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떻게 보면’ 『들뢰즈 이해하기』에서 ‘들뢰즈’와 ‘이해하기’는 일종의 형용모순입니다. 만약 들뢰즈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적어도 일반적인 철학적ㆍ과학적 이해와는 다른 것입니다.

보통 전통적인 철학은 세계나 삶이 정초할 수 있는 근원적인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하죠. 그건 때론 신과 창조된 세계일 수도, 완성을 향해가는 역사의 흐름일 수도, 주체나 이성 혹은 인식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를 완성함으로써 세계, 삶 혹은 앎의 뿌리를, 나아가 그 뿌리에서 뻗쳐나간 줄기와 나뭇잎 전체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합니다(때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절망하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많은 철학에서 ‘이해’란 일종의 지도 그리기입니다. 세계의, 역사의, 주체와 이성의, 인식구조의 지도. 그런데 때로 위대한 철학자들은 거대하고 복잡한 (그러면서도 불완전한) 지도를 그립니다. 그리고 철학 해설서들은 많은 경우 그 너무나 거대한 지도에 대한 지도이고요.

들뢰즈의 ‘이해’가 불가능한 건 들뢰즈가 그러한 지도 그리기를 시도한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창조하는 힘과 욕망들을 사유하고자 했습니다. 얼핏 보면 이는 삶의 기저를 이루는 것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처럼, 즉 인식 구조의 지도를 그리고자 하는 철학적 시도나 세계와 생명의 궁극적인 원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과학적 시도와 유사한 어떤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후자들이 일종의 시작점(마치 ‘부동의 동자’와 같은)에 대한 사유이자 인간ㆍ사회ㆍ학문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인 반면, 들뢰즈의 사유는 고정되지 않고 생산‘하고 있는’ 힘들에 대한 사유이며, 또한 그 자체가 하나의 창조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선 그건 일종의 ‘사용 방법’을 익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망망대해에서 나침반을 통해 길을 찾아가듯이, 그의 사유는 삶을 살아가고 실험하고 창조하기 위한 나침반 같은 게 아닐까 싶은 거지요. 다만 이 나침반은 사용방법이 난해하고 복잡해서 읽어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저는 『들뢰즈 이해하기』는 비교적 명쾌하고 쉽게 들뢰즈를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들뢰즈를 ‘오독하지 않기’입니다. 비록 들뢰즈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는 종류의 사유는 아닐지라도, 나름의 방향성을 지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 역시 창조하는 힘에 대해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 형식으로 사유했지만, 그렇다고 이를 파시즘적으로 읽는 것은 분명히 오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들뢰즈 역시 충분히 오독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마드’ 같은 개념을 자본주의가 전유하는 방식 같은 게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저는 이 책이 그러한 오독을 막기 위한 ‘하나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써놓고 보니 파시즘 사례는 좀 ‘과도’하군요--;; 들뢰즈가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오독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쩝).

이 책이 들뢰즈를 읽다가 좌절한 이에게 다시 들뢰즈의 사유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기를, 그리고 처음 들뢰즈를 접하는 이에게는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들뢰즈의 원전에 도전하고, 더욱 나아가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다른 삶을 창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부 홍원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들뢰즈 이해하기
클레어 콜브룩 지음, 한정헌 옮김|도서출판 그린비 | 갈래 : 인문, 철학

발행일 : 2007년 12월 20일 | ISBN : 978-89-7682-306-9
신국판 변형(150×220mm)|360쪽
알라딘 링크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2008/01/15 11:40 2008/01/15 11:4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14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