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 갇힌 사람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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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흑인의 역사>

몇 세기 동안 이 나라는 반복했다. 우리는 잔인한 짐승임을. 인간의 심장박동이 흑인들의 세계, 그 입구에 멈췄음을. 우리는 그저 걸어 다니는 노예임을. 부드러운 사탕수수와 비단 같은 면화를 제공하겠다고 비굴하게 약속하는 노예임을.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시뻘건 인두로 지져 노예의 신분임을 새기고 우리는 헛간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광장에 내다 팔았다. 1야드의 영국 옷감과 맵짠 아일랜드의 고기가 우리들 몸값보다 약간 쌌다. 이 나라는 이렇게 평화로웠고, 조용했다. 신의 영혼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노예선의 토사물이었다.
우리는, 칼라바의 사냥감이었다.

─에메 세제르, 『귀향수첩』, 40쪽, 그린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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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어윗(Elliott Erwitt)의 사진 작품

나는 우레와 같은 상찬의 함성을 듣는다. 진보와 위대한 ‘성취’와 질병의 완치와 삶의 질의 진일보에 대해 의심 없이 떠드는 사람들의 함성을.
그럴 때면 나는 본질을 박탈당한 사회와 그 사회의 짓밟힌 문화와 해체된 조직과 빼앗긴 땅과 풍비박산 난 종교와 파괴된 정교한 예술품과 피어 보지도 못한 나름의 놀라운 가능성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식민주의자들은 내게 사실을, 통계학을, 몇 마일에 이르는 신작로를, 운하를 그리고 철로를 들이민다.

─에메 세제르,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 22쪽, 그린비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유·인권·박애를 외쳤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숭고한 개념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없었더라면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 이른바 문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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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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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지닌 구속력이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걸프전 때, 헌법에 발이 묶인 일본은 악의 상징이 된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를 정벌하려는 다국적군에 가세할 수 없었다. 그 떨떠름함을 떨치기 위해 일본 국민은 ‘국제 공헌’이라는 미명 아래 선진국 중에서도 최대의 거출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을 생각할수록 ‘유엔=절대정의, 이라크=절대악’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도저히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지금에야 많은 사람들이 눈치채고 있다. 이라크가 사용한 무기의 90퍼센트 이상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인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명백하다. 그러나 ‘국제 공헌’이라는 미명은 사태의 본질을 흐려놓았다.

─요네하라 마리, 『마녀의 한 다스』, 77~78쪽, 마음산책

우리는 진실을 모른다고, 그때 진실을 알았더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진실의 존재여부를 떠나) 지나간 사건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되물어보자. "우리의 행동은 달라졌는가?" 우리가 '선과 악', '문명과 야만'이라는 언어에 갇혀있지 않은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행동은 반드시 언어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웹기획팀 이민정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 - 10점
에메 세제르 지음, 이석호 옮김/그린비
마녀의 한 다스 - 10점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마음산책
2011/08/10 15:00 2011/08/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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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진한양 2011/08/10 16:46

    인간에 대한 차별은 우리 또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것 같아요.
    과거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을 때 받은 온갖 차별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일본을 싫어하는 감정(특히 스포츠에서, ㅎㅎ 오늘 한일전 축구하네요....)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왜 그렇게 일본인들을 싫어하는지 가끔 궁금할 정도로요. 조금 매정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일본 사람들하과 과거의 일본 사람들 하고는 다른 사람들이자나요~ ^^
    얼마전에 영화 무산일기를 봤는데요. 평소엔 같은 동포라고 그렇게 떠들면서
    막상 125라는 숫자 때문에 차별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들이 우리의 동포로써
    사회에 적응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봤어요 ㅠㅠ
    말에 앞뒤가 없죠? ㅡㅡ;

    • 그린비 2011/08/10 17:42

      아, 오늘 한일전을 하는군요. (전혀 몰랐어요 ^^;;)
      차별받는다거나, 차별하는 것은 그 행동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가 더 '강자'인가, 이런 맥락에서 접근하면 어려워지긴 합니다만...어쨌든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인종차별'을 하는 현실(!)을 직시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당. ^^

      오늘 <무산일기>를 본 동료분이 재미있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순진한양님도 이 영화 이야기를 하셔서 문득 궁금해지네요. 전 아직 못봤습니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