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에 대처하는 우주적 용법

안도균(도담)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이 서로 화합하여 사람을 이룬다. 근골의 기운은 땅에 속하고, 정(精), 혈(血), 진액(津液)은 물에 속하며, 호흡과 체온은 불에 속하고, 정신과 활동은 바람에 속한다. 그러므로 바람이 그치면 기가 끊어지고, 불이 없어지면 몸이 차가워지고, 물이 마르면 피가 없어지고 땅이 흩어지면 몸이 갈라진다.
─허준, 「신형문·사대성형」, 『동의보감』

얼마 전 <수유+너머 남산> 연구실에서 학술제가 열렸다. 다양한 공부의 성과들이 강의, 토론, 연극 등으로 펼쳐졌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공연 하나, 바로 만해의 철학을 ‘무릎팍도사’ 패러디로 재구성한 콩트였다. 도사를 찾아온 의뢰인은 떠나간 여친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남자. 그는 여기저기 남겨진 그녀의 흔적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 말에 도사는 우스꽝스런 분장과는 달리 정말 도사다운 답변을 했다. 그녀의 흔적이 아닌 게 어디 있겠냐고, 5년 동안 그녀와 함께 했던 시공간뿐만 아니라, 지금의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녀의 흔적들이라고. 더불어 당신은 당신이 공부했던 푸코와 만해의 흔적이고, 지금 주위에 같이 공부하고 있는 학인과 스승들의 흔적, 또한 새와 나무, 땅과 하늘의 흔적들이라고. 그렇게 당신과 그녀 그리고 만물은 무수한 흔적들의 집합일 뿐, 당신을 떠나간 고유한 그녀의 실체는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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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싼 주변 조건이 바뀌었는데, 내 몸의 어떤 곳은 여전히 과거의 순간에 묶여 있으면 그게 곧 병이 된다."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249쪽)

배꼽이 빠지도록 재밌게 연출한 그 콩트를 보고 나도 오래전 연인과 이별했던 때를 떠올렸다. 별짓을 다해도 잊기 힘들던 시절. 밥은 물론 술도 안 먹히고, 담배와 기타만으로 버티던 날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 사건이 왜 이렇게 날 지치고 힘들게 하는지 궁금해졌고,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이별에 대한 글을 한번 써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글을 통해 나는 이별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해 나가길 원했고, 더불어 비슷한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글의 형식은 소설로 정했다. 줄거리는 통속적이고 진부한 스토리였는데, 실연의 아픔을 겪은 주인공이 여행을 하면서 이런저런 스승들에게 조언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엔 안 나오지만 그때는 자못 진지했다. 그런데 난 그걸 준비하면서 실제로 여러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허준이었다.

『동의보감』에는 유불선 삼교회통(三敎會通) 사상이 깔려 있다. 위의 인용문은 그 중에서 불교수용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진술이다. 인간의 몸은 땅[地]과 물[水]과 불[火] 그리고 바람[風] 등, 천지자연에 의해 만들어졌다. 구체적으로 근골, 정, 혈, 진액, 호흡과 체온, 그리고 정신 등 생명활동의 모든 영역이 지수화풍(地水火風)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렇게 인간 존재 안에 우주적 기운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연이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사람의 몸과 마음도 계속 바뀌고 있다. 그런데 집착이 생기면 그 변화의 흐름을 막아 몸 안의 지수화풍의 순환이 멈추게 되고, 결국 기가 끊어지고, 몸이 차가워지고, 피가 없어지고 몸이 갈라지게 된다.

내 마음은 그녀와 있던 시공간에 머물러 있었고, 동시에 몸의 순환도 정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몸이 바뀌어야 감정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점차 다른 존재로 느껴졌고 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더 이상 지나간 시공간과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지수화풍이 새로운 계절을 받아들이고 변모해 가는 것처럼, 나도 새로운 시절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몸과 질병에 대한 『동의보감』의 우주적 원리가 실연에 적극적으로 응용된 셈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수화풍처럼 사람도 늘 비워 내고 또 새로 담아야 한다. 인연도 역시 시절에 따라 흘러가고 또 새롭게 오는 법. 그래서 이별은 슬픔인 동시에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개그 프로의 제목처럼,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바로 이러한 우주적 용법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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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 <무제> _ "어떤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우상화해서 스스로 복종하는 노예가 되고, 어떤 이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그 대상을 구속해서 노예로 삼는다."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28쪽)

안도균 | <수유+너머 남산> 감이당 연구원. 오랜 시간 홀로 한의학을 공부해 왔고, 대학에선 수의학을 전공, 현재는 감이당에서 인문학과 의역학을 공부하고 있다. 흩어 놓고 보면 서로 다른 공부 같지만, 배움에 단절은 없다. 지금은 그 공부들의 정수를 잇고 새로운 배움을 모아 ‘인문 의역학’의 새싹을 틔우는 중이다.
동의보감 - 10점
허준 지음, 윤석희 외 옮김, 대한형상의학회 외 감수/동의보감출판사
2011/08/29 09:00 2011/08/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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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 2011/08/29 15:32

    어제 올리신 글 내용처럼 저도 항상 마음길이 어찌나 올곧게(^^;;) 하나의 길만 내는지 그게 힘들었는데 그렇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몸이 바뀌어야 하는 군요. 앞으로 마음이 힘든 상황을 만나면 일단 몸부터 바꿔봐야겠습니다.

    • 그린비 2011/08/29 15:38

      몸을 바꾸는 좋은 비법(!)을 소개해 드리자면..."가장 하기 싫은 것을 하면 된다!" 입니다.
      저처럼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산책이나 백팔배 등 몸을 꾸준히 움직이는 습관을 만들면 되는 것인데요~ 이게 참 쉽지 않더군요. 흑~!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있습니다. ㅎㅎ
      함께 바꿔 보아요~ ^^*

  2. 순진한양 2011/08/29 18:29

    예전에 강의를 들었을 때 선생님께서 '호흡'이란 것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던 것이 생각이 나요. '먼저 버릴줄 알아야(호) 새롭게 받아 들일 수 있다(흡)'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크게 감동 먹었었어요. ㅠㅠ
    저도 이별,좌절,배신(?) 등등으로 힘들어 할 때 가장 중요한 '지금'을 망각하고 과거에만 묶여있다 보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윗 글 처럼 '지수화풍'의 막힘 속에서 살았나봐요. 결국엔 나만 망가지는 결론? ㅋㅋ

    • 그린비 2011/08/29 19:21

      오~ 저도 공부 속에서 계속 만나는 부분이었습니다.
      빈곳이 있어야 채워지고, 또 다시 빈곳이 생기고...이것이 순환이라는 말씀을 들었지요.
      막힌 곳을 확~ 뚫으시고, 순환을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