡겨야 한다.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 152~153쪽.

결핍의 또 다른 결과. 그건 바로 집착. 연애 한두 번 해본 사람도 아니고, 이제는 되도록 상대에 연연해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상대로부터 자유로워서라기보다는 상대방을 오랫동안 잘 소유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일명 밀당. 그것 역시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라는 또 다른 집착을 낳는다. ‘밀당’을 욕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런대로 좋은 방법이긴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당의 문제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당황하기도 쉽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했으면 응당 이런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왜 다르게 행동하지? 때론 당황을 넘어서 분노가 폭발하기도 한다. ‘왜 (내가 생각한 것처럼) 이렇게 반응하지 않느냐’고 말이다(상대방도 당황스럽고 분노가 일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밀당에서 ‘나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은 별로 없다, 다만 ‘바꾸는 척’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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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_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동경하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독점을 원한다. 그는 홀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 안에 최고의 대상, 가장 갈망할 만한 대상으로서 머물며 상대방을 지배하려 한다." - 니체, 『즐거운 학문』, 86쪽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밀당의 즐거움은 잠시뿐이다. 내가 기대했던 상황은 자꾸만 어긋나게 마련이고, 이제는 상황을 즐기기는커녕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된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 몸을 맡기지 않고, 나에게 유리하고 좋은 상황만을 인위적으로 만들려 했기에 초래된 결과였다. 이제 나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심연의 폭풍’, 달리 말해 연애가 이제는 두렵기까지 하다.

- 사랑의 실패는 언제나 무지(無知)와 맞닿아 있었다

일단 가볍게 생각해 봐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앎의 충동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등과 같은 실존적 질문 속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물론 그것을 탐구해 가는 과정은 절대 만만치 않다. 기존의 상식이나 논리가 통째로 무너지면서 무시로 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각오해야 한다. …… 앎의 크기만큼 사랑의 열정도 자라게 되어 있다. 흔한 말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되는 법. 즉, 아는 만큼 사랑한다!
―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 204쪽.

고백하자면, 현재 나의 연애는 약간 주춤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순탄하다 생각했던 연애였는데, 갑자기 갈등과 시련의 순간이 오자 눈앞이 깜깜해져 온다. 벌어진 문제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연인을 앞에 두고 나는 또 멍을 때리고 앉아 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는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다, 나는 지금껏 어떤 사람을 알아왔고 사랑했던 거지?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사실 상처주기가 아니라 의견 차이였고, 갈등이었지만 나는 또 그렇게 오해했다) 왜 우리는 만나야 하는 거지?’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이번에도 또 헤어져야 하는 건가?’……. 어떤 방향도 없이, 또 어떤 순서도 밟지 않고 갑자기 그 생각까지 가 버렸다, 습관처럼. 단지 상대에 대해 무지한 것일 뿐인데, ‘사랑의 식음’, ‘서로 맞지 않음’으로 귀결시켜 버렸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상대에게 예기치 못했던 반응을 들었을 때, 나는 자꾸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혹은 ‘이 반응을 받아들일 만큼 내가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저 밑에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해왔던 연애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마도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내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늘 가던 곳(데이트 코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갈등이 끝난 이후에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이 권태로움 뒤의 우리의 관계는? 거기까지 제발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자꾸만 발버둥 치고만 있다. 나의 ‘연애’는 자꾸만 성장을 거부하려고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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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면서 우정을 나눌 수 없다면, 연인이 될 수 없다. 친구이면서 사랑보다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역시 친구라 할 수 없다. 사랑과 우정만큼 가까우면서도 먼 단어도 없다. 하지만, 이 간격을 넘지 않으면 사랑은 절대 도약을 이루지 못한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266쪽

지금의 상황을 잠깐 얘기하면, 나와 나의 연인은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서로의 마음을 정리할 시간 말고, 우리에게 지금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 우리는 이 무지(無知)막지한 연애에 이미 많이 지쳐 있었고,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연애와 일상 사이에서 어떻게 시간과 에너지를 분배해야 하는지 등을 생각해 본 후에, 앞으로 함께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물론 조금은 두렵다. 아니, 막연하게 모든 게 다 두렵다. 내 잘못이고 네 잘못이고 간에 수많은 문제들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온다(그냥 헤어지고 ‘새출발’하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언제까지 이 성장 없는 연애를 반복할 테냐, 라고 스스로에게 단호하게 물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 연애가 계속될 것인지, 여기서 이렇게 끝날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예측 불가능함 속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상대를 힘들게 하는 지점들을 차분하게 한번 찾아보고 싶다. 이미 알고 있던 것들 말고, 내가 정말 몰랐던 점들을 찾게 될 때까지. 그리고 그 앎 속에서 내가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나를 뒤흔드는 폭풍 같은 순간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 편집부 김미선
2011/07/20 09:00 2011/07/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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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1/07/20 18:5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그린비 2011/07/21 00:19

      아! 제보 감사합니다. 밀레이가 맞아요. ^^

  2. 서른즈음에 2011/11/10 09:46

    아,, 생각해보면 내 불안때문에 지금까지의 사랑이 아슬아슬했던 거 같네요-
    결국 난 내 감정에 취해서,,, 상대방의 마음까지 들여다 보지 못하는
    아둔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관계란 스스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원초적이고 잔혹한 욕망이다'라고 했는데,
    그때는 잘 이해를 못했는데- 나이를 먹었는지 이제는 책의 글귀들이
    가슴에 콕콕 박히네요.ㅎ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도 꼭 읽어보고 싶어요.^^

    • 그린비 2011/11/10 10:45

      저도 돌이켜보면, 늘 불안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그 생각때문에 오히려 상대를 압박하고, 스스로도 그 불안 속에 매몰되곤 했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요.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읽으면서 많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린비 책이라서가 아니라, 관계맺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책이기에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