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불량노동자

임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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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빗소리를 듣는다. 함석으로 된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제법 굵다. 반갑다. 이곳에 온 후 한 달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던 새벽기상을 면할 수 있을까 싶어, 제발 이 비가 내일 아침까지 쭉 내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고대하며 다시 잠을 청했건만, 야속한 비는 밤 사이 멈춰 버렸나 보다. 달그락 달그락, 엘레나의 이른 아침 준비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기름에 튀긴 토르티야, 그리고 설탕과 소젖이 듬뿍 들어간 커피와 함께 아침은 차려졌을 터,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면서도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침대 안에서 꼼지락거린다. 멎어 버린 비가 야속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마음이 깊어도 한참 깊은 엘레나가 이런 내 철없는 속을 읽은 것일까? 계란 프라이 냄새가 난다. 서너 마리 있는 닭이 알을 낳을 때마다 며칠 후 있을 결혼 1주년 기념일 파티에 쓸 거라고 한 알도 먹지 않고 모으더니, 사나흘 전부터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내 말이 그 깊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오늘 도시락에는 기름에 볶은 밥 위로 계란 프라이가 얹어질 것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캄캄한 새벽 세 명이 둘러앉은 작은 식탁엔 이번 주말에 있을 엘레나와 기예르모의 결혼 1주년 기념 파티에 대한 이야기들이 훈훈하게 오고 갔다. 오늘 엘레나와 기예르모가 번 돈으로 파티를 위한 쌀을 사고, 내일부터 주말까지 번 돈으로 고기를 살 것이라 했다. 하루 쉬고픈 요량으로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았던, 나이 많은 나의 철없음이 그들 앞에 부끄러워진다.

아침을 먹고 나설 채비를 하는데, 그제야 다시 비가 쏟아붓는다. 비가 몇 차례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날이 밝는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커피밭에는 사람들이 모여 커피를 따고 있었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기왕 젖는 것, 거추장스런 비닐을 벗어 버렸다. 오히려 시원하고 좋다. 오늘 커피 따고 받는 돈으로 쌀을 산다니, 여물지 못한 내 손끝도 덩달아 속력을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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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따는 엘레나

오락가락하던 빗속에 해가 나오기 시작할 때쯤 질퍽거리는 땅에 비닐을 깔고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히야~ 예상했던 대로 밥 위에 계란 프라이가 얹어져 있다. 계란 프라이 하나로 마음이 한없이 기뻐진다. 한국에서라면 너무도 흔한 음식일 텐데, 그 음식이 귀한 것이던지, 엘레나는 자기 밥 위에 얹어진 계란 프라이를 뚝 잘라 같이 도시락을 먹던 시어머니 도냐 플로르의 밥 위에 얹어 준다.

도시락을 먹고 얼마나 일을 했을까? 젖은 옷은 몸에 척척 감기고, 태양은 뜨겁고, 개미들은 자꾸만 달라붙고, 참 견디기 힘든 날이다. 촤르륵~촤르륵~ 사방에서 커피열매를 바구니에 쏟아붓는 소리만 들리는데, 내 머릿속에 또 다시 회의가 인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 것인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나를 힘들게 한다. 커피 한 알이라도 더 따서 이번 주말에 있을 엘레나와 기예르모의 결혼 1주년 기념 파티에 쌀을 보태기로 한 나의 각오는 어디로 간 것인지……. 계란이 얹어진 도시락까지 먹고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밖에 없다. 결국 핑계를 찾는다. 고기를 사러 가자. 하루에 한 번 마을 어귀에 들어오는 고기 차가 올 시간이다. 커피 수확 작업을 다 마치고 가면 분명 오늘도 고기 차는 없을 터, 지금 고기를 사러 가야겠다.

커피밭에서 빠져나올 핑계를 대느라 너무 서둘렀는지, 고기 차가 도착하질 않아 마을 어귀, 이 마을에 들어오던 첫날 비를 피하던 가게 처마 밑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고기를 사기는 샀으나 다시 사람 한 명 없는 길을 거슬러 2km 가까이 떨어진 엘레나 집까지 갈 일이 깜깜하다. 버스를 기다려 타고 올라가기로 한다. 기왕에 버스 타고 올라갈 것, 콜라도 큰 걸로 한 병 샀다. 코카콜라를 사고 싶었으나, 하나뿐인 마을 가게에는 국적불명의 빅콜라뿐이었다. 고기와 콜라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일을 마친 엘레나가 와 있으려니 기대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날 같으면 분명 이 시간쯤 돌아왔을 텐데, 오늘은 작정하고 커피를 따는 모양이다. 고기와 콜라를 사 가지고 올 때 기뻐하는 엘레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왔는데, 피시식 바람이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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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공판장 앞 풍경

엘레나는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침 9시에 점심 도시락을 먹고 다시 꼬박 여섯 시간을 더 일한 셈이다. 계측이 끝나고도 커피밭에 혼자 남아 두 시간 더 커피를 따다 왔다고 했다. 그렇게 오늘 열네 바구니를 했단다. 올해 들어 가장 많이 딴 날이라고 했다. 내가 겨우 한 바구니 보태 주었으니, 엘레나 혼자 열세 바구니를 딴 셈이다. 계측이 끝나고 아무도 없는 커피밭에 혼자 남아 두 시간여 더 커피를 땄을 그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측은해진다. 엘레나에게 사온 고기를 보여 주고, 얼른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엘레나는 혼자 열세 바구니를 땄다는 사실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콜라와 고기가 있어서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속에 섞인 나를 본다. 커피를 따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나, 그래서 오늘도 비가 내려 주길 간절히 바랐고, 비겁하게 조퇴를 했다. 내일 당장 커피밭에 나가지 않아도 굶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이들과 나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일까? 모든 것이 혼돈스러운데, 집 안 구석구석 바닥을 닦는 엘레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땡볕 아래 10시간 가까이 커피를 따고 돌아온 엘레나는 콜라 한 잔에 아주 행복해했다. 나는 콜라 한 잔에 그녀만큼 행복해할 수 있을까? 세상사람들이 콜라 한 잔으로 지금의 그녀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콜라 한 잔으로 인해 그녀만큼 행복해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세상 더없이 많은 것을 누리고 산다 해도 지금의 엘레나처럼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땡볕 아래 커피를 따야 하는 상황에서도 온전히 자기 삶에 감사하는 엘레나에 비춰 나를 본다. 커피 따는 손이 여물지도 못하고, 굳은 결심과는 상관없이 지각과 조퇴를 밥 먹듯 하고, 게다가 그녀만큼 사소한 것에 행복해할 줄 모르니, 나이 어린 엘레나 앞에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하루 10시간을 일하고 돌아와 힘든 줄도 모르고 흥얼흥얼 노래까지 불러 가며 집에 반짝반짝 광을 내는 엘레나를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내가 참 불량하다. 커피밭 노동자로서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도 그녀에 비한다면 한참 불량하다. 그녀는 알까? 내 마음속에 이미 그녀가 커피밭에서뿐 아니라 삶에서도 선배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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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와 기예르모의 결혼 1주년 기념일 파티 때 찍은 사진.

※ 『커피밭 사람들』의 「나, 불량노동자」편을 발췌·요약하였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실천(!)이 잘 안되는 분들과 이 글을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제가 왜 이리 뜨끔할까요...-_-;)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발견하고 느낄 때, 우리의 삶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
커피밭 사람들 - 10점
임수진 지음/그린비
2011/07/26 14:39 2011/07/2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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